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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억불 경협자금 주고 얻은 수교…성급한 북방외교, 소련의 자금난
노태우의 북방외교②…한소 수교 조건은 경제지원
2020. 01. 23 by 김현민 기자

 

19909월 중순 무렵 최호중 외무부 장관이 노태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최 장관은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길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과 수교에 관한 회담을 할 계획이었다.

노 대통령이 최 장관에게 한소 수교에 관한 지침을 내렸다. “수교에 관해 바로 합의하도록 하시오. 소련측에 수교가 조속히 이뤄져야 경제협력을 포함한 모든 관계가 진전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시오.”

현지시간 930.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2층 안전보장이사회 소회의실. 현홍주 주미대사, 공노명 소련주재 영사처장등 우리측에서 6명이 참석했고, 소련측에서 보론초프 유엔주재 대사등 7명이 참석했다.

최 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 간에는 숨막히는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최 장관이 먼저 수교를 다그치면서 말을 꺼냈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수교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오늘 바로 수교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년 11일에 발표되더라도 법적으로 오늘 수교일자로 볼수 있지 않습니까.”

좋은 일을 하는데 주저하거나 지연시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발표문안을 수정합시다. 노 대통령도 적절한 시기에 모스크바를 방문할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원칙적으로 찬성합니다.”

 

1990년 9월 3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최호중 외무장관과 소련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내용의 공동코뮤니케에 서명하고 있다. /mbc 캡쳐
1990년 9월 3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최호중 외무장관과 소련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내용의 공동코뮤니케에 서명하고 있다. /mbc 캡쳐

 

이날 양국이 합의, 발표한 공동 코뮤니케에서 합의 즉시 발효라는 규정을 명시한 것은 유엔 외교가에서도 전례 없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이로써 양국은 1904년 대한제국과 제정 러시아의 국교단절후 86년만에 관계를 다시 정상화하는 또 하나의 역사를 창조해 냈다.

한소 수교는 역사적인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에서 이미 담보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양국간 대화의 양식을 바꾸어 놓았다. 회담전에 해왔던 007 비밀작전식 막후접촉 외교가 이젠 필요없게 됐고, 공식적인 외교 채널에 의한 교섭이 지속됐다.

정상회담 후 한달 반 가량이 지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노 대통령 앞으로 친서를 보내왔다. “경제 협력을 담당할 사람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뒤쳐져 있는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전략은 선수교 후경협과 북한에 대한 무기공급 중단 등이었고, 소련측은 선경협 후수교였다. 한국의 북방외교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서로를 희구하는 바가 달랐다. 이런 의견차를 조정하기 위해 199082일 모스크바에서 정부대표단 회담이 열렸다.

우리측에선 김종인 경제수석을 단장으로 하고, 김종휘 외교안보수석, 박운서 경제비서관 등 청와대 비서실팀이 주축이 됐다. 소련측에서는 경제담당인 마슬류코프 제1부총리가 단장이었다. 회담은 양국 대표단 전체회의에 이어 우리 경제팀과 소련측의 국가경제계획위원회, 상공회의소, 대외경제위 관리들의 경협 협상이 진행됐다.

김종인 수석은 마슬류코프에게 “‘선경협 후수교는 국민들의 반발로 어렵다. 고르비에게 이 점을 알려달라고 밀어붙였다. 마슬류코프는 휴가차 크림반도에 가 있던 고르비(고르바초프)를 만나고 돌아온후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한국측 제의를 수락했다. 소련측은 22개 프로젝트와 40개 소비재 품목을 선정, 구체적인 경제협력 방안을 제시했다.

김 수석은 만일을 대비해서 미슬류코프에게 공동 TV인터뷰를 갖자고 제의했다. TV인터뷰에서 마슬류코프는 수교는 아무 때나 좋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이 서울에 방영되면서 국민들에겐 한소수교가 이미 기정사실로 인식됐다.

 

다른 한편 소련 외무부 내 실력자인 키레예프 아시아 담당국장이 김종휘 수석의 숙소를 찾아와 때가 됐다고 수교가능성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 김 수석은 크렘린궁을 방문, 도보리닌 대통령외교안보고문등과 별도 회담을 가지면서 소련 고위층이 수교를 결심하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도보리닌은 김 수석이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성사시킨 소련측 파트너였다.

정부 대표단은 1차 모스크바 방문에서 수교는 시간문제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소련측이 지시하는 경협조건을 들어주려면 국내의 민간기업이 얼마나 따라주느냐, 투자보장협정과 무역협정, 이중과세 방지협정 등이 선행되느냐 등의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 대표단은 돌아와서 소련측이 제시하는 품목에 참여할 민간기업을 물색하는 한편 현금 차관을 되도록 줄이고 기업투자와 상품수출을 통한 구상무역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러던 증 9월 중순 최호중 외무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양국 수교는 전격적으로 성사된다. 양국 외무장관의 수교합의 이후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교환방문을 위한 외교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되자 소련측이 급해졌다. 1117일 메드베데프 소련 대통령 위원회위원이 서울을 방문해 노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을 요청하는 고르비의 친서를 청와대에 전달했고, 노 대통령은 해를 넘기지 않고 12월 중 소련을 방문키로 결정, 이를 발표했다.

그런데 메드베데프는 노 대통령이 모스크바에 올 때 경협 협정에 서명하자고 제의했다. 우리 정부 내에서는 이 제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로 의견이 엇갈렸다. 경협에 대한 완전한 의견 일치를 못본 상태에서 노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이 진행됐다.

 

19901213일 하오 5시가 조금 지난 시각, 어둠이 짙게 깔려오는 모스크바 공항에 태극기와 붉은 기가 겨울 바람에 펄럭이고 군의장대가 도열해 있는 가운데 노 대통령이 트랩을 내려왔다. 소련 거주 한인 200여명이 그간의 한을 푸는 듯 눈물을 흘리며 노 대통령의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나라를 빼앗긴 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말못할 고초를 겪었던 이들은 이날의 눈물을 흘리기 위해 무려 8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을 인내했다.

다음날 고르비는 다른 어느 정상회담보다 긴 2시간 이상의 시간을 노 대통령에게 할애하면서 단독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경협을 협상하는 자리는 북극의 냉기류가 그대로 흘렀다. 김종인 수석과 마슬류코프 소련 제1부총리는 경협규모를 놓고 평행선을 긋는 입씨름을 벌였다.

소련에 지원할 경협 자금 규모는 20억 달러 이상은 안됩니다.”

한국측의 언론보도를 보면 50억 달러 이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는 안 됩니다.”

당신네들하고는 협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수교를 하고 나니 아젠 발뺌을 하는 것입니까.”

소련측이 이같이 주장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양국수교가 가시화되면서 국내 인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스크바에 날아가 경쟁적으로 경제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민자당의 고위간부는 1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소련측에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교가 된 이상 소련측도 더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양측은 지원규모를 30억 달러로 낙착했다.

해를 넘겨 19911월말 마슬류코프는 경협조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서울에 왔다. 이때의 쟁점은 현금차관 규모와 자금제공 기간이었다.

우리측은 현금차관 규모는 5억 달러이며 모든 자금은 5년에 걸쳐 제공한다는 입장인데 비해 소련측은 현금차관 15억 달러이며 모든 자금은 전액 1년 내에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협상은 3일간 지루하게 진행됐다. 우리측에서는 매일 아침 안가에서 장관회의를 갖고 전날 협상결과를 협의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마지막에는 노 대통령이 협상의 매듭을 풀었다. 노 대통령은 협상결과를 보고받고 상황이 정 그렇다면 현금차관을 10억 달러로 양보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양측은 현금차관의 규모를 10억 달러로 결론지었다.

당시 한소수교의 대가로 30억 달러의 지원이 필요했는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정부 내에서조차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수교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입장과 안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대가는 비싼 것이 아니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협상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볼수 없는 법. 그래서 손해를 보더라도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을 얻는다는 것이 협상의 기본원칙이다. 30억 달러의 경협자금의 대가를 치르고 이뤄진 한소 수교의 득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쩌면 당대에서 논란을 벌이기엔 일렀던 것이 아닐까.

냉전으로 인한 분단과 갈등의 한반도에서 개방과 화해의 새 바람을 몰고온 노 대통령과 고르비의 정상회담은 제주도에서 한번 더 이뤄진다. 그러나 옐친 대통령이 붉은 소련을 붕괴시키고 러시아 개혁의 기수로 등장했다.

고르비는 소련의 권좌에서 물러났고, 소련도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이뤄낸 한소 수교는 다음 정부에 새로운 형태의 한·러 관계개선과 경협자금 회수라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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