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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식민통치에 최대의 민중봉기…영국, 반란 진압후 직접통치로 전환
세포이 항쟁…끝까지 영국에 저항한 무굴 황제
2020. 01. 06 by 김현민 기자

 

영국의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는 투자자들이 자본금을 납입한 주식회사였지만, 군대를 보유하고 영토를 갖는 준국가 형태의 특이한 조직이었다. 1838년 일어난 아편전쟁은 명목상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치른 전쟁이었다.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1757년 인도에서 영토 지배를 시작한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전후부터였다.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로버트 클리이브(Robert Clive)는 인도인 병사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이 용병을 세포이(sepoy)라 불렀다. 세포이는 동인도회사의 용병일 뿐, 공식적으로 영국 정부 또는 영국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세포이는 주로 이슬람교도들로 구성되었으며, 간혹 힌두교도도 있었다. 그들은 인도 카스트 계급질서에서 상위계층에 속했고 예의 바르고 유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영국이 주도하는 전투에서 세포이들은 좋은 실적을 내 영국의 인도지배의 초석이 되었다.

영국 본국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가급적 자국군의 인도 파견을 꺼렸고, 동인도회사는 불가불 세포이 용병에 의존도를 높였다. 이에 따라 동인도회사군의 세포이수는 175026,000명에서 177867,000명으로 늘어났고, 100년후인 1857년엔 28만명으로 증원되었다.

 

1857년 세포이 반란 /위키피디아
1857년 세포이 반란 /위키피디아

 

세포이들은 마이소르 전쟁, 로힐라 전쟁, 마라타 전쟁 등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착 부족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다. 세포이들은 영국 장교들의 전투 지시를 충실히 따랐지만 종교적 신념에 배치되는 지시에는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세포이들은 해외파병을 싫어했다. 인더스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거나 해로로 미얀마(버마)를 원정할 때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따라서 1856년 동인도회사는 해외 원정시 세포이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세포이들의 불만에 불을 당긴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1857127일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캘커타(지금은 콜카타) 인근에 주둔하던 세포이들이 새로 지급된 탄약통의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총은 신형 머스킷 총 엔필드 라이플(Enfield P-53 rifle)이었는데, 이 총은 병사들이 종이로 싼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탄약을 총신에 넣고 발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동물성 지방을 입혔는데, 그 지방이 인도인들이 싫어하는 소와 돼지의 지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세포이들은 탄약을 입에 물기를 거부했다.

1857423일 델리 북동부 갠지스강 상류에 있는 메루트(Meerut)라는 도시의 동인도회사군 부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메루트에도 곧 새 탄약이 배급되고, 탄약통에 소와 돼지 기름이 칠해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포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영국인 지휘관은 사격 훈련을 하면서 탄약을 지급했다. 90명의 세포이 가운데 85명이 탄약 수령을 거부했다. 지휘관은 이들을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59일 열린 재판에서 대부분 세포이들이 5~10년형을 받았다.

510,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일부 세포이들이 소리를 외치며 무기고를 습격하고 영국인 장교를 살해했다.

이 우발적인 충동이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촉발했다. 항쟁은 탄약수령 거부에서 시작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인도회사의 무자비한 통치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이었다. 영국인들은 문명인임을 자처하며 인도의 문화를 무시하고, 인도인을 차별했다. 지배자들은 인도 억압을 위해 고용한 세포이들에 의해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위키피디아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위키피디아

 

메루트에서 델리까지는 38마일에 불과했다. 반란군은 갠지스강을 따라 인도 중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고, 다음날인 511일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를 점령했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종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했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무굴제국의 황제 바하두르 샤 2(Bahadur Shah II)의 궁전으로 밀고 들어갔다.

황제 앞에서 그들은 주장했다. “우리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섰습니다. 황제 폐하의 도움을 청하러 여기에 왔습니다.” 바하두르 샤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바하두르 2세는 모처럼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황제는 신하들 앞에서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했다. 516일 황제는 세포이에 체포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을 지시했다.

 

처음엔 세포이 반란군이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단결하지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의 호소에 마라타 왕국 등이 참여하고, 일부 이슬람들이 지하드를 선언했다. 그에 비해 수니파 이슬람들은 봉기에 합류하지 않았고, 세포이 일부는 영국군 용병으로 남았다. 펀잡의 시크교도와 파슈툰족들은 영국 편에 서서 델리 탈환작전에 참전했다.

분열은 곧 패배다. 봉기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서아시아와 중국에 주둔해 있던 군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의 반격은 잔인했다. 포로로 잡힌 세포이 수백 명을 세워 두고 대포를 쏘아 한꺼번에 처형시키는 살인극도 벌였다.

9월초 영국군은 델리 북부 능선에 집결해 공방전을 벌였다. 영국군도 사령관이 4차례나 바뀔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914일 영국군은 60문의 중포로 성문을 파괴하고 델리성을 점령했다.

황제는 델리 교외에 있는 후마윤 묘지(Humayun's Tomb)에 숨었지만, 영국군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발각되어 920일 체포되었다. 이때 황제의 나이는 72세였다. 이로서 몽골제국의 마지막 황제국인 무굴제국은 20330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종말을 고한다.

 

인도의 무굴제국(Mughal Empire)의 건국자 바부르(Babur)는 중앙아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티무르(Timur)5대손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살의 나이에 바부르는 페르가나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왕국은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와 국경을 접하는 산악지대의 작은 부족국가였다.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공격해 티무르의 꿈을 되살리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중에는 페르가나마저 빼앗기고, 남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했다. 1525년 인도 공격에 나서 이슬람 국가인 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1525년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몽골이란 명칭이 페르시아어로 변형된 표현이다. 바부르는 징기스칸의 아들 차가타이계 후손임을 나라 이름에서 분명히 새긴 것이다. 무굴제국은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과 손자 악바르 1세 때 본격적인 영토 확장에 나서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최대영역을 형성했다.

15~16세기에 유럽 열강이 신항로를 개척해 인도 해안에 거점을 확보하고 침략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무굴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1757년 영국은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인도 토후국들을 하나씩 흡수했고, 무굴 제국의 영토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바하두르 샤 2세가 183752세의 나이에 즉위할 때 무굴제국의 영토는 델리 주변 일대로 축소되었다. 말이 황제였지, 인도를 통치할 능력이나, 군사력, 재력을 갖추지 못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황궁을 겨우 유지해나가는 실정이었다.

 

1857년 후마윤 묘지에서 나와 체포되는 바하두르 샤 황제와 황자 /위키피디아
1857년 후마윤 묘지에서 나와 체포되는 바하두르 샤 황제와 황자 /위키피디아

 

영국은 전통적인 분할지배정책(divide & rule policy)을 채택해 과거 무굴제국의 통치영역에 있던 수백개의 작은 왕국과 토후국을 독립시켜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 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바하두르 샤 2세는 황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세금을 걷어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시인이었다. 그는 철학에 관심이 깊고 승려처럼 생활했기 때문에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주의(Sufism)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재위 20년 되던 1857년에 인도인 용병을 중심으로 하는 세포이 항쟁이 터지자, 무굴제국을 다시 세울 요량으로 반란군에 합세했지만,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921일 영국군은 황자 미르자 무굴, 미르자 카지르 술탄, 그리고 손자인 미르자 아부 바크르를 즉결 처형했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의 머리를 잘라 황제의 앞에 가져와 보게 했다. 황제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델리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영국령 버마로 추방되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1862117일에 유배지 양곤에서 사망했다.

 

영국 정부는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이후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 간접통치의 가면을 벗고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18588월 영국 의회는 인도통치법을 가결해 동인도회사의 통치권과 특허권을 영국여왕에게 반납하도록 했다. 동인도회사는 곧바로 해산되었고, 그동안 지배하던 영토와 자산은 영국 정부로 이양했다. 영국은 그해 111일부터 총독을 인도에 보내 식민지배를 본격화했다.

영국은 또 무굴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다음 영국 여왕을 인도 황제로 옹립해 인도제국을 성립시킨다. 동인도회사는 주주들에 대한 배당금 지불등 잔무처리를 위해 1874년까지 청산법인 형태로 존재하다가 완전하게 정리된다.

 

1700년 무굴제국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1700년 무굴제국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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