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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영국, 네덜란드 견제 피해 인도~중국 사이 무역 거점 확보…중국에 눈 돌려
몽상가 래플스, 싱가포르에 자유무역항 건설하다
2020. 01. 26 by 김현민 기자

 

스탬퍼드 래플스(Thomas Stamford B. Raffles, 1781~1826)는 몽상가적 기질을 가진 영국인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을 휘몰아칠 때, 그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대결할 인물 쯤으로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역상을 하면서 빚더미를 안은채 사망했다. 가난에 쪼들리던 래플스는 14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동인도회사 런던 본사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는 독학으로 외국어와 지리학, 지질학, 동식물학을 습득했고, 동인도회사는 그의 능력을 안정해 1805년 말레시이아 페낭(Penang) 식민지 부서기관으로 인사발령을 냈다.

그는 페낭에서 말레이어를 배웠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에 말레이어를 하는 사람이 드믈었다. 그가 은근히 경쟁심을 느끼던 나폴레옹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1811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네덜란드를 점령했고,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주인을 잃은 신세가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앞서 인도네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캘커타의 동인도회사 본부에 파병을 지시했다. 래플스는 95백명으로 구성된 원정대에 서열 2위의 문관 및 전략가로 임명되어 자바섬으로 갔다. 인도네시아는 쉽게 영국군에 접수되었다.

 

스탬퍼드 래플스 /위키피디아
스탬퍼드 래플스 /위키피디아

 

그는 4년 반동안 자바 총독으로 일했다. 자바에서 그는 이중성을 보인다. 전근대적인 노예제를 폐지함과 동시에 자바인들의 자존심인 족자카르타(Yogyakarta)의 왕궁을 침범하는 불경을 저질렀다.

래플스는 네덜란드가 현지인에게 부과했던 강제노역을 금지시키고 농민들에게 임대료를 받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수출입 농산물에 관세를 부과했다. 그의 조치는 자유무역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래플스는 자바섬에서 생긴 수익금으로 도로와 시설들을 건설해 영구 지배를 추구했다.

하지만 래플스는 영국에 복종하지 않는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18126월 족자카라트 궁궐을 파괴하고 유물들을 대거 약탈했다. 자바인들의 분노는 후에 네덜란드가 다시 지배권을 확보했을 때 자바인들의 반란(Java War)를 촉발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바 밀림 속에 방치되어 있던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을 찾아내 전설로 전해지던 세계문화유산을 발굴한 공로도 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 네덜란드가 주권을 회복하자 프랑스를 포위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구애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영국은 네덜란드에게 인도네시아를 돌려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 소식을 듣고 래플스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그동안 투자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고, 인도네시아를 내주면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무역로가 차단된다며 영국 본국과 동인도회사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1년만에 영국은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에게 넘겨주고,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래플스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런던으로 돌아간 그는 자바의 역사’(The History of Java)를 출간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왕세자등과 교우하면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덕분에 그는 기사작위도 받는다.

하지만 동인도회사는 그를 요지에 보내지 않고, 허접한 곳으로 보냈으니, 그곳은 현재 수마트라섬 남서쪽의 식민지 벵쿨렌(Bencoolen)이다. 그는 본국을 떠나기 전에 수마트라섬 서북부, 순다해협, 싱가포르 남쪽의 리아우 열도, 보르네오 서부에 거점을 설치해 동아시아 무역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인도회사는 무시했다.

 

싱가포르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위키피디아

 

1818년 벵쿨렌으로 도착한 래플스는 그곳이 정이 들지 않았다. 산물은 후추 뿐이었고, 인구도 적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의 동아시아 무역거점을 찾는데 주력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무역선이 가려면 말래카 해협을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말래카 해협을 지나는 외국 선박에 대해 공격을 하고, 인도네시아 영내에 들어오는 외국 배에 대해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런 방해 공작을 통해 중국과 일본 무역에 대한 독점을 유지하려 했다.

래플스는 벵쿨렌에서 근무하면서 말레카 해협의 무역활동를 고찰했다. 중국 상선, 인도 상선들이 말래카 해협의 항구에서 만나 상품을 교환하고 돌아갔다. 해적들이 수시로 상선을 공격해 귀중한 물자를 노획했고, 해안 무역기자를 둔 현지의 술탄들은 안전한 항구를 제공한 댓가로 과중한 세금을 뜯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말래카 해협 어딘가에 영국 배는 물론 각국의 배가 안전하게 들러 거래하는 자유무역항을 설치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자유무역항에서 관세도 물리지 않고 네덜란드의 간섭도 받지 않게 한다면 성공할 것으로 판단했다.

우연하게 래플스에게 기회가 다가 왔다. 인도 총독이 바뀌어 새로 총독으로 부임한 해스팅스(Francis E. Rawdon-Hastings) 경이 래플스를 캘커타로 들어오게 해 그의 구상을 들어보겠다고 했다. 래플스는 직속상관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해스팅스는 래플스의 제안에 완전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말래카 해협 어딘가에 교역 전초기지를 만들라는 막연한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

 

당시 동인도회사에서는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의 리아우 열도(Liau Islands)와 조호르 강(Johor River) 유역 등을 고려하고 있었다.

래플스가 페낭에 돌아와 친구인 윌리엄 파커(illiam Farquhar)와 함께 말래카 해협 일대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리아우 열도는 이미 네덜란드와 조약을 맺고 있어 항구로 개발하기 부적합했고, 조호르 강 유역과 싱가포르 섬이 후보지로 좁혀졌다.

1819118일 래플스는 탐사선에 포병대와 인도 세포이(sepoy)를 싣고 조사에 나섰다. 인도네시아 해역의 카리문 열도(Karimun Islands)는 무역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조사단은 128일 싱가포르 인근 세인트존스 섬(St. John’s Island)에 내렸다. 래플스는 첫눈에 싱가포르가 마음에 들었다. 항구로서의 입지가 좋았고 방어에 유리했다.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항로가 바로 이웃해 있었다. 또 싱가포르에는 네덜란드인이 없었다. 래플스 일행은 조호르 강 입구를 조사도 하지 않고 싱가포르 섬을 자유무역항의 입지로 결정하게 된다. 이날이 싱가포르 근대사가 개막된 날로 기념되고 있다.

 

1819년 1월 28일 래플스가 도착한 세인트 세인트존스 섬 북부 해안 /위키피디아
1819년 1월 28일 래플스가 도착한 세인트 세인트존스 섬 해안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섬은 조호르 술탄국(Johor Sultanate)의 지배 하에 있었다. 당시 조호르에는 왕권 다툼이 벌어져 누가 실권자인지 애매했다. 26일 래플스는 조호르의 술탄 후세인과 조약을 체결했다. 동인도회사가 무역 전초기지를 세울 권리를 갖고, 매년 술탄 후세인에게는 5천달러, 술탄의 아버지 테멘공(Temenggong)에게는 3천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다음날 래플스는 임지인 벵쿨렌(Benkulen)으로 돌아갔고, 싱가포르를 친구인 윌리엄 파커에게 맡겼다. 파커는 싱가포르 행정관(Resident) 겸 방위사령관(Commandant)이 되어 싱가포르 건설에 매진하게 된다.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영국의 싱가포르 건설에 반대했다. 싱가포르는 네덜란드와 협력관계에 있는 리아우(Liau) 열도의 영토이며, 술탄 후세인과 경쟁관계에 있는 이복동생 압둘 라만(Abdul Rahman)의 영지라고 우겼다. 래플스는 술탄 후세인을 지지하며 네덜란드 주장을 무시했다.

영국 외무부와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눈치를 보며 비용 지출과 새 식민지 승인을 질질 끌었다. 그런데 래플스를 지지하는 또다른 우군이 생겨났다. 무역상들과 언론이었다. 캘커타와 런던의 무역상들은 많은 편지를 외무성과 동인도회사에 보내 싱가포르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영국 언론들도 동조했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싱가포르는 짧은 시기에 급성장했다. 2년반뒤 호랑이가 살던 작은 어촌은 1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3천척의 상선이 모항으로 삼게 되었다. 중국 정크선과 인도, 아랍의 배가 이곳으로 몰려 들었다. 2년반이 지나 도시는 다시 두 배로 커졌다.

1824년 영국은 술탄과 협약을 체결해 싱가포르를 소유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도 더 이상 싱가포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영국과 동인도회사는 싱가포르를 건설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 무역에 나섰다. 1839~1842년 아편전쟁은 영국이 싱가포르를 건설한 이후 동아시아 무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다. 유럽 열강은 이제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싱가포르 주변 해역 /구글 지도
싱가포르 주변 해역 /구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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