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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공부
오하이오주와 전쟁 벌이다 패해 털리도 내주고, 댓가로 위쪽 반도 얻어
미국 미시건주가 두 개의 반도로 갈라진 이유
2020. 01. 18 by 김현민 기자

 

전쟁은 통상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지방정부 사이에서도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일이 미국에서 벌어졌다. 1835~1836년에 미국 오하이오 주와 미시간 주 사이에 벌어진 털리도 전쟁(Toledo War)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쟁은 영토분쟁에서 촉발되었는데, 양 주의 군대가 주 경계선에 대치하며 일촉즉발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남북전쟁 이전에만 해도 미국은 주(state)의 권한이 강했고, 미국 연방은 주의 결합체였던 시절이다.

 

사건의 배경은 갑작스럽게 영토가 넓어진 미국이 제대로 측량하지 않고 주 경계선을 그은데 있었다. 미국 동부의 13개 주가 영국에 대항해 독립을 한 이후 1783년 파리조약에서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을 영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이를 미국에선 북서부 영토(Northwest Territory)라 불렀는데, 현재 오하이오, 미시간, 인디애나, 위스콘신, 일리노이의 5개주로 편성된 지역이다.

분쟁은 오하이오와 미시간 주 경계에 살던 정착민들이 오하이오 주정부에 경계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촉구한데서 시작된다. 이에 오하이오주는 연방정부에 측량을 요청했고, 1816년에 연방정부는 에드워드 티핀(Edward Tiffin)을 측량장관으로 파견해 정확한 주경계를 확인하도록 했다. 티핀은 오하이오 주지사를 역임한 사람이었다.

티핀은 측량전문가 윌리엄 해리스를 고용해 측량을 통해 주경계선을 설정했다. 이를 해리스 라인이(Harris Line)라고 한다.

측량 결과가 나오자, 미시간의 루이스 캐스(Lewis Cass) 주지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하이오주에 유리하게 그어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캐스 주지사는 존 풀턴(John A. Fulton)을 고용해 다시 측량하라고 했다. 재조사한 결과, 풀톤은 해리스가 측량한 것보다 주 경계선이 남쪽으로 더 내려가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측량 기술이 엉망이었다. 두 측량 결과의 사이, 즉 해리스 라인과 풀턴 라인 사이에 너비 8~13km의 긴 회랑이 발생했고, 면적은 1,210에 달한다. 이를 털리도 회랑(Toledo Strip)j이라고 한다.

털리도 회랑의 동쪽 끝에는 머미강(Maumee River)이 에리호로 흘러가는데, 항구 조건이 좋았다. 당시 마이애미 항(Port of Miami)이라 불리웠는데, 지금은 털리도 시가 조성되어 있다. 이 항구에서 수운을 이용하면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두 주의 생각이었다. 당시 에리 운하가 뉴욕주의 허드슨강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뱃길을 활용하면 미국에서 가장 번성한 뉴욕, 버팔로, 올바니를 연결할수 있었다.

 

털리도 회랑 /위키피디아
털리도 회랑 /위키피디아

 

오하이오와 미시간주는 서로 털리도 회랑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당시 오하이오주는 정식으로 미국 연방의 주로 가입해 있었고, 미시간주는 준주(territory)로서 주(state) 승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이오주는 연방에 2명의 상원의원과 19명의 하원의원을 파견해 워싱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반면에 미시간 준주는 1명의 하원의원을 보냈지만, 의결권이 없었다. 당연히 워싱턴 정가는 오하이오 편이었다.

하지만 미시간주는 털리도 회랑을 점거하고 내주지 않았다. 물리적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1835331일 오하이오의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주지사는 600명의 민병대를 완전무장시켜 톨리도 회랑으로 파견했다. 그러자 미시간의 스티븐스 메이슨(Stevens T. Mason) 주지사도 1,000명의 민병대를 회랑에 파견했다. 양측은 서로 대치했지만, 총을 쏘지는 않았다.

두 주 사이가 전쟁 일보전쟁으로 치닫자, 워싱턴이 발칵 뒤집혀 졌다.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이 나서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협상단을 꾸려 양측에 파견했다. 연방정부의 개입으로 양측 군대는 일단 퇴각했다.

그해 선거가 있었다. 털리도 회랑에 미시건주 측과 오하이오측 선거관리인이 함께 참여해 서로 자기네 땅이라며 충돌했다. 겨우 뜯어 말렸지만, 양측의 신경전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미시건주의 경찰이 오하이주 편에 서 있던 벤자민 스티크니(Benjamin Stickney) 털리도 시장을 체포하자, 시장의 아들이 경찰을 칼로 찌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장의 아들은 도망쳐 오하이오주에 숨어버렸다. 미시간주는 범인을 송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오하이오주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연방정부는 정확한 측량을 다시 실시하자고 나왔다. 측량반이 측량을 하는 동안에 미시간주 민병대가 총으로 위협하며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측 사이에 또다시 긴장이 높아졌다. 서로 국방비를 증액하고, 1만명에 가까운 민병대 창설을 서둘렀다.

 

두 개의 반도로 구성된 미시간주 /위키피디아
두 개의 반도로 구성된 미시간주 /위키피디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중재안을 냈다. 털리도 회랑을 오하이오주에 내주되, 미시간에는 미시간호 북쪽의 땅을 주겠다고 했다. 이곳의 지명은 미시간 위쪽 반도(Upper Peninsula of Michigan)라고 하는데, 슈피리어호와 미시건호 사이의 반도지역이다. 잭슨 대통령은 털리도 회랑을 오하이오에 주지 않으면 연방의 주로 승격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18369, 미시간 주의회는 연방정부의 중재안을 거부했다. 위쪽 반도가 황무지나 다름없고, 털리도 회랑과 바꿀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해결책이 나타났다. 미시간주 재정이 바닥 난 것이다. 오하이오주와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군비가 증액되었기 때문이다. 미시간 주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당시 연방정부는 연방예산으로 정식 주에 보조금을 나눠 줬다. 가난한 주는 연방 보조금으로 부족한 예산을 메워나갔다. 하지만 미시간주에는 보조금이 한푼도 지급되지 않았다. 준주였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주로 승격되어 보조금을 받는 일이다.

18361214일 미시간 주의회는 연방정부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로써 털리도 전쟁은 총성 없이 끝났다. 이듬해인 1837126일 미시간은 미국 26번째 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털리도 회랑은 오하이오로 넘어갔다.

지금도 오하이오주와 미시건주는 이웃한 주로 경쟁심이 치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토전쟁의 후유증이라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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