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6공 비망록
놀란 정부, 1조원 이하로 깎아 팔라고 지시…초강수 여신 전면동결 조치
6공 5·8조치⑤…롯데 땅 한 필지에 1조원이라니
2020. 01. 05 by 김현민 기자

 

땅 한 필지에 1조원이 넘는다니, 말이 됩니까. 팔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1조원 밑으로 갂으시오.”

199111월 초순의 어느날. 이용만 재무부 장관은 롯데그룹이 제시한 롯데월드 부지의 1차 공매 가격을 깎으라고 성업공사(현 자산관리공사, 캠코)에 긴급 지시했다.

성업공사는 롯데그룹 담당자를 불렀다. 마지노선이라도 되는양 1조원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정부 고위층의 불편한 심기를 넌지시 알리면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롯데월드 부지에서 한평생 마지막 사업을 장식하고 싶었지만 정부의 잇따른 제재 조치에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2롯데월드 부지 26,671평의 감정가는 18759,1344,000(취득·등록세 포함)이었지만, 롯데그룹은 재무부와 성업공사의 지시로 당초보다 1,812억원 깎은 9,063억원으로 1차 공매에 들어간다.

땅 한 필지에 1875억원, 평당 4,007만원. 롯데가 제시한 땅값은 전국 2,500만 필지 가운데 으뜸이었고, 19881월 매입당시 가격 819억원보다 13.2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현대그룹도 토지개발공사와 소송 계류중인 서울 역삼동 부지 3,980평에 대해 평당 7,035만원, 총가격 2,800억원을 성업공사측에 제시했다. 이 땅은 소송 결과에 따라 매입자가 이를 수용할 것을 특약조건으로 대세웠다. 당연히 매각이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가격이 19864월 매입당시 가격인 1648,000만원보다 17배나 비쌌다.

 

2롯데월드 부지와 현대의 역삼동 땅은 5·8 조치로 묶인 비업무용 부동산 가운데 최상 최대의 곳이었다. 이들 두 곳의 땅은 5·8 조치의 양면성, 즉 한국의 토지 신화에 편승, 땅 사재기에 몰두하는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는 정부측 논리와 이 땅만은 뺏길수 없다는 재벌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선 접점이었다.

재벌의 땅 사재기. 이는 6공화국 전반에는 원초적 본능에 가까웠다. 재벌에겐 노사분규에 시달리는 제조업보다는 땅이 더 큰 이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었고,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땅 뿐 아니라 농촌의 전답·임야·잡종지 할 것 없이 마구 사들였다. 5·8 조치의 당위성은 여기에 있었다.

김종인 당시 경제수석의 설명이다. “재벌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을 경쟁력 강화에 쓰지 않고 부동산에 쏟아 부었습니다. 일부 기업들은 어떤 형태로든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지요. 5·8 조치는 부동산 문제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민경제고 기업이고 간에 절단이 나고 만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이환균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말이다. “재벌을 재벌로 만들어 준 것은 이 땅이었습니다. 6공화국 들어 재벌들이 부동산팀을 만들어 전국 각지의 좋은 땅을 사들여 부동산 투기를 조장했지요. 땅값·집값은 천정 부지로 뛰어 올랐고, 노조는 근로자의 내집 마련의 꿈이 사라진다고 아우성쳤습니다. 5·8 조치는 토지 공급량을 늘린다는 경제적 측면보다 체제 전복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체제론적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5·8 조치를 밀어붙이면서 이환균 비서관은 10대 재벌그룹 기조실장을 불러 설득했다.

서울 봉천동·사당동의 달동네를 가보세요. 아침이면 누추한 공동화장실에 십여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부할 방이 없어 학생들이 단칸 셋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보고 있습니다. 재벌들이 땅 투기나 하지 않고 이런데 돈을 쓰세요.”

기실, 재벌그룹들은 1980년대말 3저 현상으로 벌어들인 돈을 땅 사는데 흥청망청 썼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26,833개 법인이 경상수지 흑자이던 1986년부터 89년까지 58,000억원(흑자액 330억 달러의 26%)을 부동산 사는데 쏟았고, 적자로 돌아선 1990년대엔 4조원 이상을 털어 넣었으니,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 기간 제조업 관련 대기업이 사들인 땅은 전국 기업이 산 땅의 42%를 차지할 정도로 부동산 투자에 주력했고, 재벌이 결국 매년 20~30%의 땅값 상승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다.

 

롯데월드타워/ 롯데물산 홍보 동영상 캡쳐
롯데월드타워/ 롯데물산 홍보 동영상 캡쳐

 

5·8 조치는 이런 재벌들의 땅 투기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이 심히 불쾌하게 생각한데서 발동된 것으로, 노 대통령은 임기말까지 재벌과의 관계 개선을 회복치 못했다.

그러면 여기서 5·8 조치와 병행해 가동된 청와대 특명사정반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자.

5·8 조치 발표 4일 후인 1990512일 청와대 비서실 건물 3층 회의실. 90년대 하반기 이후 공직사회는 물론 사회 저명인사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은 54인 별동대의 청와대 특병사정반 출정식이 열렸다. 총사령관에는 정구영 민정수석, 직속지휘관은 김영일 비서관이 맡았다.

5·8 조치가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겨냥했다면 특명사정반은 사회지도층 인사, 특히 고위공직자의 부동산투기, 호화사치 생활을 타깃으로 했다.

특명사정반은 정치인을 내사한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사회지도층의 부동산 투기를 잡는데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의 고교 동창도 눈감아 주지 않고 활동한 결과, 한달만에 굵직한 대어를 낚았다.

이병선 한일은행장을 비롯, 철도청장, 건설부 수자원국장, 토지개발공사 종합기획차장, 재무부 국세심판소 심판관,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 등. 부동산 투기와 비위 관련 공직자는 걸려들기만 하면 옷을 벗었다.

부동산 투기 근절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집념이 이처럼 완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벌들은 시간이 가면 5·8 조치도 물러질 것으로 보고 버틸 때까지 버텼다.

게다가 5·8 조치 전후로 노 대통령의 수차례에 걸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벌기업들은 땅을 매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5·8 조치 발표 이후부터 매각 시한인 9134일까지 10개월동안 재벌기업들은 총 1,033만평의 땅을 새로 사들였다. (한국은행 조사)

199151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직접 챙겼다. 청와대 비서실이나 경제부처에 맡겨놓았으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지시했다.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지 않은 기업에 대해서는 여신관리 등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규제하시오노 대통령의 이날 지시는 최후통첩이었고, 경제부처 별로 세부대책이 이뤄졌다.

최각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915월말까지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 여신규제를 받지 않는 주력업체를 당초 3개에서 1개만 인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은행감독원은 현대·한진·롯데·쌍용등 비업무용 부동산을 처분하지 않은 기업에 대해 52일부터 대출잔액 동결 조치를 취했다. 해당 그룹들은 21개였다. 현대·대우·한진·쌍용·한화·동아건설·롯데·두산·삼미·동부·동국제강·한일·금호등.

김영대 당시 은행감독원 여신관리국장이 말하는 정황이다. “땅을 팔지 않는 재벌기업에겐 여신관리가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습니다. 2일부터 7일 사이에 해당 그룹이 차입금을 대폭 늘려 놓을 것을 막기 위해 2일자로 대출을 동결했습니다.”

땅을 팔지 않고 버티던 재벌기업들이 여신규제에 숨이 막혔다. 소송을 걸어 놓았건,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았건 무조건 성업공사에 내놓았다. 롯데의 제2롯데월드 부지, 현대의 역삼동 땅, 한진의 제동목장, 대성탄좌의 문경조림지, 쌍용자동차의 송파공장 부지등도 예외가 될수 없었다.

199112703건에 2,168만평의 재벌 비업무용 토지(현대의 역삼동 땅 제외)가 성업공사에 의해 일제히 공매에 들어갔다. 이로써 16개월만에 5·8 조치는 재벌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