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6공 비망록
사업자선정 시기 놓고 상공부와 체신부 의견 대립…대통령이 개입해 시기 결정
6공 이동통신 선정 논란②…합종과 연형
2019. 12. 23 by 김현민 기자

 

때는 91년초의 어느날에 있었던 일이다.

포철의 김권식(金權湜)상무등 이동통신추진팀들이 미국의 팩텔(PACTEL)사 요원들과 함께 이 이동통신사업추진에 관한 업무제휴협약을 체결키로 하고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신부는 19908월 이미 공청회를 거쳐 통신사업 구조조정 기본방침을 확정, 이동통신 분야는 점진적으로 경쟁을 허용하기로 공표해 놓고 있었다. 이동통신사업자선정 스케줄은 1992년 상반기로 예정돼 있었다. 정부의 방침이 확정되자 선경과 포철은 물론 코오롱, 동부, 동양, 쌍용등 대기업들이 이동통신사업에의 참여를 위해 외국의 유명통신회사들과 업무제휴를 추진해 나갔다.

 

협약서의 서명란은 3명의 사인을 위해 공란으로 남겨져 있었다. 3명의 서명자는 팩텔과 포철, 그리고 선경의 대표자였다. 포철과 팩텔의 대표자들은 서명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선경측 대표가 오기를 기다렸다. 선경 측은 그동안 팩텔의 기술이전조건이 불확실하다느니, 참여사의 지분율을 먼저 정하자느니 하면서 포철 측과 다른 견해를 제시해왔으나 컨소시엄에 참여치 않겠다는 입장은 분명히 하질 않았다. 예정시각이 한참 지나도록 선경의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다. 포철 측 사람들은 선경측이 협약서 서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판단, 팩텔측과 단독으로 협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91420일 선경 측의 서명란은 비워둔 채 포철의 김권식 상무와 팩텔측의 아지즈 쿼러시 부사장은 이동통신사업추진을 위한 업무협조 기본협약서에 서명했다.

황경로 전포철 회장은 선경과의 결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포철은 선경과 5050의 비율로 이동통신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선경은 지분비율에는 호의적 반응이었지만, 경영권을 달라고 고집했어요. 따라서 더이상 선경에 내줄 수 없다고 판단해 독자적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선경 측은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물론 선경이 컨소시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팩텔과 합작하기에 앞서 지분율과 기술이전 조건 등을 우선 약속을 받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팩텔이나 포철이 명확히 하지 않은 채 합작계약만 먼저 체결하자는 겁니다.”

1992년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서 941통과 2통의 사업자선정에 이르기까지 선경과 포철은 늘 경쟁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선경과 포철은 처음에는 하나의 컨소시엄을 형성, 함께 이동통신사업경쟁에 뛰어들기로 했던 사이좋은 관계였다. 이동통신사업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이전, 막후에서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모색해 왔다.

그러나 외국참여회사인 미국 팩텔사와 마지막 협약서를 체결하는 순간 선경과 포철은 영영 결별하고 말았다.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외치며 일관된 산업영역에만 투자해온 유화재벌과 세계2(당시는 3)의 철강그룹은 결국 합쳐질 수 없었다.

만일 그 때 선경과 포철이 하나의 컨소시엄을 구성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선경과 포철이 컨소시엄을 함께 했더라면 더 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라는데 견해가 나온다. , 기술력, 자금력 등에서 다른 컨소시엄보다 월등해 사업자로 선정될 것은 분명하나, 선경의 최종현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사실에다 포철의 박태준 회장이 민자당 최고위원이라는 사실이 특혜의혹과 정치적 파장만 오히려 크게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론 결별 당시에는 이런 예측을 했던 것은 아니고 두 회사의 자사이기주의와 자존심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때 서로 결별한 것이 결국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는지, 새정부 출범후 우여곡절을 거쳐 선경은 1통을, 포철은 2통을 각각 지배하면서 경쟁하게 됐으니, 세월의 흐름은 예측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그러면 이동통신사업의 양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선경과 포철이 연형(連衡)과 합종(合縱)을 하게된 과정을 살펴보자.

포철 측에 따르면 이 무렵 선경의 최 회장이 포철-팩텔의 연합팀에 합류하자고 제의해왔다고 한다. 박태준 회장은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 들였고 한동안 선경과 포철은 팩텔과 함께 회의도하는 등 한팀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914월 펙텔과의 기본협약체결을 앞두고 선경과 포철은 갈라서고 만 것이다.

포철측은 선경이 포철팀에 합류, 이동통신의 중요성을 깨달아 결별 전에도 미국 등지에 파트너를 구하러 다녔고, 결국은 딴 살림을 차렸다고 서운해 했다. 반면 선경측은 포철보다 앞서 1986년부터 이동통신사업을 추진해왔으며, 92년 사업자선정 직전에도 외국의 합작파트너를 교체할 정도로 외국회사와의 합작에는 줏대있게 행동해 왔다고 반박했다.

포철과 결별한 선경은 독자적으로 해외합작파트너를 찾아나섰다. 1991년에는 미국의 테네시주에서 US셀룰러사와 함께 이동전화사업에 참여했다. 선경은 이어 미국의 벨사우스(Bell South)와 합작계약을 체결했으며 사업자신청을 두달쯤 앞두고 벨사우스와 결별, 미국의 또다른 무선전화회사인 GTE사와 손잡는다. 선경은 벨사우스가 지분및 기술이전문제에 대해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19928월 이동통신사업권반납으로 선경은 또다시 GTE사와 헤어져야 했다.

이동통신사업은 국내기업은 물론 외국기업까지 끼어들어 이리 붙고, 저리 붙을 정도로 큰 이권이 있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19924월의 어느날, 한봉수(韓鳳洙) 상공부 장관과 송언종(宋彦鍾) 체신부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노태우 대통령이 두 장관을 앞에 두고 왜 소신껏 못하는냐며 심한 꾸중을 했다. 2이동통신사업 시행시기를 놓고 상공부와 체신부가 팽팽한 의견대립을 하는 바람에 당초 2월말에 사업자 선정공고를 내려 했던 계획이 4월로 늦춰졌고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심히 불쾌하게 여겼다. 대통령은 평상시에도 이동통신 관계자들을 불러 공정하게 하면 됐지, 무엇이 겁나서 못나서 못하겠다는 것이냐며 질책해 온 터였다.

6공화국의 통치 과정 중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제2이동통신 사업이 정권의 임기만료가 가까와 진 1992년에 정치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바로 사업자선정의 시기 때문이다. , 정부가 이동통신 사업자선정을 서두르는 것은 노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사돈기업에 특혜를 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문제였다. 그러나 제2이동전화 민영화 계획은 체신부가 1990년초에 대통령에게 보고한 연두업무보고에도 포함돼 있는 사안으로, 갑자기 서둘러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1992년초 한 상공, 송 체신장관을 불러 호통을 친 것은 이미 정부 출범 초기서부터 세워진 계획을 정부부처 간 의견조율을 제때 못해 일정만 지연된데 대해 무소신을 나무란 것이었다.

2통 사업자 선정일정에 대한 논란은 시행초기부터 시비에 휘말렸다. 그것은 제조업체 참여제한 논란과 사업시기 연기공방이었다.

첫번째 논란은 이동전화사업에 현대, 대우, 삼성, 럭키금성등 기존의 4대 통신장비제조업체의 참가여부였다. 주무부처인 체신부는 제조업체가 제2이동통신을 차지할 경우 기종은 특정업체의 장비로 채워지기 때문에 탈락한 업체는 설 땅을 잃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상공부측은 기존업체도 참여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기존의 통신장비업체들도 재계의 판도변화까지 영향을 미칠 2통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청와대경제비서실의 김종인(金鍾仁)수석은 체신부의 견해를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상공부는 체신부와 협의 끝에 전자기기 제조업체의 완전 배제라는 당초의 방침을 변경하되, 제조업체의 10%이내 지분참여라는 타협선을 찾았다. 야당도 입법심의 과정에서 체신부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뒤에 선경이 2통사업자로 선정되자 입장을 바꿔 대기업을 배제시킨 것이 선경에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어쨌든 이같은 논란을 거쳐 19917월 임시국회는 전기통신기본법과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통사업을 둘러싼 두번째 논란은 법률안이 통과되고 사업자선정을 위한 시기선택 과정에서 빚어졌다. 19922월 한봉수상공장관이 현재 추진중인 이동통신사업은 국민들의 편의가 증진되는 등 편리한 점도 많지만, 막대한 시설재의 수입으로 무역수지가 악화할 수 있다며 사업시기를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한 장관의 주장인즉, 사업시기를 1-2년 연장하고 그동안 통신기기를 국산화하면 10억 달러의 무역수지 개선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체신부측은 사업자선정이 늦어질 경우 멀지 않아 주파수 부족현상을 겪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업자 연기에 따른 수입대체효과보다는 통신애로에서 오는 국력손실이 커진다고 맞섰다. 체신부측은 “1992년에 사업자를 선정해도 94년께 본격적으로 기기수요가 발생하므로 삼성과 럭키금성의 기기개발계획을 감안할 때 국산화가 가능하다며 상공부를 설득했다. 결국 경제부처 장관회의를 통해 체신부 논리가 판정승,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게 됐지만, 주무부처인 체신부와 상공부의 논쟁은 사업자 선정시기가 2개월이나 늦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체신부는 당초 199222통사업자신청공고를 내고 6월까지 사업자선정을 마칠 계획이었으나, 두달에 걸친 상공부와의 의견대립으로 그해 4월 공고를 낸 뒤 8월에 사업자 선정을 하지않을 수 없게 됐다. 체신부측은 그때 상공부가 관철시키지도 못할 주장을 폈기 때문에 사업자선정시기가 늦어져 결국 대선을 앞두고 정치논리에 휘말리게 됐다고 주장했다.

 

사업자선정시기 논란은 일단 마무리됐지만 이 문제는 후에 국회에서 정부 부처 안에서도 반대하는 것을 왜 억지로 밀고 나갔는가라는 또다른 시비거리를 제공했다. 탈락업체들은 오히려 선경이 미국의 벨사우스(Bell South)사와 결별한 후 새로운 제휴선을 찾을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정부가 의도적으로 추진일정을 2개월간 순연시켰다며 일정연기에 따른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19924월에 접어들면서 사업자선정에 관한 입찰제한서(RFP) 공고가 시작됐고, 참여희망 6개사는 총력전을 펴면서 2통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6공 최대의 이권사업이니 하며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됐고, 정치권과 기업을 둘러싼 각종 유언비어가 쏟아져 나왔다. 모든 논리가 차기정권을 탄생시키는 대선의 정치논리에 휘말려 들어가는 시기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