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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남미 연방국을 만들려던 볼리바르의 꿈, 독립운동가들의 지역세력화로 무산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의 불일치가 가져온 결과
2019. 12. 17 by 김현민 기자

 

1810~1820년대의 짧은 시기에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이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본국과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한다. 각나라마다 독립의 사연이 다르다. 크게는 브라질에선 포르투갈 왕세자가 자유주의자와 결합했고, 멕시코엔 현지 주둔군이 인디오 반란에 합세했으며 남미에선 남쪽 아르헨티나와 북쪽 콜롬비아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세력이 안데스 산맥 중부 페루를 점령하면서 여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 거대한 대륙이 짧은 시기에 일제히 독립했으며, 한때 세계를 제패한 스페인은 무기력하게 무너졌을까. 여기서는 남미 스페인 식민지에 초점을 맞춰 본다.

 

스페인은 해상 패권을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에 빼앗기면서 1700년대 후반에 들어 완연하게 쇠약의 조짐을 보였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Carlos IV, 재위 1788~1808)1794년에 미국에 미시시피 자유항해권과 뉴올리안스-플로리다 접근권을 허용하고, 프랑스에 카리브해 산토도밍고를 내줬다. 1801년에는 당시 미국 영토보다 넓은 중부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게 넘겼다. 스페인이 허약한 틈을 타서 1806~1807년엔 영국의 사략선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공격하다 퇴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스페인은 독립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본국에서 병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이이 파견한 병력에다 현지 백인으로 구성된 왕당파 병력에 의존했는데 그 병력이 얼마 되지 못했고 그나마 본국 태생의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와 현지 태생 백인 크리올로(criollo) 사이에 차별이 극심했다.

남미 독립운동의 기수는 컬롬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3백년간 이주해온 백인의 자식들, 즉 크리올로였다. 독립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호세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모두가 그러한 계층에서 나왔다.

 

남미 국가 독립연도 /위키피디아
남미 국가 독립연도 /위키피디아

 

남미 독립운동 지도자 가운데 미스터리한 인물이 산 마르틴이다. 그는 1778년 지금 아르헨티나 야페유란 지역에서 태어나 7살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면서 후에 독립운동 동지가 되는 칠레 출신의 오이긴스를 만난다.

산 마르틴은 10대에 스페인군에 입대해 모로코, 알제리 전투에 참여하고,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과의 전투에 참여해 포로로 수감되기도 했다. 풀려나서 포르투갈과의 전투에 참여하고, 전공을 세워 훈장을 타고 대위에 이어 소령으로 진급한다.

그는 1811년 어느날 갑자기 전역을 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20여년간 스페인에서 충실하게 군에 복무하던 그가 30대 초반의 나이에 귀국한데 대해 역사가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그는 남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본국에 귀국해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스페인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돌아온 이유에 대해 향수를 느꼈다는 설과 군에서 자유주의자와 남미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만나 사상적으로 전환했다는 설이 있다. 영국의 스파이로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는 설마저 있다.

 

호세 산 마르틴 /위키피디아
호세 산 마르틴 /위키피디아

 

어쨌든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라플라타 부왕령의 독립에 주도적 인물로 나선다. 그가 귀국하기 앞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1810년 라플라타 부왕을 추방하고 자치위원회를 결성했다. 그 무렵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보고타에서도 자치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산 마르틴은 1813년 산 로렌소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1814년 북부군을 지휘하게 된다. 그는 페루 리마를 공격하기 앞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해방시킬 계획을 세운다.

 

시몬 볼리바르는 어느날 갑자기 독립운동에 뛰어든 산 마르틴과 달리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조직화했던 인물이다. 1783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자유주의자인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 1769~1854)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식민지인들의 차별에 불만을 가지며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투쟁의식을 갖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14세에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799~1802년엔 멕시코와 유럽을 여행하며 서구의 사상과 식민지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1802년에 결혼해 잠시 고향에 살았으나 이듬해 아내가 황열병으로 죽은후 다시 유럽, 미국을 돌아다니며 세계 실정을 공부했다.

1807년 귀국한 볼리바르는 독립운동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1750~1816) 등과 합류해 1811년 베네수엘라 공화국을 수립한다. 하지만 그의 초기 독립운동은 왕당파의 저항으로 카라카스 점령에 실패하고, 볼리바르는 검거를 피해 네덜란드령 퀴라소 섬에서 망명했다. 왕당파의 손길을 피해 콜롬비아 카르타헤나로 피신한 그는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한 후 독립전쟁을 지도했다.

그는 스페인에 반대하는 젊은 크레올로들을 규합해 181484일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하지만 스페인과 왕당파의 반격으로 그는 다시 피신해 아이티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그후 아이티군과 지방군벌의 지원을 받아 콜롬비아를 재진격했지만 실패하고, 1819년에 25백명의 군대를 이끌고 콜롬비아를 건너갔다. 이때 영국과 아일랜드군 5천명이 그를 지원했다. 그해 87일 볼리바르는 콜롬비아를 해방시켰고, 1217일 그란콜롬비아(Gran Colombia, 콜롬비아)를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 /위키피디아
시몬 볼리바르 /위키피디아

 

한편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은 칠레의 동료 오이긴스와 함께 181714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 산타이고를 공격했다. 그들의 안데스 등정은 카르타고의 한니발, 프랑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는 것만큼 어려운 코스였다. 안데스 서쪽 쿠요(Cuyo)에서 조직된 군대는 말린 쇠고기와 빵, 끓인 물 등을 소떼를 동원해 운반하며 준령을 넘었다. 119일 안데스 서쪽에서 출발한 부대는 213일 산맥을 넘었다. 칠레의 스페인군과 왕당파들은 산 마르틴의 군이 안데스를 넘을줄 모른채 기습공격을 당했다.

산 마르틴은 차카부코 전투와 마이푸 전투(1818)에서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고 1819년 칠레를 독립시켰다. 그는 칠레에서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5천여명의 안데스군을 조직해 페루로 북진했다.

 

안데스 산맥을 넘는 산 마르틴 /위키피디아
안데스 산맥을 넘는 산 마르틴 /위키피디아

 

1820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하자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독립운동을 억누르던 왕당파들은 충성할 곳을 잃게 되어 지역 군벌화하면서 약화되었다. 페루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왕당파들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산마르틴과 북쪽의 볼리바르에게서 협공을 받아 견딜수 없게 된다.

칠레를 출발한 산 마르틴의 안데스군은 피스코를 손에 넣고 리마 봉쇄에 들어갔다. 왕당파들은 리마를 포기하고 지금 볼리바이인 알토 페루(Alto Peru)로 도망갔다. 산 마르틴은 1821년 리마로 입성하고 그곳에서 페루의 보호자’(protector)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한편 그란 콜롬비아를 설립한 볼리바르는 소멸되어가는 누에바 그라나다의 스페인 왕당파를 뿌리뽑은후 남하했다. 볼리바르는 현재 에콰도르의 키토를 정복하기 위해 부하 안토니오 수크레를 파병한다. 볼리바르 군대는 키토를 해방시키고 에콰도르를 그란콜롬비아에 합병했다.

 

1822년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산 마르틴의 구아야킬 회담 /위키피디아
1822년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산 마르틴의 구아야킬 회담 /위키피디아

 

산 마르틴은 볼리비아로 도망간 왕당파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볼리바르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볼리바르는 남쪽의 군사지도자 산 마르틴에게 에콰도르에서 만나자고 초청한다.

1822726일과 27일 산 마르틴과 볼리바르는 키토 근처 구아야킬에서 역사적인 회동을 갖는다. 역사가들은 이를 구아야킬 회담(Guayaquil conference)이라고 명명한다. 이 만남에서 두 사람은 어떤 내용을 대화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거나 전해지는 게 없다.

다만 그후의 두 사람의 행동으로 보아 대화의 내용이 대략 짐작된다. 두 영웅은 서로 의견을 달리 했다. 볼리바르는 공화주의자이면서 정치적 야심이 분명했는데 비해 산 마르틴은 개인적 야심이 없었으며 왕정을 옹호해 유럽에서 적절한 왕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관측된다.

회담이 끝난후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내 과업은 이미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다 자네 것일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산 마르틴은 그 자리에서 페루의 보호자지위도 사임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갔다.

알토 페루(후에 볼리비아) 공격은 볼리바르의 몫이었다. 1824년 볼리바르는 내부 분열로 약화되어 있는 왕당파 근거지를 평정해 자신의 이름을 따 볼리비아 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로써 북쪽 콜롬비아에서 남쪽 아르헨티나까지 남미 제국 독립이 완결된다. 스페인은 쿠바와 카리브해 일부 섬만 식민지로 남겨둔체 아메리카 지역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란 콜롬비아 /위키피디아
그란 콜롬비아 /위키피디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돌아온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정부와 갈등을 하다가 딸과 함께 영국과 벨기에로 건너갔으며, 72세의 나이로 프랑스 볼로뉴에서 사망했다.

볼리바르는 스페인령 남미를 해방시켜 미국처럼 큰 연방제 국가로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지역간의 먼 거리, 군벌화한 독립세력의 이해 충돌, 연방파와 중앙집권파의 대립 등으로 남미는 미국처럼 연방제 국가로 되지 못하고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아르헨티나에서 우르과이와 파라과이가 갈라지고, 그란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떨어져 나갔다. 볼리바르도 권력을 잡은 후 정적들이 생겨 암살미수사건의 타깃이 되는 등 정변에 시달리다가 183047세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볼리바르의 이름은 아직도 볼리비아 국명,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콜롬비아의 주명, 베네수엘라의 통화단위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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