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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서유럽 방문해 직접 조선소 기술 체험…서구식 제도로 바꾸고 전함 근대화
러시아 부국강병 선구 표트르 대제, 몸소 배우다
2019. 12. 13 by 김현민 기자

 

표트르 대제(Pyotr I)가 권력을 장악한 1694년의 러시아는 덩치만 컸지, 허약한 나라였다. 영토는 시베리아와 오호츠크해까지 뻗어 나갔지만 선박을 기항시킬 항구조차 없었다. 겨우 발트해로 나갈 입구는 있었지만 그 바다는 스웨덴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쪽 흑해로 나가려고 해도 오스만투르크의 조공국인 크림 칸국이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권력투쟁에 휩싸였다. 표트르는 10살에 이복형 이반 4(Ivan V)와 공동황제로 등극했지만, 권력은 이복누이 소피야(Sophia Alekseyevna)가 장악했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표트르가 단독황제로 실질적 권력을 쥔 때의 나이는 22세였다.

표트르는 아웃사이더로 있을 때 외국인들과 많이 접촉했다. 선제 표도르 3(Feodor III) 시절엔 모스크바 교외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독일인 법학자, 우크라이나 성직자, 네덜란드인, 스코틀랜드인, 베네치아인, 프랑스인들과 사귀었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표트르는 러시아의 부국강병 정책을 몰입했다. 그의 부국강병은 서유럽을 배우는 것이었다.

집권하자마자 표트르는 흑해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1695년 무려 12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아조프(Azov)를 공격했지만 크림-오스만 연합군에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러시아 함대로는 막강한 오스만 해군을 이길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차르 표트르는 북방의 스웨덴, 남쪽의 오스만을 이기려면 서유럽의 전함 건조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250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절단을 편성하고, 자신도 포함시켰다. 사절단의 공식 대표로 프란츠 레포르트(Franz Lefort), 페도르 골로빈(Fedor Golovin), 프로코피 보즈니친(Prokopy Voznitsyn) 등 귀족을 앞세웠지만, 사실상 대표는 황제 자신이었다. 표트르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표트르 미하일로브(Pyotr Mikhailov)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사절단은 169739일 모스크바를 떠났다. 하지만 그의 위장술은 금새 드러났다. 그의 키는 2m3cm, 당시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 크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군주와 귀족들은 키 큰 이가 러시아 황제임을 단박에 알게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 동상. 조선소 작업을 형상화했다. /위키피디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 동상. 조선소 작업을 형상화했다. /위키피디아

 

표트르는 유럽에서 환대를 받았다. 라트비아의 쿠르란드(Courland) 공국에서 프리드리히 카시미르 케틀러 공작을 만나고, 프러시아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만났다.

그해 8월 네덜란드 잔담(Zaandam) 곳애서 당대 최대조선소를 방문했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그가 러시아 황제임을 알았다. 네덜란드는 황제가 선박건조 과정을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배를 건조하는 작업장에서 기술을 익혔다.

이때의 일화가 후대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표트르는 자신이 황제임을 감추고 조선소에서 직접 일을 했다고 한다. 황제는 연장을 들고 목수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잔담의 목수라고 불렀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5개월간 머물렀다. 무엇보다 당대의 해양강국에서 그는 조선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접했다. 러시아가 해양강국으로 성장하려면 강력한 해군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도구를 들고 배를 만드는 일에 참가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그가 작업한 배를 그의 이름을 따 피터 앤드 폴이라고 명명했다. 표트르는 영어로 피터(Peter)로 표기된다. 지금도 네덜란드엔 표트르가 숙식하던 집이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고,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시 암스테르담에 돌아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인들과 귀족들을 만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는 국왕 윌리엄 3세가 그린위치와 옥스퍼드에서 그를 접대했고, 초상화도 그렸다. 그때 그려진 초상화가 아직도 영국에 남아 있다. 그는 영국에서 함대 훈련 모습을 구경하고 항구의 도크와 무기공장도 방문했다.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의 라이프찌히, 드레스덴을 들러 그곳 군주들과 동맹을 추진했다. 그는 이탈리아까지 여행하려 했지만, 본국에서 스트렐치(Streltsy)라는 근위대의 반란이 일어나자 급히 귀국했다. 그의 해외순방은 17개월이나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에도 몰타에 대표단을 보내 그 유명한 몰타기사단의 전술을 배우도록 했다.

 

1700년대 러시아 영토 /위키피디아
1700년대 러시아 영토 /위키피디아

 

군주가 몸소 해외에 나가 견문하고 작업장에 뛰어드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다. 그만큼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직접 체험하고 뛰어든 것이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반란자들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직접 반란자들에게 고문을 가했고, 그에게 반항하는 왕족과 귀족들을 쫓아냈다.

 

그는 서유럽에서 배운 것을 러시아에 이행했다. 절대왕권을 획득한 그는 근대화를 추구하는데도 독재적 권한을 휘둘렀다.

그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제도개혁은 수염을 자르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은 긴 수염을 자랑했는데, 표트르는 직접 가위를 가지고 궁정 사람들의 수염을 잘랐다.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고 수염을 기르는 귀족들에게 수염세(beard tax)를 물려 수백 루블을 받아 냈다.

표트르는 또 치렁치렁한 러시아 전통의상을 입지 못하게 하고 대신 헝가리식 카프탄을 입으라고 했다가 다시, 프랑스와 독일식 의복을 입으라고 명령했다. 모스크바에 들어올 때 러시아식 전통의상을 입으면 세금을 물렸다.

그는 또 달력도 서유럽에서 사용하는 율리우스력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서기 170091일에 170111일이 되었다. 시계도 바꿨다. 당시 러시아 시계는 17시까지 표시되었는데, 서유럽처럼 12시로 바꾸었다.

표트르의 이같은 조치는 엄청난 혼란을 초랬다. 러시아 귀족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차르는 밀어붙였다. 그의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은 외아들 알렉세이마저도 황태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표트르 대제가 네덜란드 잔담에서 숙식하던 집 /위키피디아
표트르 대제가 네덜란드 잔담에서 숙식하던 집 /위키피디아

 

무엇보다도 표트르는 특히 군사력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서구식으로 함대를 창설했고, 군의 편제와 훈련 방식도 개편했다.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해 산업과 무역 발전 정책들을 시행했다.

근대화를 위한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되었다. 700년부터 각종 전문기술학교, 군사학교, 종교학교가 설립되었다. 1714년 칙령으로 전국에 산수학교를 설립해 초등교육 기관으로 러시아어와 산수, 기하학을 무상으로 가르쳤다.

1713년 표트르 대제는 제국의 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다. 수도 건설에 외국 건축가들이 참여했고 건물은 유럽풍으로 지어졌다.

 

표트르의 근대화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성과를 냈다. 1700년 러시아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스웨덴군에 패배했지만 점차 근대적인 함대료 편성된 러시아 해군은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 스웨덴은 오스만투르크와 동맹을 맺으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표트르는 그동안 건조한 대규모 함대로 1704년 스웨덴 함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후 스웨덴 본국으로 진격했다.

1721년 결국 스웨덴은 러시아와 강화를 맺게 되었고, 러시아는 발트해에 항구를 얻게 되었다. 이에 앞서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흑해의 아조프를 빼앗아 남쪽에서 부동항을 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일군 해군은 당시 최강의 영국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동안 동토에 뒤쳐져 있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표트르 대제 때부터였다.

 

표트르 대제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린 초상화. (Godfrey Kneller 그림) /위키피디아
표트르 대제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린 초상화. (Godfrey Kneller 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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