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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초기, 미국의 교통사정은 형편 없었다. 대부분의 도로는 인디언들이나 동물들이 지나다니면서 생긴 자연스런 좁은 길이었고, 도보여행이나 말을 타고 다닐 정도였다. 포장된 도로는 거의 없었다. 비가 오면 말을 타고 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행여 마차가 지나가려면 바퀴가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기 일쑤였다. 다리는 드물었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가장 제대로 된 보스턴~워싱턴 도로도 1800년대초에 하루 15~16시간씩 이동해 열흘이 소요되었다.
애팔래치아 서쪽의 켄터키, 테네시주, 오하이오주는 독립 직후에 연방에 가입했지만, 동부 대서양 연안과 연결하는 길이 험난했다. 협곡과 계곡을 건너 낭떠러지 같은 산을 넘어야 동부로 생산물을 이동시켰는데, 동물에 짐을 바리바리 실어도 한 마리당 90kg이상 운반하기 힘들었다. 서부의 주들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운송이 어려워 시장에 내다 팔지 못할 실정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1803년에 프랑스로부터 기존의 영토만한 루이지애나를 매입했으나, 통치권은 거의 미치지 못했다.
유럽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도로와 수운이 발달되어 있었다. 1700년대 후반에 산업혁명에 시동을 건 영국과 프랑스는 원자재와 제품을 수송할 기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수송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의 신생국은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농산물을 생산해 이동시킬 교통망이 없었다. 밀 한 포대를 뉴욕주 서부에서 허드슨강이 연결되는 올바니까지 육로로 수송하면서 두배로 뛰었고, 맨해튼까지 수송하는데 또 두배로 뛰었다. 오하이오주나 켄터키주의 정착민들은 단풍나무 수액이나 소금, 육류 등을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송비를 무릅쓰더라도 수송시키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태에서 신생국의 통합과 통치도 어려웠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도로와 수상운송망을 건설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1807년 미국 연방상원은 재무장관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에게 도로를 놓고 운하를 건설하는 계획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고, 1년후 갤러틴 재무장관은 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상원에 제출했다. 갤러틴의 ‘공공 도로와 운하 문제에 관한 보고서’는 연방정부가 향후 10년간 2천만 달러를 지출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300만 달러는 운하에, 500만 달러는 메인주에서 조지아주까지 유료도로건설에, 150만 달러는 강을 통한 수운 개선에 투자하기로 했다.
도로 건설은 주정부 차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주의 도로는 정치인보다는 기업가들의 이윤추구에 의해 추진되었다.
펜실베이니아주는 주정부 가운데 처음으로 1792년 필라델피아~랭커스터 유료도로회사를 인가했다. 턴파이크(turnpike)라 불리는 유료도로는 건설회사에 공유지를 불하해주고, 그 공유지를 팔거나 담보해서 자본을 조달할수 있도록 했다. 건설회사에게는 통행료를 받을 권리를 주었다.
랭커스터 턴파이크회사는 주당 300달러의 주식 1천주를 팔아 자금을 조달해 2년후에 99km의 도로를 완공했다. 당시 도로는 지표면을 깎아 자갈을 깔고 돌로 포장하는 방식이었다. 유럽여행을 하면 흔히 보는 그런 도로였다.
랭커스터 턴파이크의 방식은 다른 주로 급속히 번져 나갔다. 펜실베이니아주는 1821년까지 146개 턴파이크회사를 승인해 3천km의 포장도로를 건설했고, 메릴랜드주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횡단하는 도로회사 설립을 인가했다. 뉴욕주와 뉴저지주도 유료도로회사를 인가해 포장도로 건설에 나섰다.
1810년대가 되면서 각주가 연결한 포장도로가 서로 이어지면서 대서양 연안에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문제는 주간 도로를 누가 건설하느냐의 문제였다. 독립초기에 연방정부의 역할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나, 주간 도로 건설에는 주 정부의 동의를 얻어 연방정부는 1815년에 펜실베이니아 남부를 통과해 버지니아 서부와 오하이오 강을 있는 컴벌랜드 도로(Cumberland Road)를 건설했다. 이 최초의 연방도로는 후에 40번 국도(U.S. Route 40)의 동쪽 구간이 된다.
남북전쟁(1861~1865) 직전까지 미국에는 수천 km의 포장도로가 건설되었다. 1880년대에 대부분의 도로회사들은 통행세 수입이 건설비용을 충당하지 못한데다 운하와 철도와 경쟁하면서 파산했다. 하지만 이때 건설된 도로는 연방 또는 주정부의 소유로 남아 미국 경제를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도로 사정이 엉망인 상태에서 눈을 돌린 것은 운하 건설이었다.
미국 동부의 여러 강과 중부의 미시시피강은 유량은 충분했지만 범선이 운항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많은 강이 급류나 폭포로 내륙 수운을 단절시켰고, 얕은 곳에는 쓰러진 나무와 바위, 비버 담으로 막혀 있었다. 범선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 바지선으로 옮겨 실었지만 바지선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여름철엔 홍수가 잦았고 겨울엔 얼어붙었다.
1800년대가 되면서 미국인들은 도로보다 더 많은 물동량을 운반시킬수 있는 강의 수로를 활용하게 된다. 하지만 자연의 강은 수역 내에서의 이동이란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에 강과 강, 강과 호수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운하전문가가 없었다. 운하를 건설하려면 땅 바닥에 도랑을 파서 물을 담을수 있도록 양안에 안감을 대야 하고, 자연의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 댐을 만들어야 하고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갑문을 만들어야 한다.
초기의 운하건설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1787년 사우스와 노스 캐롤라이나의 샌티강과 쿠퍼강을 연결하는 샌타티 운하회사가 설립되었다.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에 초기엔 숱한 좌절이 있었고, 마침내 영국인 고문을 불러오기도 했다. 3년이나 걸려 만든 갑문이 개방 첫날에 부서져 버렸다. 샌티 운하(Santee Canal)는 1793년에 착공되어 1800년에 개통했다. 하지만 건설 기술이 취약한데다 교통량도 적어 50년 정도 쓰다가 폐쇄하고, 지금은 미국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또 매사추세츠에 미들섹스 운하(Middlesex Canal)가 1793년에 착공해 10년이 걸려 1803년에 완공되었다.
제대로 된 운하는 이리 운하(Erie Canal)였다. 이 구간은 원주민인 이로쿼이족(Iroquois)이 수세기동안 강과 개울, 작은 시내를 이용해 이리호와 허드슨강 사이를 카누로 여행하던 곳인데, 건설자들은 그곳을 운하로 연결하면 오하이오 밸리와 뉴욕을 연결할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증기선 사업자 로버트 풀턴도 이 거대한 토목공사에 적극 동조했다. 하지만 그 방안을 보고받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내용은 훌륭하지만 한 세기 앞서 간 생각”이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뉴욕의 정치인 드위트 클린턴(DeWitt Clinton)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리 운하 프로젝트는 사장되었고, 미국 서부개척도 상당기간 지연되었을 것이다.
1810년 클린턴은 운하건설의 가능성을 확인해보려고 기선을 타고 52일이나 올버니에서 버펄로까지 왕복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여행을 통해 큰 감명은 물론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뉴욕주 정치인들을 설득해 운하 건설을 밀어붙였다. 정치적 난관과 기술적 의심들이 나왔다. 정적들은 ‘클린턴의 바보짓’(Clinton's Folly)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클린턴 주지사는 1817년 일단 착공식을 열었다. 기술은 남프랑스의 메디 운하와 영국의 브리지워터 운하에서 차용했다.
하지만 길이 1.2m, 니버 12m의 수로를 500km 이상 건설하는 일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모든 작업을 손이나 말, 소, 발파용 화약으로 진행해야 했다.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를 파 나무뿌리를 제거하고, 배수로를 냈다. 1819년에는 금융공황이 발생해 은행들이 대출을 축소해 자금난에 빠졌다. 하지만 금리가 내려가면서 공채 발행이 쉬워지는 득을 보게 되었다. 그럭저럭 공사는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었다.
허드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동쪽 끝에 내리막 물길을 조절하기 위해 송수교를 세우기 위해 26개의 기둥을 세워야 했다. 서쪽 버펄로에는 나이애가라 폭포로 이어지는데, 견고한 암석지대를 11km나 지나야 했다.
1825년 10월에 드디어 운하가 완공되었다. 총길이 584km의 운하에는 수문 83개, 송수교 18개가 건설되었다. 클린턴 주지사는 대대적인 완공식을 열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리 운하 건설은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이리 운하는 허드슨강 상류의 워터포드(Waterford)와 버펄로(Buffalo)까지 연결하는 584km의 인공수로다. 이 운하는 독립 직후 미국 동부와 오대호 사이에 뱃길을 연결해주었다.
이리운하 개통으로 1815년 인구 10만의 뉴욕은 1840년에 30만으로 세배나 불어났고, 10년후 1850년에는 70만으로 명실상부한 미국 최대도시로 우뚝 섰다. 운하로 덕을 본 또다른 도시가 시카고다. 1835년 시카고는 인구 350명의 시골 타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리 운하 개통으로 미국 동부와 뱃길이 열린데다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154km의 일리노이~미시간 운하가 개통되면서 1850년에 시카고의 인구는 3만명으로 늘었다. 시카고는 그후 철도 중심지가 되면서 1890년대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이리운하는 신생 미국에 운송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뉴욕을 흐르는 허드슨강과 오대호를 연결해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동부와 서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놓았다. 본격적인 서부개척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리 운하는 초기 미국에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 완공 첫해에 7,000대의 배가 이리 운하를 이용했고, 화물량은 1836~1860년 사이에 31배나 늘어났다. 화물 운송비용은 10분의1로 떨어졌다. 운송비용 부담이 줄어들자 중서부 지역에서 수확되는 밀과 옥수수, 귀리 등이 동부 해안으로 운송되었고, 유럽으로 대량으로 수출되었다. 이에 따라 곡창지대인 미국 중부의 농업 생산량이 늘어났고, 미시시피 강 유역에 농지가 확대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미국 중부의 농산물이 미국 동부는 물론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이다.
이리 운하의 성공은 미국에 운하 붐을 일으켰다. 개통 1년 사이에 미국 전역에서 100건의 운하건설 계획이 만들어졌다. 1840년대까지 4,800km의 운하가 만들어졌고, 미국의 하천은 운하를 통해 뉴욕에서 멕시코만까지 연결되었다. 시카고, 클리블랜드, 버펄로, 신시내티, 피츠버그등 그동안 내륙도시들은 증기선이 북적거리는 항구도시로 되었다.
미국 서부는 더욱 확장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정착하기 싫어하던 동부인들이 서부지역으로 몰려 들어갔다. 1840년대에 미국인 40%가 애팔래치아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다. 미국 경제의 활력은 그 뒤를 이어 개설된 철도망으로 가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