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6공 비망록
주력업체 자율결정토록 조정…각 그룹이 유화·자동차·전자에 집중
6공 재벌개혁③…주력업체 선정
2020. 01. 09 by 김현민 기자

 

선경그룹이 유공을 주력업체로 선정할 게 분명한데 호남정유도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해야 하지 안습니까. 금성일렉트론에서 양보해 주세요.”

아니지요. 반도체산업은 연구비도 많이 들어가고 투자비용도 엄청납니다. 호남정유는 어느 정도 컸고, 자립기반도 갖춘 만큼 이제 본격적으로 돈을 쏟아 부어야 할 금성일렉트론이 주력업체로 선정되어야 합니다.”

1991420일로 예정된 주력업체 선정을 앞두고 구두회 호남정유 사장과 문정환 금성일렉트론 사장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설전을 벌였다. 럭키금성그룹에서는 간판 기업인 ()럭키와 금성사를 주력업체로 한다는 데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한 회사를 선정하는 게 문제였다.

구자경 회장은 계열사 자율경영 원칙 아래 해당회사 사장들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입장이었고, 구 사장과 문 사장은 상대방을 설득하지 않고는 안 되는 처지였다. 두 사장은 다섯 차례나 만났다. 마감일 직전에 결국 구 사장이 승복하고 419일 럭키금성 사장단 회의에서는 ()럭키·금성사·금성일렉트론을 주력업체로 선정, 은행감독원에 신청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LG그룹 본사 /LG전자 홈페이지
LG그룹 본사 /LG전자 홈페이지

 

주력업체 제도는 럭키금성그룹 뿐 아니라 30대 여신관리 대상 그룹 모두에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다. 주력업체에 선정되면 여신바스켓제도에 의한 대출 제한에서 해제된다는 이점이 있었고, 기존의 업체별 순위가 뒤바뀔뿐더러 이로 인해 매출액등 사세에도 큰 영향을 미칠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룹들은 신청마감일까지 어느 회사를 주력업체로 하느냐로 논란을 벌였다.

제조업 경쟁력 강화와 업종전문화라는 정부의 정책기조는 91년 들어 주력업체 제도로 그 골격을 갖춰 나갔다. 제벌기업들은 “5·8 조치로 땅도 못 사게 해놓고 이제 와서 사업도 맘대로 못하게 하느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당시 반재벌 여론이 비등한데다 석유화학 분야의 치열한 투자경쟁이 과잉중복 투자에 따른 경제·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벌들은 정부 방침을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이봉서 당시 상공부 장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에 대한 현대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알아서 할텐데 왜 정부가 나서느냐고 반대 견해를 밝혔어요. 업종을 이것저것 해야 잘 보완할수 있는데, 정부가 인위적으로 몰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게 재계의 공통된 입장이었지요. 그래서 그룹들마다 자율 신청에 의해 주력업체를 선정하도록 했습니다.”

정부는 업종전문화를 명분으로 주력업체 제도를 밀고 나갔지만 재계의 시각은 달랐다.

전대주 당시 전경련 상무의 주장이다.

“90년 미국 정부가 한국에 금융자율화에 대한 압력을 가해 오면서 주거래은행 제도를 골간으로 하는 여신관리 제도를 없애라고 했지요. 여신관리 완화를 내용으로 하는 주력업체 제도는 미국의 압력에 대처하되 재벌에 대한 고삐를 쥐어야 한다는 관료적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업종전문화 정책은 금융정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고 기술 우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199136일 정영의 재무장관이 금융산업발전심의회에 상정한 여신관리 제도 개편방안에는 제조업체 3개만을 주력업체로 지정한다고 못박혀 있었다. 운송산업을 주종으로 하는 한진그룹, 유통·서비스 산업의 재벌인 롯데그룹, 건설업종의 동아그룹이 반발하고 나섰다.

한진그룹의 주장이다.

제조업의 발전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동일한 보조를 맞추어 발전하야 하는 항공·해운·철도 등의 기간산업이 있어야 합니다. 수송산업도 외국기업과 경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조업과 동일하게 취급해야 합니다.”

정영의 재무장관은 이들 재벌그룹의 반발을 수용해 같은달 28일 금융발전심의회에서 주력업체의 업종제한을 해제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냈다.

주력업체 선정 마감일 하루전인 419일 저녁 늦은 시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종합기획실에서 만든 주력업체 선정 서류를 뒤적이다가 현대정공에 낙점을 했다. 현대에서는 현대석유화학·현대자동차를 주력으로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봤으나, 나머지 1개업체는 현대중공업·현대전자 중에서 고르도록 정 명예회장의 결심을 구한 것이었다.

현대엔 주력이 아닌 기업이 없다며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에 반대입장을 고수했던 정 명예회장이었지만, 종합기획실의 내부검토를 거쳐 올라온 결과를 뒤집고 말았다. 현대그룹측은 지프·항공·공작기계등의 신규투자에 비중을 두기 위해 현대정공을 선정했다고 밝혔지만,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의 기업에 특별히 배려했다는 게 당시 분석이었다. 하지만 정주영 명예회장은 신청 당일인 420일 현대정공 대신 현대전자로 바꾸어 신청하라고 지시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삼성중공업을 일찌감치 주력업체로 정했으나 모기업인 삼성물산과 삼성종합화학을 놓고 고심했다. 삼성비서실의 마지막 결론은 제조업체인 삼성종합화학이었다.

대우·선경등 여타 재벌들도 막바지까지 고민하다가 선정했고, 롯데는 신청일을 이틀 넘겨 422일 신청서류를 내밀기까지 했다.

30대 재벌이 신청한 88개 주력업체 후보 가운데 유화부문이 16개사였고, 이어 자동차·전자업종에 집중됐다. 재벌이 국가경제 전반에 걸쳐 심도 있는 검토 끝에 주력업체를 선정했다기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라 돈이 많이 들거나 이미 많이 투자한 기업에 집중 신청한 결과였다.

당시 상공부 고위관계자는 이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공부는 현대가 중공업, 삼성이 전자 등으로 재벌마다 업종을 특화해 전산업에 걸쳐 주력업체를 선정해 주길 기대했어요. 그러나 1980년대 초 산업합리화 조치 때처럼 강제할수 없는 여건에서 자율 신청의 원칙을 고수했더니, 그룹마다 비슷한 업종을 신청했습니다. 유화업종의 경우 과당경쟁을 자제해야 하는 터에 대부분의 그룹이 주력업체로 해달라고 해 오히려 당초 취지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정부가 업종전문화 정책을 추진할 무렵, 청와대 고위층에서 흘러나온 재벌 2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살펴보자.

1990620일 신라호텔에는 재벌 2세 총수들이 모임을 가졌다. 삼성의 이건희, 효성의 조석래, 동아 최원석, 쌍용의 김석원, 금호 박성용, 삼미 김현철, 해태 박건배 회장과 대림의 이준용, 봉명의 이승무 부회장등 9명이 참석했다. 그때 2세들은 이런 목소리를 냈다.

청와대는 재벌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고, 더구나 재벌 2세들이 땅투기나 하고 방만한 경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젠 힘을 합쳐 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2세 총수들의 이같은 위기 의식은 5·8 조치를 밀어붙이면서 청와대측이 총수에게 주력기업만 맡기고 나머지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독립시키겠다는 엄포성 발언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재벌 2세에 대한 청와대의 부정적 시각이 업종전문화와 후에 추진된 기조실 축소와 신산업정책 등 강경 일변도의 대재벌정책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상황 인식의 간접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다. 박운서 당시 경제비서관은 재벌 2세에 대한 우려가 정부 내에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업종전문화와 주력업체 제도를 추진한 것은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199159일 은행감독원은 30대 재벌기업으로부터 접수받은 88개 주력업체 후보 가운데 종합상사·유통·음식·건설업등 비제조업체를 탈락시키고 1차로 61개사를 주력업체로 선정했다. 그후 6112개사를 추가로 선정한데 이어 8월에는 3개의 주력업체를 지정받지 못한 그룹에 재신청의 기회를 줬다.

주력업체 제도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주력업종 제도로 이어지는데, 재벌기업들은 이미 1991년부터 분가와 기업합병 작업에 들어갔다. 비록 정권 말기였지만, 어느 정부가 들어서도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메스가 가해질 것이고, 차제에 선수를 쳐 대비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