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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 비망록
노태우, 문희갑 수석 보선출마 시켜 거세…실명제 준비단 해체
실패한 6공 실명제⑥…무기연기
2019. 12. 21 by 김현민 기자

 

19903월초, 김종인 신임 경제수석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재무부 장관으로 각각 내정된 이승윤씨, 정영의씨와 자리를 같이했다. 문희갑씨는 33일 갑자기 대구서갑 보궐선거의 민자당 후보로 지명돼 청와대를 떠났고, 조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규성 재무 장관 등 경제팀의 대폭 경질이 예고되고 있을 때였다.

경제 상황이 실명제 도입의 충격을 도저히 흡수할수 없으니, 빠른 시일내에 실명제 보류를 발표합시다.”

동감입니다. 개각후 3월말가지 실명제 보류를 결정지읍시다. 실명 거래 실시단도 동시에 해체합시다.”

그런데 발표 시기는 좀 신경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실명제 실시를 추진해온 문희갑씨가 보선에 출마한 만큼 보선은 끝내고 발표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들은 실명제 실시를 연기하되 보궐선거 후 즉각 발표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실명제 보류 작업은 317일의 개각에 앞서 진행됐다. 이승윤 의원(당시 민자당 정책위 의장)은 개각 열흘전께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라는 부름을 받았고, 먼저 경제수석에 오른 김종인씨와 실명제 보류에 관한 의견 조율을 마쳤다. 이승윤 의원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파견 나가 있던 강봉균 국장을 집으로 불러 개각후 경제방향을 정리해 오라고 지시하는 한편 경제개혁론자들로 포진한 기획원과 재무부를 장악해 들어갔다. 당시 기획원에는 조순 부총리의 핵심참모였던 김인호 차관보를 비롯, 한이헌 기획국장 등 실명제 실시론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1990317일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에 다른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이승윤씨를 임명하는등 15개 부처의 장관을 교체했다.

이 부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금융실명제는 경제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정책이므로, 관계부처와 협의, 신중히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부총리는 건설부 차관으로 나가 있던 이진설씨를 기획원 차관으로 불러 보강하고 강봉균 국장을 차후에 발령내는 조건으로 KDI에서 불러 실명제 보류를 위한 절차를 밟아 나갔다. 기획원과 재무부에 있는 실명제 실시론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남은 일은 예정된 수순에 다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실명제 보류작업은 재무부보다는 기획원의 주도로 이뤄졌다.

 

금융실명제 전면보류를 다룬 매일경제신문 1990년 4월 4일자 신문.
금융실명제 전면보류를 다룬 매일경제신문 1990년 4월 4일자 신문.

 

그러면 3당 합당후 실명제 보류를 공식발표한 ‘4·4 대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2123당 합당후 첫 당정회의에서 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예정대로 추진키로 합의했지만, 조순·문희갑 경제팀은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215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제29회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유창순 회장은 조순 부총리를 옆에 앉혀두고 금융실명제의 재검토 및 연기를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형평 추구라는 이상적인 목표가 국민경제의 양적 성장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등 정부의 개혁조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당위적 목표임에는 틀림없지만 불필요한 시행착오에서 올 부작용이나 경제활동의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조순 부총리는 이같은 지적에 대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은 불균형 성장으로 인해 건전한 경제체질을 갖추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며 재계에 화살을 돌렸다.

정치권과 재계의 파상공격이 가속화되자 문희갑 수석은 226일 재무부를 통해 각 금융기관에 금융실명제 추진방안을 통보,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확산되는 반대론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2725개 증권사 사장단은 정례이사회를 가진 자리에서 주식시장 침체의 원인이 증시 자금 이탈에도 있지만, 금융실명제 실시가 증시현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실명제 실시를 잠정 유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다음날인 228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제1차 경제난국 극복위원회(위원장 신태환 학술원 회원).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모여 경제난국을 타개하자는 회의였지만, 이날 첫모임은 실명제를 비롯, 정부의 개혁조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날 발언을 인용해보자.

신태환 학술회 회원= 지금 추진중인 실명제등 개혁조치는 어느 일면에서 국민의 권리를 흔드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정책이나 법률이 자유시장 경제의 사회정책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역효과를 충분히 검토해야 합니다.

김동기 고려대 경영대학장= 세제 개편과 실명제등을 일거에 시행하면 침체된 경제에 부담만 커집니다. 중산층 몰락, 조세 저항, 과소비 조장 등이 예상되는만큼 실명제 실시 시기를 2~3년 늦춰야 합니다.

장덕진 대륙연구회 회장= 정부가 공개념·실명제등 계층갈등 완화 위주의 중장기 대책에만 매달려 당면 시책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다른 위원회처럼 정책설명이나 하고 여론을 수립하는 것처럼 오해새서는 곤란합니다.

 

실명제는 이미 물건너 갔다는 알수 없는 이야기들이 사회지도층에 오갔을 때인지라 반대론자들이 정부 주도의 공식회의에서마저 거리낌 없이 반대론을 펼치고 나온 것이다. 조 부총리는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산 계층에 주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보완조치와 함께 실행해 나가겠다며 실명제 보완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후인 33일 실명제 실시를 주도한 문희갑 경제수석이 갑자기 대구서갑 보궐선거 후보로 결정되고 김종인 보사부 장관이 그 자리를 메웠다.

35일 재무부는 실명제 실시에 따른 반대여론을 수렴, 보완책을 상세히 발표하고 부작용도 충분히 막을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문 수석의 보궐선거 후보 결정은 노 대통령의 실명제에 대한 후퇴나 다름없었다.

 

1989년말부터 노 대통령이 문 수석을 청와대 본관에 불러들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반면에 김종인 보사부 장관의 노 대통령 독대가 잦아졌다. 최고권력자가 아닌 측근에 의한 개혁은 그만큼 어렵고 비정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의 말이다.

개혁은 역사적으로도 성공보다는 실패한 사례가 대부분이었고, 개혁 주도세력은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 가서야 그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명제 실시가 왜 결국엔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까. 첫째로 3당 합당후 여소야대의 4당구조가 여대야소의 양당구조로 바뀐뒤 기득권 옹호 논리가 경제개혁 논리를 압도했기 때문이지요. 개현 노력은 대가는 대가대로 치르고 또다시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문 수석의 청와대 14개월은 이것으로 끝나고 문 수석 경질 이후 1개월간은 실명제 보류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 착착 진행됐다.

317일 대폭 개각으로 조순 부총리 후임에 실명제 반대론자였던 이승윤 부총리가 입각했다. 321일 통합후 첫 민자당 당무회의에서 일부 민주계 의원의 반발이 있었으나, 실명제 실시를 보류할 것을 정부에 공식 여청했다.

난국에 처한 현재의 경제여건에서는 경제 활력의 재생을 통한 고도성장만이 정계 재편의 정당성을 부여할수 있다. 금융실명제는 기업의 투자·수출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조치가 될수 있다.”

같은 날 전경련도 실명제 보류를 공개적으로 요청했으며 323일 당정회의에서는 이승윤 부총리와 김용환 당정책의장 사이에 실명제 실시의 무기연기가 합의됐다.

330일 열린 KDI금융실명제 공청회는 실명제의 구체안을 마련한다는 당초 목적과 달리 보류를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KDI의 남상우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연구한 게 소용 없게 됐어요. 실시 여부와 관계없이 대안이라도 제시하고 유보되더라도 언젠가 실시될 텐데, 그때를 위해 의견을 집약해두자는 목적이었어요.”

43일 문희갑 민자당 후보는 대구서갑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미세한 표차로 누르고 힘겹게 승리했다. 다음날인 44일 이승윤 부총리는 실명제 유보와 경제활성화를 골자로 하는 ‘4·4 대책을 공식 발표했다. 문 후보가 보궐선거에서 이기도록 하기 위해 맞춰진 일정이었다.

김종인 당시 경제수석의 설명이다. “보사부 장관 시절에 경제장관 회의에 가보니 뒤늦게 경제활성화 대책을 논의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수석이 되자마자 그동안 정리했던 내용을 토대로 4·4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4·4 대책은 기본적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이고, 실명제와 같은 거창한 술로건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1990411일 재무부의 금융거래실시 준비단은 창단한지 꼭 1년만에 해체됨으로써 6공화국의 실명제 추진은 5공화국의 전철을 되밟으면서 유산되고 말았다. (금융실명제는 노태우 정부 다음에 들어선 김영삼 정부 때에 전격 실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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