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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키니네 기관총 증기선 등 첨단 기술 동원해 대륙 장악…영국-프랑스 충돌
아프리카 분할 뛰어든 유럽 열강…파쇼다사건 절정
2020. 01. 16 by 김현민 기자

 

1800년대초만 해도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에게 오지였다. 유럽인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풍토병, 그중에서도 말라리아였다. 아프리카의 무서운 전염병으로 현지에 파견된 백인 병사들은 절반 이상 죽어 나갔다. 그들에게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이었고, 죽음의 땅이었다. 유럽인들은 흑인노예 무역을 하면서 토착왕국들이 끌고온 전쟁 포로들을 해안가에서 매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840년대에 유럽인들은 해안가에 무역 거점만 두었을 뿐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1870년대에 유럽인들은 남쪽의 케이프타운과 사하라 북부의 일부 등 아프리카 대륙의 10%밖에 지배하지 못했다.

그런데 1840~50년대에 말라리아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가 개발되었다. 이제 유럽인도 키니네를 복용하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1800년대 후반들어 맥심(Maxim) 기관총과 증기선 등이 산업혁명 부산물로 개발되어 아프리카 식민화의 도구가 되었다.

1870년대에 들어가면서 유럽인들은 최신 약물과 총기류, 운송수단을 활용해 아프리카 분할에 나섰다. 이때부터 1914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30여년간 아프리카 거의 전부가 유럽 열강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때마침 1973~1896년 사이에 유럽엔 장기 불황이 닥쳐왔다. 유럽국가들은 서로 보호무역을 강화하면서 무역흑자를 낼 신시장을 필요로 했다. 아프리카는 자국 상품을 무더기로 팔고 원자재를 싼 값으로 사들이는 새로운 개척지였다.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두에 섰고, 후발 독립국가인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키니네 기관총 증기선 등 첨단 기술 동원해 대륙 장악…영국-프랑스 충돌
키니네 기관총 증기선 등 첨단 기술 동원해 대륙 장악…영국-프랑스 충돌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2대 국왕 레오폴트 2(Leopold II)는 부왕이 죽은후 44년간(1865~1909) 통치하면서 좁은 벨기에를 벗어나 눈을 해외로 돌렸다. 그는 전세계에 벨기에가 차지할 땅을 이리저리 물색하다가 콩고분지가 미지의 대륙임을 알게 된다. 국왕은 국제 아프리카협회(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 위장단체를 만들어 콩고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이어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헨리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를 불러 풍부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콩고 탐험을 의뢰했다. 레오폴드의 에이전트가 된 스탠리는 1879년부터 5년간 콩고에 물면서 콩고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길을 열었다.

레오폴드는 스탠리의 탐험과 현지 개척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레오폴드는 1885년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을 세우고 자신이 총수로 있는 콩고국제협회의 관리하에 두었다. 벨기에보다 80배나 되는 땅을 개인 영지로 만든 것이다.

 

1880년과 1913년 사이의 아프리카 영토 변경 /위키피디아
1880년과 1913년 사이의 아프리카 영토 변경 /위키피디아

 

데이비드 리빙스턴, 헨리 스탠리 등의 성공적인 탐험 결과가 전해지면서 유렵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탐험대를 파견했다. 1871년에 통일한 독일과 이탈리아도 뒤늦게 아프리카에 뛰어들었다.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4~5년에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면서 아프리카 분할의 원칙에 국제적 합의를 유도했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으로, 벨기에 국왕 개인 자격으로 통치하며, 아프리카 특정 지역을 식민지로 인정받기 위해 그 지역에 대한 통치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모호한 내용에 합의했다.

독일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식민화에 나서 토고, 카메룬, 탕가니카(탄자니아)를 영유했고, 1800년대 말에는 아프리카에 260를 확보해 영국, 프랑스에 이어 3위의 식민지를 확보한다.

이탈리아는 1870년에 아프리카 동부 에트루리아를 확보한데 이어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로 불리는 소말리아로 진출한다. 이탈리아는 곧이어 에티오피아로 진격하지만 큰 저항을 만나 실패하게 된다.

 

1898년 파쇼다 사건 당시의 아프리카 분할도 /위키피디아
1898년 파쇼다 사건 당시의 아프리카 분할도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분할에 가장 치열한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다. 영국은 북쪽 이집트에서 남쪽 끝 케이프식민지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를 종단으로 지배한다는 계획으로 남과 북에서 중앙으로 진출했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인도양까지 횡단으로 아프리카를 지배한다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의 충돌은 1898113, 지금의 수단 남부 코독(Kodok)에서 벌어졌다. 당시 그곳 지명은 파쇼다(Fashoda)였고, 이 사건을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으로 부른다. 이 사건의 결론은 프랑스가 영국에 패해 물러났다. 겉으로는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해결한 것처럼 물러났지만, 실제로는 피에 굶주린 영국군에 피해 도망간 것이다.

 

사건에 앞서 두달전인 92일 남하하는 영국군은 수단에서 옴두르만 전투(Battle of Omdurman)를 벌였다. 영국군 사령관은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였다.

앞서 1885년 중국 태평천국의 난에서 청 황실을 도왔고, 그후 수단에 파견된 찰스 고든(Charles George Gordon) 장군이 수단의 급진이슬람 마흐디파에 의해 참수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든은 명망있는 제국주의자였다. 영국이 치를 떨었다. 영국은 이 마흐디파를 복수하기 위해 14년을 기다렸다.

1898년 키치너는 영국군 8,200명과 이집트 병사 17,600명 등 도합 25천여명을 이끌고 마흐디주의자들이 건설한 ()의 나라를 침공했다. 수단의 이슬람 무장세력은 영국의 도전에 응했다. 마흐디 군의 병력수는 52,000. 일단 숫적으로는 영국과 이집트 연합군의 2배를 넘었다.

92일 수단 옴두르만 북쪽 11km 지점 케레리(Kerreri) 두 진영의 군대가 마주쳤다. 전투는 허무하게 끝났다. 반나절만에 수단군이 11,000명이 사망하고 마흐디는 항복했다. 영국측 사망자는 48명에 불과했다.

영국군은 최신 막심(Maxim) 기관총에 리엔필드(Lee-Enfield) 소총으로 무장했다. 수단군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화력의 격차가 보여주는 전쟁의 극치였다. 그야말로 인간사냥이었다. 목표물은 터번을 두른 이슬람이었다. 칼로 무장한 이슬람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1898년 파쇼다 사건을 풍자한 만평. 영국은 불독, 프랑스는 푸들로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1898년 파쇼다 사건을 풍자한 만평. 영국은 불독, 프랑스는 푸들로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키치너는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한 후 병력의 일부를 빼내 남쪽 파쇼다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장 밥티스트 마르샹(Jean-Baptiste Marchand)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 150명은 1년전에 프랑스령 콩고의 브라자빌에서 길을 떠나 그해 1898710일 파쇼다에 도달해 그곳을 프랑스 소유로 선포했다.

그 무렵 이집트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수단의 마흐디 신국에 막혀 남진의 시기를 늦추다가 옴두르만 전투에 승리한후 곧바로 남하했다. 키치너는 919일 파쇼다에 도착했다. 옴두르만을 피바다로 만든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키치너는 마르샹에게 파쇼다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투를 불사하겠다고 협박했다. 키치너가 이끄는 병력의 수는 1,500명으로 프랑스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북쪽에는 보름여전에 혈전을 치른 영국과 이집트군이 2만명 이상 주둔하고 있었다.

전투를 벌여보아야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마르샹은 결전을 각오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마르샹에게 철군을 지시했다. 마르샹은 본국 정부의 지시를 따른다는 이유로 113일 퇴각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고,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연합할 필요성이 있었다. 굴욕적이지만 국가 이해를 위해 프랑스는 파쇼다에서 철군하고 수단을 내주고 말았다.

이 사건에서 키치너는 나일강에 깔린 수중 전신 케이블을 통해 런던과 수시로 연락했지만, 그의 상대였던 마르샹은 파리와 연락할수 없었다. 과학기술 면에서도 프랑스가 영국에 뒤졌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충돌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회고하기를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불과한 것이고, 당시 제국주의자들은 제멋대로 휘저으면서 다니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 땅 싸움을 벌이던 시절이다. 이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분할을 놓고 충돌한 마지막 싸움이란 평가가 적절하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나일강은 영국의 것이 되었다. 영국은 이집트에서 케이프까지 아프리카를 종()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파쇼다에서 막혔지만 사하라 일대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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