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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일등 포도주 만들기 위해 런던과 파리 로스차일드 가문의 치열한 대결
로실드 와인은 왜 프르미에 크뤼에 집착했을까
2019. 12. 15 by 김현민 기자

 

와인 전문가들은 세계적인 금융가문 로스차일드가 프랑스에서 만드는 로실드’(Rothschild) 브랜드를 최고로 꼽는다. (로실드는 로스차일드의 프랑스어 발음이다.) 샤토 무통 로실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샤토 라피트 로실드(Château Lafite Rothschild)라 하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족을 못 쓴다. 가격도 엄청 비싸다. 한 병에 몇억원에 호가하는 것도 있고, 세계의 왕가나 국가원수들이 국빈용으로 사용하는 와인으로 사용되고 있다.

로실드 와인의 역사는 160년이 넘는다. 모든 로실드 와인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포도농장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인 것은 맞지만, 크게 런던 집안과 파리 집안에서 생산하는 와인으로 나눠진다. 두 집안은 포도주로 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가문내 경쟁이 로실드의 브랜드를 올려놓았다.

 

샤토 무통, 1975년산, 1983년산, 1990년산, 1991년산, 1992년산 /위키피디아
샤토 무통, 1975년산, 1983년산, 1990년산, 1991년산, 1992년산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가문은 창업자 마이어 암셸(Mayer Amschel Rothschild)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금융사업을 일으켜, 다섯 아들 가운데 맏아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남겨두고 나머지 넷을 런던, 파리, , 나폴리에 보내 유럽 금융을 장악한다. 그중 셋째 나탄(영어로 네이선)은 런던에서, 막내 제임스는 파리에서 금융회사를 만들어 성공한다. 부자가 된 2세와 3세는 가난했던 선대와 달리 귀족의 문화를 접하게 되고, 예술과 문학, 귀금속 수집등의 취미를 갖는다.

2대 중에서 막내 제임스는 가장 리버럴했다. 프랑스의 문화를 접하면서 귀족풍으로 사업을 했다. 그는 주체할수 없이 재산을 모으게 되자 포도농장을 갖고 싶어 했다. 프랑스 제일의 포도농장 샤토 라피트(Château Lafite)가 탐이 나 그는 주인인 영국 은행가 새뮤얼 스콧 경에게 팔라고 했다. 스콧경은 단박에 제임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가 그 포도농장을 손에 넣는데 37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샤토 라피트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위키피디아
샤토 라피트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위키피디아

 

제임스보다 선수를 친 것은 그의 영국 조카 나타니얼(Nathaniel)이었다.

나타니얼은 런던 로스차일드를 일으킨 나탄의 셋째 아들로, 가업은 큰형과 둘째 형에게 맡기고 파리에 머물며 숙부 제임스와 자주 대화를 했다. 제임스도 조카 나타니얼을 아들만큼 마음에 들어 했다.

제임스는 언젠가 메독(Medoc) 고원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샤토 라피트 레드와인을 마시면서 조카에게 와인 양조법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제임스는 포도농장을 하나 사서 와인을 생산하라고도 알려 주었다.

 

그런데 1853년에 나타니얼이 작은 아버지보다 먼저 포도농장을 사버렸다. 그것도 그가 사려다 실패한 라피트 농장의 바로 옆에 있는 샤토 브란 무통(Château Brane-Mouton)이었다. 그 브랜드는 당시에도 샤토 라피트와 최고를 다투는 보르도(Bordeaux) 지방의 고급브랜드였다. 나타니얼은 그 포도농장의 이름을 샤토 무통 로실드(Château Mouton Rothschild)로 바꾸고 본격적인 품질 경쟁으로 들어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포도주 사업에 뛰어들자 라피트측에서 비상이 걸렸다. 은행 재벌이 돈질을 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1855년 파리박람회에서 라피트가 와인 품평에서 1위를 차지하고 무통이 그 뒤를 이었다. 나타니얼은 무통이 2등을 하자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와인 돈벌이보다 품질과 명성에 더 열을 올렸다. 그는 영국인으로서 프랑스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접대한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다.

 

제임스 로스차일드, 나타니얼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제임스 로스차일드, 나타니얼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드디어 샤토 라피트도 경매에 나왔다. 소유주가 사망한 후 런던의 은행은 1868년에 샤토라피트 포도원을 경매에 붙였다. 파리 상인들은 또다시 프랑스 최고급 포도주가 또다시 런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자본 연합을 결성했다.

이때 파리 로스차일드의 제임스는 고령이었다. 그는 조카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경매현장에 대리인을 보냈다. 경매는 325만 프랑에서 시작되어 기세좋게 400만 프랑을 넘었지만 444만 프랑에 이르러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가격은 제임스가 부른 가격이었다. 이번에는 런던이 아닌 파리 로스차일드에게 프랑스 포도원이 넘어갔다. 경매가 끝난 그해 11월 제임스는 세상을 하직했다. 이로써 프랑스 최고급 와인 샤토 무통과 샤토 라피트는 각각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로 넘어갔다.

 

샤토 무통 포도원 /위키피디아
샤토 무통 포도원 /위키피디아

 

무통과 라피트는 그후 지배인에게 맡겨져 관리되었고,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타니얼의 증손자 필립(Philippe de Rothschild)이 무통 포도원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 샤토 무통 포도원을 물려받아 가꾸게 되었다. 전기와 수도를 끌어들이고 도로를 포장하고 집과 저장고를 수리했다.

필립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그동안 농장에서 포도주를 생산하면 중개인이 병 포장을 해 도소매상에게 넘기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필립은 생산지에서 바로 포장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포도주를 저장하고 병을 포장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야 하는데, 그에게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샤토 무통은 커다란 저장고를 지어 그곳에서 병 포장을 했다.

샤토 포장은 소비자의 인기를 끓었다. 다른 농장들도 그의 방법을 배웠다. 필립은 이웃 포도주 동업자들을 참여시켜 프르미에 크뤼 협회를 만들었다. 이 협회는 보르도산 포도주가 1등 산지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필립의 또다른 아이디어는 대중용 와인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샤토 무통 와인은 최고급이고 비싼 와인이었고,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마시기 어려웠다. 하지만 농장에서 생산되는 포도가 항상 최고급이지는 않았다. 질이 나쁜 포도로 최고급 상표를 붙일수는 없었다. 필립은 그런 포도를 모아 부담 없이 마실수 있는 포도주를 개발했다. ‘무통 카데’(Mouton cadet)가 탄생한 것이다.

 

샤토 라피트 포도원 /위키피디아
샤토 라피트 포도원 /위키피디아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필립은 농장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5년 필립이 보르도로 돌아왔을 때 샤토 무통은 처참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은 파괴되고 땅은 마구 헤쳐졌다. 나치는 포도농장에 포대를 설치했고, 포도주를 약탈하고 포도농장 건물의 마룻바닥을 뜯어 땔감으로 썼다. 필립은 당장 수리부터 했다. 그는 군사시설을 제거하고 가옥과 토지를 말끔히 정리했다.

그는 2차 대전의 승리(Victory)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화가 필립 줄리앙에게 그 유명한 V자 라벨을 디자인하도록 했다. 이 아이디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세계적인 유명 화가들에게 와인 라벨을 그리도록 부탁했다. 그의 주문을 받아 샤토 무통의 라벨을 만든 미술가는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조르주 브라크, 마르크 샤갈, 앤디 워홀, 사울 슈타인베르크, 키스 해링, 프랜시스 베이컨, 세츠코, 델퓌스, 게오르크 바젤리츠 등이다.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디자인은 사후에 재사용을 허락받았다. 오늘날 보르도 지방의 샤토 포장은 필립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필립은 또 무통의 지하 저장고를 개축해 화랑을 만들고 1966년에 수집품을 진열해 박물관을 개관했다. 그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박물관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2차 대전 후 세계적으로 와인 마시는 풍조가 각광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레드와인을 좋아했고, 부유층이 아닌 사람도 와인의 멋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메독의 포도주 가격은 10년 사이에 10배나 뛰어 올랐다.

이번에는 프랑스 로스차일드 집안이 포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샤토 라피트는 제임스의 후손인 기(Guy), 알랭, 엘리, 제임스 아르망의 공동소유였는데, 엘리(Élie de Rothschild)가 포도농장 운영을 자청했다. 엘리는 필립보다 15살 아래다. 로스차일드 가문도 몇 대를 내려가면서 후손들 사이에 유대 같은게 많이 흐려졌다.

엘리는 필립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른바 로스차일드 가문 사이에 포도주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런던 집안의 필립과 파리 집안의 엘리 사이의 전쟁은 20년간 지속되었다.

 

런던 가문의 필립과 파리가문의 엘리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런던 가문의 필립과 파리가문의 엘리 로스차일드 /위키피디아

 

엘리는 필립이 조직한 프르미에 크뤼 협회를 공격했다. 이 협회는 무통·라피트와 라투르·마고·오 브리옹 등 보르도의 일등 포도주 생산업자들이 참여해 품질을 인정하는 조직이었는데, 엘리는 1952년에 무통을 빼고 4인 협회를 만들었다. 엘리의 기습에 분노한 필립은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르도 포도주의 등급 분류를 폐지하고 새롭게 변신한다는 명분으로 협회를 재편성했다. 프랑스 포도주 업자들이 둘로 갈라졌다. 필립과 엘리는 친척 사이에도 불구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 언론들은 그들의 싸움을 비아냥거렸다.

포도주 등급 분류는 정치적 논쟁으로, 학술적 논쟁으로 번졌지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자존심과 감정 싸움이 되고 말았다.

무통과 라피트의 싸움은 1973년 엘리가 시작한 4인협회에서 결말이 났다. 엘리는 조카 에릭에게 지위를 양보했고, 협회는 에릭에게 샤토 무통이 프르미에 크뤼에 속하는 일을 반대한 엘리의 뜻을 접도록 설득했다. 에릭은 협회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필립의 샤토 무통은 마침내 승리했다.

 

19804월 샤토 무통은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북쪽 100마일에 있는 나파 밸리(Napa Valley)의 포도주 생산업자와 제휴관계를 맺었다. 나파 밸리에서 생산된 포도주에 프랑스 기술이 더해져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후 로스차일드 와인은 프랑스에만 머물지 머물지 않고 세계로 확장했다. 로스차일드는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포도농장을 확보하고 있다.

샤토 무통 로실드와 샤토 라피트 로실드는 세계적으로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 Classé)로 인정받고 있으며, 보르도 포도주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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