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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비 방미 맞춰 “채널 총동원” 특명…고르비, 첫 만남서 돈 문제 거론
노태우의 북방외교①…역사적 한·소 정상회담
2020. 01. 22 by 김현민 기자

 

1990423일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은 서울시청앞 플라자호텔에서 박철언 의원을 만났다. 박 의원은 열흘 전 내각제를 들러싼 민자당내 내분에 휩쓸려 정무장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고, 이틀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날 예정이었다.

김 수석이 용건을 간략히 설명했다. “대통령께서 다음달 워싱턴에서 한소 정상회담을 열도록 추진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박 의원이 일본에 가는 길에 소련 쪽 비밀 창구를 움직여 주십시오.”

박 의원은 김 수석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해서는 소련 노보스티 통신 동경지국장을 맡고 있던 두나이예프씨를 만났다. 두나이예프씨는 크렘린궁이 지정한 한국과의 막후채널이었다.

박 의원이 먼저 속의 말을 꺼냈다.

노태우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양국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서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서나 필요한 일입니다.”

미소 정상회담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아 시일이 촉박해 어려울 것입니다.”

어렵지만 모스크바로 가서 얘기를 전달해 주십시오. 여비는 내가 내리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두나이예프는 즉시 모스크바를 다녀왔고 며칠후 일본으로 돌아와 박 의원과 다시 만났다.

잘 되었습니다. 얼마후 도보리닌 대통령 외교고문이 서울을 방문해 세부문제를 합의할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비밀 만남에서의 일을 성사시키고 박 의원은 일본을 떠나 자신만의 외유에 나섰고, 521일 고르바초프의 외교고문 도브리닌이 서울에 와 신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물론 그의 방한에는 철저한 보안과 경호가 뒷받침됐다.

다음날 도보리닌은 비밀리에 청와대를 방문, 노 대통령을 만났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에서 떨어진 상춘제에서 노재봉 비서실장과 김종휘 수석만 대동한 채 고르비(고르바초프)의 특사를 만났다. 참석자를 최대한 줄인 것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고, 김 수석이 직접 통역을 맡았다.

도보리닌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의 노 대통령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는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도보리닌의 말은 고르바초프의 말이나 다름 없었다.

 

1990년 6월 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역사적인 한소정상회담. /KTV 캡쳐
1990년 6월 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역사적인 한소정상회담. /KTV 캡쳐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이 199064(한국시간 5)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게 된다.

소련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주변 4대 강대국의 하나다. 해방과 민족상잔의 비극, 분단을 겪으면서 우리가 미국과 손잡은 동안 북한을 지지해온 소련은 첫 번째 가는 우리의 적성국이었다. 이 적성국과 첫 번째 정상회담을 갖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회담은 뚜껑이 열리기까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파란과 우여곡절이 반복되는 비밀외교의 결과였다.

 

노 대통령과 고르비의 간접적 교류는 노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시작됐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석달 전인 19886월초.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모스크바를 방문, 극비리에 소련 지도층과 접촉했다. 박 보좌관은 5공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있을 때 소련의 88올림픽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소련 KGB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고 있었다.

이 때 박철언씨와 선이 닿은 소련측 상대가 후에 한소 정상회담의 막후실력자 역할을 한 두나이예프였다.

박 보좌관은 소련측과 관계개선을 시도하고 이내 돌아왔다. 얼마후 노 대통령은 박 보좌관과 김종휘 보좌관을 따로따로 불러 밀명을 내렸다. 각각에게 하달된 임무는 같은 내용이었다.

민족의 분단과 전쟁 위험을 해소하려면 소련을 뚫어야 하오. 소련측과의 접촉 창구를 만드시오.”

19889월초 모스크바의 한 국제호텔 현관 로비. 박 보좌관과 김 보좌관은 우연히 마주쳤다. 두 사람은 그럴듯하게 이유를 둘러대며 상대방에도 비밀로 하며 노 대통령의 지시를 좇아 서로 다른 영역에서 소련 창구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만난 두 보좌관은 잠시 어색했지만 이내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이때 박 보좌관은 소련 외무성을 방문, 노 대통령의 친서를 고리비에게 전달한 뒤였고, 김 보좌관은 독일 콜 수상의 안보담당 보좌관인 탤칙 씨를 통해 모스크바에 한소 수교를 위한 줄을 놓고 있었다.

 

이들 두 보좌관의 비밀 외교는 한소 교류증진을 위한 대화의 물꼬를 틔우기 시작했다. 19897월 박씨는 정무장관이 임명돼 청와대 비서실을 떠났고 북방 정책은 김 보좌관이 전담하다시피 하게 됐다. 노 대통령은 당시 안보와 통일을 위해 소련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며 한소 정상회담의 추진을 지시했다.

한국정부가 소련과의 관계개선, 나아가 정상회담을 추진해 나가자 전통적인 우방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해를 넘겨 1990년에 접어들면서 청와대 비서실은 그레그 주한미국대사와 솔라몬 미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를 통해 한국정부의 뜻을 전달했다.

미국측은 지지는 하지만 정상회담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청와대측도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극히 희박한 것으로 보았다. 청와대측은 소련 창구와의 접촉도 접촉이었지만,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자칫하다가는 우방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파동에 휘말려 정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박철언 의원은 김종휘 수석의 요청을 받고 한소정상회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에 온 고르비 특사 도보리닌은 미소 정상회담 직후인 64일 한소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페어먼트 호텔로 정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돌아갔다.

 

이제 문제는 한소 정상회담의 의제였다. 의제는 정상들이 만나서 협의하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실무자들은 회담에서 나올 예상의제와 의외로 나올 문제를 모두 짚어보고 대응논리를 정리하지 않을수 없었다.

청와대 외교안보비서실의 북방팀은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해 근무지를 삼청동 회의실로 옮겨 작업을 했다. 정상회담의 비밀이 새어나가는 경우 옷을 벗는다는 각오로 팀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남들이 눈치를 채지 않게 하기 위해 낮에는 평소의 근무지에서 일하다가 밤에는 비밀 장소로 가서 본연의 일을 해야 했다.

회담을 며칠 앞두고 청와대 공보비서실은 언론기관에 엠바고(보도자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AFP, UPI통신등 외신은 청와대의 보도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소 정상회담 뉴스를 터트렸고, 부산일보 등 국내 일부 보도기관에서는 청와대의 엠바고 요청에도 불구, 이 사실을 보도하는 촌국이 빚어지기도 했다.

19906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페어먼트 호텔. 노 대통령은 예정된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은 고르비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주위에 배석하고 있던 비서관들도 가슴을 졸이며 전후 상황을 체크했다. 고르비와 레이건 전 대통령의 이침식사 일정이 한 시간 늦어지면서 그 다음 일정이 순연된 결과였다. 당초시간보다 한 시간 늦어진 오후 515(현지시간) 마침내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다. 한소 간의 해빙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국내언론들은 냉전의 벽을 넘는 거보라느니, “통일로 이어질 극적 해빙이라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이 회담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날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는 후에 한소 관계의 숙제가 된 경제협력 자금문제가 제기됐다.

이 회담을 추진하던 청와대 비서실은 정상회담의 경제적 효과로 방위기 부담 경감등 긍정적인 면을 기대했다. 소련측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돈 이야기를 꺼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워싱턴에 온 솔로몬 차관보가 부시-고르비 회담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소련의 관심은 오로지 경제라고 귀뜸을 주었다. 그래서 당초 계획에도 없던 김종인 경제수석이 회담장에 참석하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측은 경제협력 문제를 들고 나왔다. 구체적인 협상 카드를 준비하지 못했던 노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몇십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르비는 실무자 선에 구체적인 협의를 넘기자고 제의하며 더 이상 경협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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