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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고급 기술자 유입, 풍부한 자원, 자유주의로 40년만에 산업국가로 부상
미국, 독립과 동시에 산업혁명에 돌입하다
2019. 12. 28 by 김현민 기자

 

미국은 177474일 독립을 선언하지만 독립 전쟁은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휘하 영국군이 1781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항복할 때까지 전개되었다. 본격적인 평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미국의 산업화가 진행된다.

식민지 시절 상인들은 영국과 연계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진행되는 산업혁명을 보고 깊은 인상을 가졌다. 신생국가 지도자들은 본국 영국을 따라잡으려면 현지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활용해 산업화에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인이 산업혁명에 필요한 기술 습득은 두가지 형태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필요에 의한 자체기술 개발이고, 둘째는 발달한 영국의 기술을 전수받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영국이 기술 유출을 억제했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았다.

 

독립전쟁이 끝나고, 1780~1820년 사이 40년간 미국의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전쟁의 폐허 위에 취약한 경제구조로 출발한 미국은 40년 후에 영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산업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를 단기간에 극복하면서 식민 모국을 추격했다.

미국이 독립과 동시에 신속한 산업혁명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올리버 에번스(Oliver Evans, 1755~1819),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 1769~1825), 새뮤얼 슬레이터(Samuel Slater, 1768~1835)와 같은 선구자들의 선견지명과 진취성에 기인한다.

 

올리버 에번스, 새뮤얼 슬레이터, 일라이 휘트니(왼쪽부터) /위키피디아
올리버 에번스, 새뮤얼 슬레이터, 일라이 휘트니(왼쪽부터) /위키피디아

 

요크타운 전투가 끝난후 이듬해인 1882, 올리버 에번스 형제는 델라웨어에서 아버지의 땅 300에이커를 사들여 제분소를 차렸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에번스는 목수 도제생활을 하면서 금속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는 제분소에 기계장치를 설치하면 인력을 절감하고 생산력을 높일수 있다고 판단해 곡물 엘리베이터(grain elevator)와 호퍼 보이(hopper boy)를 개발했다.

엘리베이터는 가죽 벨트에 작은 양동이를 매달아 곡물을 이동시키는 장치였고, 호퍼 보이는 칼퀴로 곡물을 바닥에 얇게 깔아 잘 건조되도록 하는 장치였다. 이 기계장치는 흐르는 강의 수력을 동력으로 활용해 힘센 젊은이 여러 명이 하던 일을 수행했다. 기계는 한 시간에 300 부셸을 운반함으로써 미국에서 노동력의 기계화에 성공한 첫 케이스로 간주된다.

에번스는 1786~1787년에 델라웨어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뉴햄프셔 등 4개 주의회로부터 15년간 배타적 독점권을 얻어냈다. 1790년 미 연방의회가 특허법을 제정하자 그는 특허를 신청해 모든 주에서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얻었다. 그는 미국 특허번호 3호였다.

신생국가에 특허권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제분업자들이 그의 기술을 베껴 기계를 제작했다. 그 바람에 그는 특허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제분 기계는 신생 미국에 제분업을 활성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840년에 미국 제분소는 24천개로 늘어났고, 대부분이 에번스의 기술을 베낀 기계를 사용했다. 그의 기술 덕분에 미국 제분소에서 생산된 밀가루는 1810년대에 1,400만 달러에서 1860년엔 25천만달러로 20배나 늘어났다.

에번스의 관심은 증기기관으로 넘어갔다. 그는 영국에서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에 관한 기사를 읽고 증기력이 운송수단으로 활용될수 있다고 생각해 개발에 나섰다. 그는 운송수단에 증기기관을 태우려면 제임스 와트의 것보다 가볍고 강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01년에 소형 증기기관을 만들어 석고를 분쇄하는 동력으로 활용했다. 그의 증기기관은 와트의 것보다 가볍고 작았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증기기관을 필라델피아항 준설작업에 활용했다. 준설용 삽은 증기기관에 의해 육상과 물속에서도 가동될수 있도록 설계됐다. 그의 준설기계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항만 준설에 여러 달 사용되었다.

1806년 그는 켄터키 주에서 그동안 수력을 이용하던 제분소를 증기기관으로 가동시키는데 성공했다. 1810년에 에번스는 필라델피아에서 고압증기기관을 여러 대 생산했고, 이 기관을 배에 올려 증기선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식민지 시절인 1753년부터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수입했는데, 영국인들은 식민지 기술자들이 증기기관을 개발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에 수출했다. 하지만 에번스는 미국에서 증기기관 개발에 성공했고,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1807년 허드슨강 뉴욕~올버니 구간에 세계 최초로 증기선 정기항로를 개설했다.

 

올리버 에번스의 자동 제분기(1790) /위키피디아
올리버 에번스의 자동 제분기(1790) /위키피디아

 

새뮤얼 슬레이터는 1768년 영국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직물공장에서 도제로 기술을 배웠다. 그는 미국에서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영국에서는 반역자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가 다닌 공장의 지배인은 그를 전문기술자로 키우기 위해 아낌없이 기술을 가르쳤다. 그는 기술 분야에 재주가 있어 여러 가지 기술을 습득했다. 20대 초반의 어느날, 슬레이터는 미국의 주들이 면방직 기계를 만들고 보수하는 영국인에게 상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갈 것을 결심했다.

당시 영국은 최대 수출품이 면직물이었고, 면직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썼다. 영국에서는 이미 제니 방적기, 수력방적기, 뮬 방적기가 개발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이들 방적기 발명품의 수출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기술을 유출하는 것을 철저히 봉쇄했다. 방적기 부품을 가지고 가다 붙잡히는 사람은 투옥, 벌금, 장비 몰수의 형이 처분되었다.

슬레이터는 잉글랜드 이민당국자에게 자신의 직업은 농부이며, 미국에 노동자로 건너간다고 속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방적기 설계도가 들어 있었다.

1789년에 뉴욕에 도착한 슬레이터는 숙련공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로드아일랜드의 앨미앤드브라운(Almy & Brown)이라는 방적회사를 찾아갔다. 그는 공장 오너에게 영국식 방적기계를 만들어줄 터이니 공동경영을 요구했다. 주인은 그보다 더 나은 기술자를 찾을수 없었기에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슬레이터가 1790년에 로드아일랜드에 영국의 최신 기계를 도입한 미국 최초의 방적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이내 공동사업자와 경영권 분쟁이 생기자 자신의 공장을 세워 독립했다. 그는 1835년 사망하기 전까지 13개의 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미국 면방직 산업의 토대를 세웠다.

 

새뮤얼 슬레이터의 공장 /위키피디아
새뮤얼 슬레이터의 공장 /위키피디아

 

일라이 휘트니는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계적 재능이 있었다. 그는 열여섯 나이에 아버지 작업장에 대장간을 설치해 못을 만들어 팔았는데 수요가 많아 조수를 고용할 정도였다. 예일대에서 공부하면서 빚을 많이 져 졸업후 그 빚을 갚기 위해 조지아주 면화농장 주인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농장관리인 피니어스 밀러의 요청으로 휘트니는 면화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기계를 개발하게 된다.

그는 열흘만에 조면기(cotton engine)의 모델을 만들고, 몇주일후 실물을 만들어 냈다. 그는 그 기계로 노동을 50분의1로 줄일수 있다고 보았다. 나무로 만든 기계였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은 목수만 있으면 기계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신청후 18개월만에 특허를 인정받았을 때엔 그의 기계를 복제한 제품이 수십, 수백개 제작되었다. 그는 특허소송을 할 자금도 없어 조면기를 포기했다.

휘트니는 무기산업으로 눈을 돌렸다. 1798년 사이에 갓태어난 미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를 분위기로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다. 영국과 전쟁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미국이 또다른 강대국과 전쟁을 벌인다면 무기 공급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국은 당시 가장 초보적인 머스켓 총도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휘트니는 연방 재무장관 올리버 월콧(Oliver Wolcott Jr)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무기생산을 기계화해 신속성, 균일성, 정확성을 기하겠다고 제안했다. 모든 재원을 동원해 전쟁준비에 몰두하던 연방정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미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휘트니는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호환가능한 무기 부품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휘트니를 비롯해 당시 제조업자들의 노력으로 미국은 독립초기부터 무기 국산화에 성공하게 된다.

휘트니는 1816년에 밀링머신(milling machine)을 발명했다. 강철재를 커터로 깎아 내는 기계인데, 이 기계를 통해 그동안 손으로 쇠를 깎던 작업이 기계화된다.

 

일라이 휘트니의 조면기 /위키피디아
일라이 휘트니의 조면기 /위키피디아

 

이들 세 사람 이외에도 신생국에 무수한 기술자들이 기계 발명에 나섰고 그들중 상당수는 실패하고 일부는 성공했다. 올리버 에번스는 아들에게 기술과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래에 혜택을 주기 위해 일한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을 주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번스의 말처럼 미국의 많은 엔지니너들이 남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기술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은 독립과 동시에 산업혁명의 열기에 휩쓸렸다. 독립 직후인 1780년부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0년까지 80년간 미국 제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면직업에서 출발한 산업은 철도산업, 토목건설업, 증기선, 철강업, 기계업으로 확대되었다. 수공업이 기계화되었고, 가내공업이 공장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이 독립 초기에 빠르게 산업화할수 있었던 것은 몇가지 요인으로 설명된다.

첫째, 유럽 선진국이 이미 개발한 기술을 활용할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로, 기술이 뒤떨어지던 독립초기에 선진국의 기술자를 대거 초청했다. 제조업자들은 필요한 기술자를 데려오기 위해 영국과 유럽으로 건너가 스카웃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또 제조업자들은 미국 항구에 도착한 이민자들을 인터뷰해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주정부는 지역 제조업자들을 조사해 유럽 언론에 구인 광고를 냈다. 어떤 공장주는 아들을 유럽에 보내 동종업계에 어떤 기술이 적용되는지를 공부하게 하고 필요한 장인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제안하면서 데려오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많은 수의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기술자들이 미국에 건너가 신대륙의 산업혁명을 일으키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또 미국에 풍부한 자연환경과 토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막 동쪽에 넓은 평원지대가 풍부하게 놀고 있었고, 수력을 이용할수 있는 강물이 풍부한 유량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자연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증기에너지가 사용되기 앞서 수력이 활용되기 좋은 여건을 형성했다. 영국은 산업화된 지역에 도시 문제가 확산되고 있었으나, 미국엔 드넓은 대지가 널려 있어 공장을 짓기 좋은 곳이 많았다.

셋째, 천연자원이 많았다. 영국은 산업혁명 초기에 목재가 부족했지만, 미국에는 목재를 구하기 쉬웠다. 후에 공장에서 철과 석탄이 활용될 때에도 이를 뒷받침할 풍부한 광산이 신대륙에 있었다. 목화와 같은 원자재도 굳이 인도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이 남부 농장에서 생산되는 것을 쓸수 있었다.

미국의 독립은 영국 중상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식민지를 원자재 산지와 제품 판매지로 활용하려던 영국 중상주의는 보스턴 차 사건을 유발하면서 미국 독립을 계기로 차단되었다. 신생 미국엔 기업활동이 보장되는 자유주의 국가로 아이디어만 있으면 산업을 일굴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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