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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나폴레옹 전쟁 패전후 독일 민족주의 등장…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책
과학기술 육성한 프로이센, 독일 통일하다
2020. 01. 09 by 김현민 기자

 

독일의 민족적 자각을 만들어준 나라는 프랑스였다. 18061014일 예나(Jena)와 아우어슈테트(Auerstedt) 두 군데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군에 순식간에 괴멸되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Battle of JenaAuerstedt)에 동원된 병력은 프랑스군 68, 프로이센군 113천명이었으나, 사망자는 프랑스군 12천명, 프로이센군은 38천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납작 업드렸다.

그 때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리이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대학에 나가 강연을 하며 독일인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 강연 내용을 정리해 1808년에 편찬한 저서가 <독일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이다. 이 책을 출판한 사업자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반프랑스 서적을 펴냈다고 해서 총살당했다.

프랑스의 속국이 된 독일인들은 나폴레옹의 폴란드 침공, 러시아 원정에도 동원되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독일인 125천명이 동원되어 대부분 전투에 사망하거나 얼어 죽었다. 이 분노는 이듬해 독일 청년들의 의용군 자진입대로 나타난다. 독일인의 자각은 181310월 라이프찌히 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나폴레옹군에게 대참패를 안겨준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민족국가의 등장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전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영역의 중심부에 수많은 왕국과 공국, 자치도시로 갈라져 있었다. 1618~1648년의 30년 전쟁 시기에 독일은 주요 전쟁터가 되었고, 이 때 죽인 사람이 8백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농토는 황폐화되었고, 인구가 40%나 감소했다는 기록도 있다.

30년 전쟁을 종결지으면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 제후국들의 주권이 인정되었고, 독일 민족은 여러 개의 군소 국가로 분열되었다. 빈 회의 결과로 35개의 군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를 가진 국가연합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이 탄생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연합의 형태로 군대, 경찰, 관세가 모두 군소국가의 주권에 귀속되었다.

그나마 허울만 남아 있던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의 강요에 의해 1806년에 해체되었다. 패전에 대한 굴욕감, 피히테 등의 민족적 자각이 살아나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와 주권을 갖는 국가를 만들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독일어 사용권에서 두 강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었다.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하자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독일주의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구체제를 복원하고 빈 체제를 리드했지만, 과거처럼 합스부르크 제국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프로이센은 철저하게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고 개혁에 나섰다.

프로이센은 냉철한 자기반성에서 시작했다. 이 왕국은 자신의 정예군대가 프랑스군에게 몇시간만에 붕괴된 것은 과학과 기술이 뒤쳐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거대한 계획에 돌입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진화한 군대의 양성이었다.

변화는 육군에서 시작되었다. 구습에 빠져 있던 상급지휘관을 대폭 물갈이하고 과학기술 교육을 가르치는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신설했다. 이는 현대적 육군사관학교였다. 장교들에게 과학과 기술의 소양을 배우는 것을 첫째 덕목으로 가르쳤다. 전쟁은 과학이며, 과학적 기술에 의해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논리가 장교들의 머릿 속에 주입되었다.

프로이센은 일류 과학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비용을 투자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보무 당당하게 베를린을 행군한 이듬해인 1810년 프로이센 정부는 베를린 대학을 건립했다. 그곳에서는 수업료가 면제되었고 과학자들은 순수과학에 몰두할수 있게 했다. 베를린 대학은 전국의 대학과 기술전문학교와 네트워크를 형성해 산재한 과학적 성과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대학은 특성화 연구소를 부설해 과학자들을 모았고, 박사 학위 제도를 도입하고 강의 교재 등을 채택했다.

또 공과대학(Technische Hochschule)을 설립해 수만명의 청소년들에게 응용과학과 기술을 가르쳤다. 여기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전기, 철강, 화학, 정밀광학 등에서 독일 과학기술의 토대를 형성한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중시로 오스트리아에 비해 뒤쳐져 있던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1848년 혁명 이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위키피디아
1848년 혁명 이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위키피디아

 

1848, 유럽에 휘몰아쳤던 혁명의 바람은 독일을 비껴가지 않았다. 1848년에서 1849년에 걸쳐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회의가 열려 독일 통일이 논의되었다. 국민회의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폭도들의 황제는 필요없다면서 독일황제 제의를 거부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봉건제후들의 합의와 교황의 신성한 승인이 더해야 하는데 혁명 대열에 참여한 도시 상공인들의 제위를 운운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후에 빌헬름 1세가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위에 오르는데, 이때엔 독일 귀족과 지방 영주들의 추대를 통한 것이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통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재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위키피디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위키피디아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이 일으킨 1848년 혁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독일통일 운동에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오스트리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861년 빌헬름 1(재위 1861~1888)가 프로이센 왕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통일에 착수했다. 황제는 다음해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헬무트 몰트케(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빌헬름 1세가 독일 통일을 위해 군비확장 법안을 제의하자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가 이를 거부했다.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출석해 군비 확장 없이는 독일의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독일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실력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와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입니다." 그가 말한 철은 무기였고, 피는 군대였다. 이 연설을 통해 그는 철혈(鐵血) 재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의회의 반발로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긴급권을 발동해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 되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이 납세 거부운동을 호소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조세 징수를 강행했다. 비스마르크는 즉시 군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가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가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후 프로이센은 빠른 속도로 독일을 접수해 나갔다. 1884년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슐레스비히(Schleswig) 공국을 신탁통치하에 두었다.

이어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벌여 73일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압했다. 그해 10월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나사우 등을 포함한 22개 연방으로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독일의 통일을 가장 원하지 않는 나라는 프랑스였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통일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편을 들기도 했다.

먼저 선전 포고를 한 쪽은 프랑스였다. 1870717, 프랑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1871129일에 파리를 함락했다.

프로이센 군대가 당대의 강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후장식 총으로 무장했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독일 최고의 철강회사 크루프(Krupp)가 제작한 최신형 대포를 앞세웠다. 이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격발 시간이 늦고 서서 쏘아야 하는 전장식 소충을 들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보수적인 군 지휘관들은 크루프 포를 구매하지 않았다. 독일은 프랑스에 패한지 60여년만에 과학기술에서 앞서가게 된 것이다.

1871118,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적국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대관식을 열어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어권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

 

1871~1872 독일통일후 영토 /위키피디아
1871~1872 독일통일후 영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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