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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1837~1838년 2개 주에서 소규모 무력 시위…미국인 개입 우려해 자치 허용
실패한 캐나다 독립운동…자치연방의 탄생
2020. 01. 02 by 김현민 기자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182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여러나라가 독립하는 가운데 캐나다와 카리브해 일부 섬만이 유럽의 식민지롤 남아 있게 되었다. 캐나다에서도 1837~1838년에 소규모의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 독립운동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를 통합해 연방을 구성하면서 자치령으로 전환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운동의 여파를 차단하고 이웃 미국이 합병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영국은 미국이 독립한 직후인 1791년 캐나다를 둘러 나눠 지금 온타리오주에 어퍼 캐나다(pper Canada), 지금의 퀘벡주에 로어 캐나다(Lower Canada)로 분할해 통치하고 있었다. 1837년 반란은 두 개 주에서 동시에 시작되었지만, 별개로 진행되었다.

 

1837년 어퍼 캐나다 반란군의 거점인 몽고메리 선술집 전투 /위키피디아
1837년 어퍼 캐나다 반란군의 거점인 몽고메리 선술집 전투 /위키피디아

 

윌리엄 맥킨지(William Lyon Mackenzie, 1795~1861)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25세의 나이에 친구와 함께 캐나다 온타리오로 이민을 갔다. 그는 친구와 동업으로 장사를 하다가 따로 나와 신문사를 차렸다. 그는 신문 칼럼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으며 식민지인의 불만을 대변했다. 그의 정치적 논지는 당시 캐나다 왕당파(토리당)의 반감을 샀다. 어느날 토리당 무리들이 그의 신문사를 급습해 기계를 파손하고 도망갔다. 그는 그 일로 왕당파와 싸우며 정치적 입지를 굳히면서 1829년 어퍼 캐나다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식민당국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1831년 의원직에서 쫓겨났다.

1834년에 맥킨지는 온타리오의 주도 요크(York)를 토론토(Toronto)로 개명하며 실시된 첫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시장이 된 맥킨지는 토리당 관리들을 내쫓고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우며 급진적 개혁을 하다가 이듬해 선거에서 패배했다.

맥킨지는 본격적으로 어퍼 캐나다 독립운동에 나서 1836제헌’(Constitution)이라는 신문을 미국 독립기념일인 74일에 창간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독립을 원하는 지지세력 규합에 나섰다.

1837122일 그는 스터퍼빌(Stoufferville)이라는 마을의 몽고메리 선술집)Montgomery's Tavern)에서 동료들에게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온타리오를 독립시키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독립을 요구하는 캐나다 인들을 규합해 물리적으로 토론토를 접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기습공격을 통해 영국군을 제압하고, 토론토 관청들을 점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대원들에게 1인당 3백 에이커(1.2)의 토지를 주는 방안도 내놓았다.

시위 예정일은 124일이었다. 동료중 한 사람이 영국군이 음모를 미리 알고 방어에 나섰다는 잘못된 정보를 알려왔다. 맥킨지는 거사일을 하루 늦추기로 했다. 그러나 연락을 받지 못한 대원들이 4일 저녁에 거시 위치인 몽고메리 선술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모의자 중 한사람이 반역의 음모를 식민당국에 누설해 버렸다.

125일 저녁, 200여명의 반란자들이 토론토를 향해 출발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영국 식민당국의 군대가 길을 막아섰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토론토 진입 계획은 저지되고, 이틀후 영국 증원군이 도착해 방어병력은 1천명에 이르렀다. 반란자들은 선술집으로 퇴각했다.

몽고메리 선술집에서 210명의 민병대와 1천명의 정규군 사이의 전투는 쉽게 끝났다. 반란군 3, 영국군 1명이 숨지고 10명의 부상자를 내며 전투는 끝났다. 반란자의 상당수는 항복하고, 맥킨지와 주모자들은 도망쳤다.

맥킨지는 남은 동료들과 함께 미국 뉴욕주 버펄로(Buffalo)로 피신했다가 1213캐나다 공화국’(Republic of Canada) 임시정부 수반임을 선언한다. 그는 캐나다 동지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을 모아 나이애가라 폭포 근처의 네이비 섬(Navy Island)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그를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에서 그는 미국-영국간 중립지대 조약을 위반한 혐의로 10달러의 벌금과 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게 된다. 감옥생활을 마친후 그는 미국에 머물며 언론을 통해 캐나다 독립운동을 벌였다.

1849년 그는 정치적 사면을 받아 캐나다로 돌아가 다시 정치운동에 뛰어들었다. 반란과 망명, 귀국을 거치면서 그는 점점 더 과격해져 캐나다와 미국의 병합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영국,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의 연방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1837~1838년 로어 캐나다 반란을 진압하는 영국군 /위키피다
1837~1838년 로어 캐나다 반란을 진압하는 영국군 /위키피다

 

로어 캐나다(퀘벡주)의 독립운동은 어퍼 캐나다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지만 성격은 달랐다. 그 지역은 일찍이 캐나다를 건설한 프랑스 후손들이 살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퀘벡은 영국에 앞서 프랑스인들이 1608년부터 세인트로렌스강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형성되었다. 이 프랑스 식민지는 17561763년 유럽에서 벌어진 7년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영국식민지가 되었다.

윌리엄 맥킨지의 어퍼 캐나다 독립운동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183812, 영국계 이민자 후손인 로버트 넬슨(Robert Nelson)과 프랑스계 루이 조셉 파피노(Louis-Joseph Papineau) 등이 미국 버몬트주 미들베리에 모여 퀘벡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애국운동(Patriote movement)이라 부르며,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1838228일 로어 캐나다를 침공하기로 계획했다. 6~7백명에 이르는 반란자들은 버몬트 주를 떠나 국경에서 1.5km 떨어진 지점에서 캠프를 설치했다. 그들은 넬슨은 로어 캐나다 공화국’(Republic of Lower Canada)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로어 캐나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들의 독립선언서는 독립 공화국 수립, 영국에 대한 충성 거부, 정교 분리, 평등권 부여, 봉건 제도 철폐, 사형제 폐지, 언론 자유, 영어와 프랑스어의 동등한 권리 부여 등 유럽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담았다.

불행하게도 캐나다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이 이들 반란자들의 동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연방정부도 영국의 압력을 받아 국경 내에서의 군사작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들의 퀘벡 침공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들은 전술을 바꿨다. 게릴라 전으로 전환하되 비밀리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로어 캐나다인들은 조직을 사냥꾼 형제’(Hunter Brothers)로 위장해 버몬트주 산악지대를 사냥하며 어슬렁거렸다.

퀘벡 애국대원들은 다시 거사 날짜를 1838113일로 잡았다. 이들은 캐나다 국경을 일제히 넘어 몬트리올로 진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성급한 일부 무리가 넬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공격에 나섰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진 바람에 전체적인 작전이 뒤틀려 버렸다. 일부 대원은 국경을 넘어 일부 가옥을 점령하고 선박을 나포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영국군이 반격했다. 그들에게 무기를 보급해주기로 한 미국 선박은 중도에 저지당했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대원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들어가 그들의 무기를 탈취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에 숨겨둔 무기고도 미국 당국에 의해 장악되었다.

1110일 그들은 캐나다 국경도시 오델톤(Odelltown)을 공격했지만 무참하게 패배했다. 넬슨을 비롯해 대원들은 미국으로 퇴각했다. 그들은 미국에 영주거주하게 된다.

로어 캐나다의 반란은 온타리오 반란과 달리 인종적 대립구도의 성격을 띤다. 영국인 지배자에 대한 프랑스 후손들의 저항운동은 그후 퀘벡주의 소요와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1891년 영국의 식민지, 로어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 /위키피디아
1891년 영국의 식민지, 로어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 /위키피디아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의 반란은 영국 식민당국을 당황하게 했다. 반란은 쉽사리 진압되었지만, 영국은 두 반란세력이 배후지로 미국을 이용했다는 점을 우려했다. 게다가 미국내 일부 세력들이 캐나다 반란을 지원했다는 점도 걱정거리였다. 미국 정부는 중립을 지켰지만, 언젠가 미국이 캐나다 반란을 배후조정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었다.

영국 정부는 1839년 캐나다 반란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더햄 경(Lord Durham)을 캐나다로 파견했다. 캐나다 총독출신인 더햄은 북아메리카 영국령의 문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식민지에 책임있는 정부를 세워야 하며, 영어권인 어퍼 캐나다와 프랑스어권인 로어 캐나다를 연방으로 묶어 통치할 것을 건의한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영국은 18677월 퀘벡주와 온타리오주, 노바스코샤주, 뉴브런즈윅주 등 4개주로 캐나다 연방(Canadian Confederation)을 구성하며, 자치를 인정했다.

그후 캐나다 연방에 매니토바주(1870), 브리티시컬럼비아주(1871), 프린스에드워드섬(1873), 앨버타주(1905), 서스캐처원(1905), 뉴펀들랜드주(1949)가 합쳐지게 된다,

1926년에 영국회의는 캐나다에 완전자치를 인정했고, 1931년에 주권국가로서 영연방을 구성하도록 법제화되었다. 1949년에 캐나다 헌법인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가 수정되어 캐나다의 완전독립이 법적으로 완성되었으며 195112월 정식 국명을 캐나다로 변경했다. 1982417일 캐나다 최초의 헌법이 선포되었고 완전한 주권국가가 되었다.

 

1891년 영국의 식민지, 로어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 /위키피디아
1891년 영국의 식민지, 로어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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