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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러시아 무기공장이 시베리아에 첫 설립…골드 러시 터지며 탐욕자들 이동
시베리아 금맥…일확천금 노리며 동토에 정착
2019. 12. 25 by 김현민 기자

 

러시아가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1689), 캬흐타 조약(1727)을 체결해 국경을 정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1700년대 초기에 시베리아로 들어가 사는 러시아인들은 거의 없었다. 모피상인들이 장사를 하러 가거나 사냥꾼들이 들어가는 곳이었고, 혹간 카톨릭 산지들이 그리스 정교에 의해 구교도(Old Believers)로 낙인 찍혀 종교적 자유를 찾아 이주하기도 했다. 이주자들은 원주민인 몽골족 또는 투르크족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높은 성채를 쌓아 놓고 불안하게 살아야 했다.

 

니키타 데미토프(왼쪽, 父)와 아킨피 데미토프(子) /위키피디아
니키타 데미토프(왼쪽, 父)와 아킨피 데미토프(子) /위키피디아

 

유럽의 지진아로 꼽혔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Pyotr I)의 근대화 정책을 통해 서서히 기틀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표트르 대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금속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철과 구리를 유럽 생산량의 3분의2를 차지하던 스웨덴에서 사들였는데, 스웨덴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철과 구리의 수입이 중단되었다. 표트르는 강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금속의 자급자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차르는 니키타 데미토프(Nikita Demidov)라는 철강사업자를 궁전으로 불렀다. 데미토프는 머스켓 총과 창을 제작해 러시아 군대에 보급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낮은 가격에 무기와 철강재를 공급하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우랄 산맥의 마그니트 산지의 철 생산 독점권을 부여했다. 차르는 또 데미토프에게 최신 제철공장을 짓도록 하고 자금을 투자했다.

니키타프는 1702년 우랄산맥 건너편 콜리반이라는 곳에 철 광산을 열었는데, 이는 시베리아에서는 최초의 광산이었다. 차르는 그 광산의 이름을 데미토프 광산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는 그곳에 주조공장을 건설해 무기를 생산했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최초 무기공장이다. 니키타는 1716~1725년에 우랄 지역에 4개의 금속공장을 건설해 우랄의 군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니키타는 그곳에서 대포와 총, 칼과 탄약을 대량으로 제조했다. 데미토프의 공장에서 생산된 무기는 스웨덴보다 두배 이상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데미토프가 생산한 무기로 스웨덴과의 전쟁에 이길수 있었다.

 

바르나울 전경 /위키피디아
바르나울 전경 /위키피디아

 

니키타 데미토프가 죽고 장남 아킨피 데미토프(Akinfiy Demidov)가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탐욕적이었다. 러시아가 많은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무기는 절대로 필요한 사업이었다. 니키타는 강철주조와 무기공장을 9개로 늘려 돈을 쓸어 담았다. 그의 부는 러시아에서 차르 다음으로 많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탐욕을 절제하지 않았다. 모피 사냥꾼들이 중국 국경 근처 알타이 산맥에 고대 구리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재 지명으로 바르나울(Barnaul)이라는 곳이다. 아킨피는 차르의 허가를 얻어 그곳에 구리공장을 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은도 함께 발견되었다. 아킨피는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차르에게 숨겼다. 자신이 독식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시베리아 광산에서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은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차르는 진노해 그 광산을 빼앗았다.

어쨌든 데미토프 가문은 러시아의 금속산업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산 구리는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구입했고, 철은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게다가 유배지로만 활용되었던 시베리아에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바르나울에는 도서관이 세워지고 극장, 사교틀럽들이 들어서면서 근대적 도시가 형성되었다.

 

바르나울 위치 /위키피디아
바르나울 위치 /위키피디아

 

데미토프 가문은 또 시베리아에 대량의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인들에게 일깨워주었다.

1828년 시베리아 지역을 돌아다니며 와인 장사를 하던 이고르 레스노이(Egor Lesnoy)라는 사람이 예니세이 강가에서 30kg이나 되는 금 덩어리를 주웠다. 그는 카톨릭 교도로 그리스 정교의 박해를 피해 시베리아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 금 발견 사실을 숨기다가 같이 사업을 하는 조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금이 발견된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조카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 왔을 때에 그는 숨져 있었다. 조카는 2백만 루블을 사용하면서 금을 찾아 나섰다. 얼마후 그는 톰스크(Tomsk) 일대에 대량의 금 매장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국에 신고를 하고 금 채굴허가권을 얻었다.

시베리아에 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유럽 러시아에 알려졌다. 시베리아에 골드 러시가 일어났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골드러시 바람이 불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첫해엔 200여명이 몰려 왔지만, 1840년대까지 10만여명의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몰려 왔다.

떼돈을 번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일확천금을 흥청망청 썼다. 독한 보드카에 취하고 여자를 사고 호화로운 집을 지었다.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고 말을 팔고 가축사료를 파는 장사치도 시베리아로 건너갔다. 시베리아에 도시가 생겨났다. 예니세이강 일대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에만 6천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먀스니코프(Myasnikov)라는 금 채굴업자는 명함을 금으로 새겨 나눠줬다. 그는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거나 불에 던지며 부를 과시했다고 한다.

가브릴라 먀샤로프라는 금채굴업자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100개의 금 광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금덩어리로 메달을 만들어 자랑하며 스스로를 타이가의 황제라고 불렀다. 그 메달은 20파운드나 되었다고 한다. 유리로 집을 짓고 파인애플을 기르도록 온실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금광에 금이 고갈되고 있었다. 부하들은 그 사실을 숨겼다. 금 채굴이 급감하던 어느 시점에 그는 파산했다. 결국 그는 부채에 시달리다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니키포르 슈트킨(Nikifor Syutkin)이란 사람은 36.2kg의 금덩어리를 주운 행운의 사나이였다. 그는 그 돈으로 술에 취해 살다가 급사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금으로 생긴 돈을 절제력 있게 사용한 사람들은 큰 부자가 되었다.

 

1830년대부터 예니세이강 근처의 지표층 금은 고갈되어 갔고, 지하층으로 더 깊이 파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자금력이 튼튼한 기업들이 참여했다. 또한 금 탐색이 확산되면서 동부 시베리아, 태평양 연안까지 확대되었다.

1700년대 러시아의 동진은 모피를 찾아 나선 이동이었다면 1800년대엔 금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금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타이가의 울창한 숲의 늪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여름에는 모가가 아주 많았고 겨울에는 모든 것을 삼키듯 얼어붙었다. 그런 열악한 관경에도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몰려들었다. 도중에 죽은 사람도 허다했다.

 

시베리아에서 금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통제에 나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금광지엔 차르의 관리들이 들어가 질서를 잡았다. 뒤늦게 도착한 투기자들은 말뚝을 박아 자신의 채굴지로 주장하지 못했다. 그들은 큰 광산업자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임금은 낮았고, 보다카는 금지되었다. 비밀 경찰이 순찰하며 난동꾼을 잡아들였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9월부터 시작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몇푼 안되는 돈으로 그동안 금지되었던 보드카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집에 돌아가서 찬밥 신세가 되어야 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위키피디아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골드러시는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처럼 이민을 장기화하지 못했다. 시베리아에 본격적인 이주는 반란자 유배라는 강제적인 추방으로 시작된다.

18251226(구력 1214), 공화주의자들이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 사건이 12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주모자들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라 불렸고, 이날 미완의 혁명을 '데카브리스트 봉기'(revolt)라고 부른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러시아 귀족들이었다. 600명의 장교들은 체포되었고, 이중 120명은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탈당한 채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길을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1년을 걸어서 가야 했다. 그들은 도중에 상당수가 죽고 일부만 살아서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이들은 강제 노동을 하다가 일부는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으며, 1856년 황제의 특사로 해방되었을 때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45명은 귀환했지만,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것은 금지되었다.

본격적인 시베리아 이주는 19세기말에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건설되면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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