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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이변
3년 가뭄에 백성들 원성이 민란으로 확산…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돼
극심한 흉년에 임금 자리 내놓은 진성여왕
2020. 01. 03 by 김현민 기자

 

천년왕국 신라는 민란 세력을 규합한 후백제와 후고구려(고려)가 영토를 잠식하면서 경순왕이 935년 마지막 남은 경주지방을 고려에 들어 바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신라 영토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때다.

그러면 진성여왕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천년 사직에 금이 가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신라멸망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진성여왕 3(889)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삼국사기>에는 그 해 상황을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고 적었다.

지방행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방에서 세수가 올라오지 않아 국가재정이 고갈되었고, 오죽 답답했으면 중앙에서 사람을 보내 세금을 독촉했다. 그런데 지방민들은 중앙정부의 세금 독촉에 응하지 않고 반란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 반란은 수도 경주에서 가까운 상주 지방(사벌주)에서 일어난다. <삼국사기>는 그해 기사를 이렇게 이어갔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사벌주는 경주에서 호남 곡창지대를 잇는 길목이다. 이 곳에서 반란이 터졌는데, 중앙에서 파견한 사령관이 겁을 집어 먹었을 정도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지방관이 사력을 다해 간신히 진압했고, 신라 조정은 열 살짜리 촌주 아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정도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된다.

 

2년후인 891년 겨울, 북원(北原)의 도적 두목 양길(梁吉)이 그의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기병 백여 명으로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10여 군현을 습격했다. 이듬해인 892년에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주에 자리 잡고 후백제(後百濟)라고 스스로 일컬었다.

신라를 분열시킨 궁예, 견훤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등장한 때는 진성여왕 때다. 이때부터 궁예와 견훤은 나라를 세우고 신라에 대항한다. 지금의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지역은 도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경상도 일대도 위협받는다. 이로부터 40여년후 신라는 멸망하고 만다.

 

그러면 진성여왕 시기에 민란이 터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진성여왕 3(889) 이전의 기록들을 몇 개 들춰 보자.

진성여왕의 오빠 헌강왕(憲康王, 875~886) 때만 해도 태평성대였다. <삼국사기> 헌강왕 6(880)에 이런 기록이 있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임금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들었는데,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민공이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롭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며, 국경이 안정되고 도시에서는 즐거워하니, 이것은 임금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민가에도 초가집을 헐어내고 기와집을 짓고, 나무 대신에 숯을 연료로 썼다면 나라가 매우 풍요로웠음을 보여준다. 헌강왕 7, 8, 9년조에도 임금과 신하가 돌아가며 시를 짓고 즐거워했다는 기사가 잇따른다.

이런 풍요가 갑자기 5년 사이에 질곡으로 변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강왕 원년(886), 나라의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하였다.

진성여왕 원년(878),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진성여왕 2(888) 5, 가뭄이 들었다.

 

원인은 가뭄이다. 3년째 가뭄이 계속되면서 나라의 서쪽(國西) 호남지방이 황폐해지고, 농민들은 먹을 식량조차 구하지 어렵게 된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족치니,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어렴풋이 드러난다.

<삼국사기> 열전에 효녀 지은(知恩)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효녀 지은의 스토리는 <삼국유사 빈공양모(貧女養母) 조에도 나오는데, 진성여왕 시기다.

 

효녀 지은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지은은 봉양할 꺼리가 없어서 품팔이도 하고 구걸도 하며 음식을 얻어서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한 날이 오래 되자,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 섬을 얻었다. 하루 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해주고 날이 저물면 밥을 지어 돌아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렇게 사나흘이 지나자 그 어머니가 딸에게 말했다. “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달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은데도 맛이 옛날만 못하고, 마치 칼로 마음속을 찌르는 듯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냐?”

딸이 사실대로 고하니, 어머니가 말했다. “나 때문에 너를 종이 되게 했으니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

 

효녀 지은의 이야기는 두 사서에 공히 실릴 정도로 미담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빈궁하게 살았을 것이다. 여성은 몸을 팔아 종이 되기도 하고, 남성은 도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진성여왕은 신라사는 물론 우리 역사에서 나오는 3명의 여왕중 하나다. 그에 앞서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남편은 숙부인 각간 위홍(魏弘)이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임금이 평소에 위홍과 정을 통했다”(王素與角干魏弘通)며 비판적으로 적었지만,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남편으로 정리했다. 신라시대에 왕족간 결혼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는 남편을 시켜 향가를 수집해 삼대목’(三代目)]을 편찬케 하고, 즉위한 원년에 지방에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얀속 가뭄으로 인해 농사 수확이 줄어들자, 국인(國人)의 불만이 높아갔다. 문인으로 숨어지내던 거인(巨仁)이란 자가 임금을 비방했고, 백성들의 궁핍은 민란으로 번져갔다. 896년에는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이란 도적들이 금성(金城)의 서부지역인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즉위 11년째 되던 896년 진성여왕은 스스로 임금자리에서 물러났다. 임금은 측근들에게 말했다.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그해 12월 진성여왕은 북궁(北宮)에서 돌아가셨다. 아미 지병이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역사가들은 진성여왕을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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