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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
석탄 수송비 낮춰 연료난 극복, 산업혁명의 에너지 제공…본격적 운하시대 개막
[물과 문명] 영국 산업혁명 젖줄, 브리지워터 운하
2019. 04. 10 by 아틀라스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18세기, 영국은 극심한 연료난에 봉착했다. 당시 주연료는 목재였다.

브리지워터 공작 /위키피디아
브리지워터 공작 /위키피디아

 

앞서 2세기 동안 영국은 세계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삼림의 원목을 베어 배를 지었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화목(火木)의 수요가 급증했다. 산이란 산에서 나무를 베다보니, 삼림자원은 빠르게 고갈되었고, 극심한 연료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가뜩이나 15~19세기는 소빙기(小氷期)여서 유럽의 기온이 평소보다 1~2도 더 내려갔고, 겨울철에는 극심히 추웠다.

해결책은 석탄이었다. 영국에는 석탄이 비교적 풍부하게 매장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석탄을 운반하는 게 어려웠다. 말이 마차를 끌고 진흙길을 가야 하므로, 비용도 많이 들고 운송시간도 더뎠다. 게다가 석탄을 캐는 과정에 지하수가 터져 나와 이 물을 빼는데 고생을 했다. 풍차나 물레방아에서 동력을 얻어 양수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영국 중부 맨체스터에 광산을 보유하고 있던 브리지워터 공작(Duke of Bridgewater), 프랜시스 에거튼(Francis Egerton, 1736~1803)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광산에서 캐낸 석탄을 운하로 운반하면 저렴하게 석탄을 공급해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광산과 맨체스터의 공장지대를 잇는 운하를 뚫기로 작정했다. 그에게는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간 있었다.

 

브리지워터 운하 지도 /위키피디아
브리지워터 운하 지도 /위키피디아

 

그의 광산에서 맨체스터까지는 거리로 16km에 불과했지만, 당시 영국의 운하 기술은 프랑스에 한참 뒤져 있었다. 그가 운하 건설에 착수했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했다. 얼마 받은 상속 재산을 다 날려버릴 것이라는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등 뒤에서 쏘아대는 비웃음을 무시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운하 굴착에 뛰어들었다. 앞서 그는 남프랑스 운하를 방문해 프랑스의 운하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 남프랑스의 미디 운하(canal du midi)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전장 240km103개의 수문과 댐, 교량, 460m의 운하터널, 328개의 구조물을 건설한 대규모 인공수로였다. 그에 비하면 그가 건설하려는 것은 미니 운하에 불과했다.

1759~1761년 사이에 브라지워터 공작은 자신의 광산에서 맨체스터를 연결하는 16km의 짧은 구간에 운하를 뚫었다. 이 짧은 구간에 바지선을 띄울 물이 모자랐고, 구릉이 많았다. 그는 베임스 브랜들리(James Brindley)라는 엔지니어를 고용했다. 그는 운하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계공학에 관해는 박학다식했다.

우선 모자라는 물을 채우기 위해 광산에 굴을 뚫어 지하수를 운하에 댔다. 이 방식은 운하의 물 부족을 해소하고, 광산에 차오르는 지하수를 양수하는 효과를 주었다. 또 고가 수로를 다리처럼 만들었다. 프랑스 운하에서 배운 것이다.

운하를 건설하는 도중에 자금 문제가 발생했다. 돈키호테 같은 그의 모험에 은행가들이 어음 인수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지워터 공작은 운하 불모지대나 다름없는 영국에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브리지워터 운하(Bridgewater canal)를 준공했다. 1961717일 운하에 첫 배가 지나갔다.

 

영국 맨체스터 워슬리의 브리지워터 운하 경관 /위키피디아
영국 맨체스터 워슬리의 브리지워터 운하 경관 /위키피디아

 

연료난에 시달리던 영국인들이 환호했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 공작의 영감과 용기에 찬사가 쏟아졌다. 고가 수로를 보기 위해 멀리서도 구경왔다.

석탄 운송비가 공작이 예상한 것보다 낮아졌다. 석탄은 저렴한 비용으로 맨체스터의 공장지대로 운송되었다. 석탄 판매가 급격히 증가했고, 브리지워터 공작은 영국에서 최고의 갑부로 부상했다.

분위기는 곧바로 운하 붐으로 연결되었다. 어음 인수를 꺼리던 은행가들이 경쟁적으로 운하에 투자했다. 영국 곳곳에 운하가 개설되었다. 브리지워터 경은 브랜들리와 함께 자신의 운하를 맨체스터~리버풀로 연장하고, 영국 중부를 가로질러 북해와 아일랜드를 연결하는 운하를 뚫었다. 런던의 금융시장도 운하 건설에는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브리지워터 운하 준공을 전후 해서 1,600km이던 수로 네트워크가 4,800km로 연장되었다.

영국의 운하는 석탄 채굴과 운반을 용이하게 해 산업혁명의 젖줄이 되었다. 석탄은 철을 제련시켰고, 증기 기관을 원동력으로 하는 증기선, 증기열차로 이어졌다.

 

브리지워터 운하의 송수로 /위키피디아
브리지워터 운하의 송수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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