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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중국령 일리 점령, 영국의 티벳 침공…러일전쟁 독일 부상에 게임 종료
그레이트 게임④…만만한 중국, 명분 없는 전쟁
2020. 01. 24 by 김현민 기자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은 당시 중국의 청()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는 아편 전쟁(1842) 이후 서양 열강의 침탈과 태평천국의 난(1851~64)으로 서부 신쟝(新疆)과 티벳에 주권을 행사할 여력이 없었다. 이 틈을 러시아와 중국이 비집고 들어 갔다.

 

야쿠브 베그(Yaqub Beg, 1820~1877))은 타지크인으로 당시 코칸트 칸국(Khanate of Kokand)의 피스켄트(Pskente)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의 한 마을이다. 그의 이름은 야곱(Jacob)의 아랍식 이름이며, 베그(Beg)은 투르크계 귀족 호칭이다. 중국어로는 야구보 파샤(阿古柏 帕夏)로 표기한다.

야쿠브 베그 /위키피디아
야쿠브 베그 /위키피디아

 

1847년에 코칸트 칸국의 키질로르다 요새 성주로 부임해 1853년 러시아군의 공격에 요새를 빼앗겼다. 그는 요새를 빠져나와 다시 탈환하려다 실패했다. 1864년에 러시아가 타슈켄트를 공격하자 방어전에 참여했다.

1862년 중국 신쟝에 거주하던 투르크 계열의 위그루인(회족)들이 청나라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 점령자 만주족이 토착 위그르족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의 방탕한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공물을 바치도록 하자 현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동치회란(同治回亂)이라 하는데, 청나라 동치제(同治帝, 재위 1861~1875) 시기에 일어난 회족(回族)의 반란이란 뜻이다.

타슈켄트에서 패전한 야쿠브는 1865년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청나라 서부로 건너가 카슈가르(喀什)의 청나라 군사기지를 제압했다. 야쿠브가 청군을 무찌르자 위구르 반란자들이 합세했다. 그는 세를 불려 1866년에 야르칸드, 호탄을 점령하고 타림분지 서쪽을 장악했고, 1870년에는 동부의 투루판을 점거하고 톈산산맥을 넘어 우루무치도 공략해 청나라 세력을 신쟝에서 축출했다.

야쿠브가 중국 서부에서 반란에 성공하자 부하라 칸은 승리자라는 의미의 아탈릭 가지’(Athalik Ghazi)라는 칭호를 주었고,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 투르크는 아미르(Amir)라는 제왕의 지위를 주었다.

 

야쿠브가 중국 서부 이슬람지역에 세력을 확보하자 중앙아시아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가 대표단을 보냈다. 야쿠브는 두 강대국 어느 편에 서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가 카슈가르까지 도로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거부하면서도 통상은 허용했다. 영국은 중앙아시아를 집어삼키려는 러시아의 의도를 꺽기 위해 조지 헤이워드(George W. Hayward), 토머스 포사이스(Thomas Douglas Forsyth), 로버트 쇼(Robert Barkley Shaw) 등을 보냈다. 야쿠브가 영국에 기우는듯 하자, 러시아가 당황했다.

 

일리 분지 /위키피디아
일리 분지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콘스탄틴 카우프만(Konstantin Petrovich Von Kaufman) 장군은 1868년 코칸트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공격해 보호국으로 만든 후 야쿠브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카우프만은 코칸트 출신인 야쿠브가 중국 서역에서 세력을 확보한 다음 중앙아시아로 밀고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게다가 영국과 손을 잡을 경우 중아시아가 위험에 처할수 있다고 판단했다.

1871년 카우프만은 야쿠브 베그가 장악하지 못한 청의 영토 일리 분지(Ili basin)를 선제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곳은 텐산(天山)산맥 서쪽에 일리 강이 발하쉬호(Lake Balkhash)로 흐르며 만든 평야지대로, 광물 자원이 풍부했고, 곡물 창고의 역할도 했다. 624일 러시아군은 일리로 진군해 그들보다 두배나 많은 회족 반란세력을 물리쳤다. 다음날 일리분지의 중심지 이닝(伊寧)에 입성했다. 러시아인들은 이닝을 쿨자(Kuldjia)라고 불렀다. 러시아군은 아무런 권한도 없이 중국 영토를 영구합병했다고 선언했다.

 

야쿠브 베그 군과 청군 진격도 /위키피디아
야쿠브 베그 군과 청군 진격도 /위키피디아

 

그러나 청나라와 영국은 러시아의 일방적 점령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러시아는 한발 빼서 청나라가 신쟝지역을 다시 회복할 때 돌려주겠다고 했다.

청나라는 흠차대신 좌종당(左宗棠)에게 89천명의 병력을 주어 야쿠브 베그의 회족 반란을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좌종당은 18763월 출병해 신쟝성의 도시를 하나씩 탈환해 나갔다. 다급해진 야쿠브 베그는 런던에 사신을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므로, 야쿠브의 제안을 거절했다. 야쿠브는 철저히 패배하고 1877529일 자결했다.

청나라는 신쟝을 되찾은 후 러시아에게 일리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청과 러시아 대표는 1879년 리비디아 조약을 체결했으나 청 조정의 반대로 무산되고, 18812월 일리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일리분지의 70%를 차지하고, 그동안 일리를 지켜준 댓가로 500만 루블의 배상금을 받게 된다.

 

1904년 티벳 영내에 진입한 영국군이 티벳인과 만나는 모습 /위키피디아
1904년 티벳 영내에 진입한 영국군이 티벳인과 만나는 모습 /위키피디아

 

중국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0312월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티벳을 침공한다.

18991월 조지 커즌(George Curzon) 경이 인도 부왕(Viceroy) 겸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러시아의 야심이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것으로 확신했고, 영국내 매파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00년 커즌은 티벳의 달라이라마가 두 번이나 러시아에 사절단을 보내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절의 대표는 아구안 도르지예프(Agvan Dorzhiev)라는 러시아령 브라야트에서 태어난 몽골족이었다. 러시아는 종교적인 일 때문에 방문했다며 의미를 축소했지만, 영국령 인도는 티벳이 러시아의 책략에 말려든 것이라고 판단했다.

커즌은 티벳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떨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달라이라마에게 교역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자며 편지를 보냈다. 달라이라마는 그의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반송했다. 커즌은 자기 땅에서 신이지, 국제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인도 부왕의 편지를 걷어찬데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커즌은 런던 내각의 허락을 얻어 티벳에 사절단을 보냈다. 프랜시스 영허스번드(Francis Younghusband) 대령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은 1903년초 인도 북부 보호령 시킴(Sikkim) 왕국에서 출발해 티벳 영내 캄파 종(Khampa Dzong)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달라이라마는 영국 쪽 땅에서 회담을 할수 있지만 신성한 땅에서는 할수 없다고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사절단은 몇 달을 기다렸으나 응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두 번이나 체면을 구긴 커즌은 2차 사절단을 파견키로 했다. 커즌은 런던을 설득해 이번에는 1천명의 병력을 호위한채 영허스번드 일행을 티벳 깊숙이 진입하도록 지시했다. 무장병력이 들어가면 티벳도 받아들일 것이라 믿었다.

사절단은 19031212일 짐꾼 1만명, 노새 7천마리, 야크 4천마리를 대동하고 티벳 국경을 넘었다. 사절단은 갼체 종(Gyantse Dzong)으로 향했다.

 

티벳 갼체 종 /위키피디아
티벳 갼체 종 /위키피디아

 

영허스번드 일행은 해발 4m가 넘는 고개들을 넘어 행군했다. 영국인의 진입 소식을 들은 티벳은 15백의 병사를 보내 동행시켰다. 티벳 병사들은 구형 화승총과 창으로 무장하고 부적을 몸에 지냈다.

영국군은 티벳 병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다. 티벳인들이 말을 듣지 않자 사절단 호위대장 제임스 맥도날드(James R. L. Macdonald) 준장은 발포를 명령했다. 몇분도 안되어 최신의 살상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은 중세의 무기를 갖춘 티벳 병사를 제압했다. 7백명의 티벳 병사가 죽거나 죽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남은 티벳 병사들은 도망갔다. 영국군은 도망치는 티벳인들에게도 사격했다.

영국 사절단이 갼체에 도착하자 티벳의 저항은 더 강해졌다. 사상자 수도 늘어났다. 수백명의 티벳인들의 시신이 골짜기를 채웠다.

190483월 사절단을 빙자한 영국군은 티벳의 수도 라싸(Lhasa)에 진입했다.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라싸는 영국의 세상이 되었다.

 

영국의 티벳 공격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통상무역을 이유로 군대를 끌고 가 종교적 신앙에 심취해 살고 있는 종족을 수천명이나 살해하는 일은 민주주의 원조라는 영국으로서는 해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달라이라마는 라싸를 빠져나갔다. 티벳인 누구도 신성한 자의 위치를 불지 않았다. 국제적인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절단은 이왕에 라싸에 온 만큼 협상을 하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가 존재하지 않는한 티벳인은 아무도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티벳의 주권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중재에 나섰다. 청나라는 백성이 위험에 빠져 있는 시기에 지도자가 달아났다는 이유로 달라이라마를 폐위하고 새로운 섭정을 통치자로 옹립했다. 티벳의 새 섭정은 협상에 응해 라싸 조약(Treaty of Lhasa)이 체결되었다. 영국이 얻은 것은 수천명을 살해한 댓가만큼 크지 않았다. 티벳이 영국에 무역을 개방하고, 750만 루피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이었다. 또 티벳은 영국 이외의 다른 어떤 외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조건이 포함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티벳을 아주 약한 고리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일리 점령이나 영국의 티벳 공격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며 예방전쟁의 성격으로 중국의 변방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세계의 패권구도가 바뀌었다. 최상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러시아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 비참하게 일본에 패했고, 그후 1905피의 일요일사건 이후 내부적으로 반란에 직면한다. 유럽에선 독일이 부상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제 서로의 적이 아니라, 동맹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078월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 경과 러시아의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Aleksandr Izvolsky)은 마침내 그레이트 게임에 대한 합의를 보게 된다. 내용인즉,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세력권임을 인정하고, 페르시아(이란)는 중립지대로 양국이 분할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1백년 가까이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종식되었다. 그후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독일 세력을 쫓아내는데 동맹자로 협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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