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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영국, 매카트니-에머스트 사절단 중국 파견…외교 실패후 무력수단 사용
동서 패권의 역전…통상외교 실패, 끝내 전쟁으로
2020. 01. 28 by 김현민 기자

 

17841128일 영국 상선 레이디 휴스(Lady Hughes)호가 중국 남부 광저우(廣州)항에 입항하면서 예포를 쏘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나 중국인 하급관리 2명이 부상당해 결국 사망했다. 중국 관리들은 포를 쏜 영국인을 색출해 사형에 처했다. 중국측은 두명의 목숨으로 한명을 처형했으니 관대한 처분이라고 밝혔는데, 영국은 크게 불만을 표출했다.

휴스호 사건은 중국이 개방한 광저우의 무역체계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영국은 청()나라 중앙정부와 직접 접촉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질서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영국 내각의 인도관리부 대신인 헨리 던다스(Henry Dundas)는 중국에 파견할 특사로 자신의 친구이자 동인도회사 벵골군 군수사령관을 맡고 있던 찰스 캐스카트(Charles Cathcart) 중령을 선택했다. 캐스카트는 청나라의 무역 규제를 철폐하고, 화물저장소를 만들도록 광저우 근처에 자그마한 외딴 섬을 내줄 것을 제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캐스카트는 17871221일 인도 캘커타를 출발해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심한 폐결핵에 걸렸고 폭풍을 만났다. 이듬해 2~3월에 배에 학질이 번져 캐스카트는 중도에 포기하고 610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중국에 보낸 공식 사절단은 이렇게 실패했다.

 

첫 번째 대중국 사절단이 무위로 돌아간 후 프랑스 혁명(1789)과 인도에서의 전쟁 통에 영국은 중국사절단을 보낼 겨를이 없었다

1792년 영국은 다시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다. 헨리 던다스는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자신의 친구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경을 특사단 단장으로 선정했다. 매카트니는 또 자신의 친구인 조지 스톤턴(George Staunton) 경을 부대사로 지명했다.

매카트니가 본국으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은 중국의 찻잎과 생사, 모직물 생산지에 토지를 할양해 영국상인이 거주하며 사법권을 갖도록 요구할 것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무역을 할수 있도록 통상조약을 맺을 것 광저우의 각종 무역 폐단을 철폐하도록 요구할 것 중국이 영국상품에 흥미를 느끼도록 할 것 베이징에 외교대표를 두도록 요구할 것 등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국과 정식적으로 외교관계와 무역관계를 수립하라는 것이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전함 리이언호(HMS Lion) 등 세 척의 배에 나눠 타고 1792926일 영국 포츠머스 항을 떠났다. 84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간 다음, 마카오를 들렀다가 무려 11개월이 걸려 811일 베이징 근처 텐진(天津)에 도착했다. 영국은 앞서 광저우 주재 동인도회사 관리를 통해 사절단의 입국을 청조에 알렸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건륭제(乾隆帝) 80회 탄신을 경축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실제 건륭제의 나이는 83살이었다. 천상의(天象儀), 지구본, 기계공구, 천문시계, 망원경, 측량기구, 화학 및 전기도구, 유리제품, 카펫, 구리그릇, 도자기 등의 황제용 진상품을 준비했다. 당시 값으로 쳐도 16천파운드나 되었다고 한다.

영국 사절단이 텐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건륭제는 무척 기뻐했다. 황제는 영국 조공사절단이 천조(天朝)를 흠모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며 사절단을 성대하게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텐진에서 극진한 접대를 받고 6백 상자에 달하는 진상품을 마차에 실어 도도하게 베이징에 갔다. 청 조정은 영국 사절단의 이동하는 곳에 영국 조공사절단이라 쓰인 깃발을 내걸었다. 매카트니는 작은 일로 중국을 거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깃발을 애써 무시했다.

건륭제는 여름 수도인 열하(熱河)에서 피서를 하고 있었다. 사절단은 베이징 이화원(頥和園)에서 며칠 머문후 만리장성을 지나 황제를 접견하기 위해 열하로 갔다.

 

매카트니 시절단의 열하 방문 /위키피디아
매카트니 시절단의 열하 방문 /위키피디아

 

건륭제는 머나먼 길을 온 영국 조국사절단이 속국의 예의를 다해 자신에게 삼배구두례(三拜九頭禮)를 하길 원했다. 삼배구두례란 엎드려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를 세 번 땅에 부딪치는 행위를 세 번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조선, 베트남(安南), 몽골 등 번국(藩國) 사신단이 황제에게 그런 예절을 취했는데, 청조는 영국을 번국의 하나쯤으로 보았다.

그런데 영국 사절단의 생각은 달랐다. 세계 제해권을 확보한 최강의 나라가 중국 황제에 속국의 예의를 취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 본국도 매카트니가 출발하기 전에 중국의 궁정예의에 복종하되, 영국 국왕의 명예와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삼배구두례를 하라는 요구에 매카트니는 발목에 각반을 찼기 때문에 절을 할수 없다고 했다. 이에 청 관리는 황제를 알현할 때 각반을 잠시 풀고 예를 올린 다음에 묶어도 좋다고 했다.

매카트니는 이 제안도 거절했다. 그는 영국 국왕에게 하는 동일한 예절을 할수 있으며, 만일 중국 대사가 영국 국왕에게 구두례를 한다면 자신도 할수 있다고 말했다. 청 관리들은 자국의 대사가 영국에 파견되더라도 그럴수 없다고 했다.

건륭제는 멀리서 온 만큼 예외를 두어 영국 국왕에게 하는 예외를 인정하되, 손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허락하지 않았다.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건륭제 알현 모습을 그린 그림(James Gillray 作). 영국인화가는 건륭제를 희화화했다. /위키피디아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건륭제 알현 모습을 그린 그림(James Gillray 作). 영국인화가는 건륭제를 희화화했다. /위키피디아

 

매카트니의 역사적인 건륭제 알현은 1793914일에 이루어 졌다. 사절단은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에 궁궐에 도착했다. 몽골식 대형 유르트(yurt) 천막에서 매카트니와 스톤튼은 영국식 정장을 하고 건륭제를 알현했다. 매카트니는 사전에 조율된대로 무릎을 한쪽만 꿇는 예절을 취했다. 중국측 기록은 영국 사절단이 두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했다.

매카트니는 영국 국왕의 국서를 직접 황제에게 전하고 각종 진상품을 올렸다. 건륭제는 두 사절에게 녹여의(綠如意)를 하사했다. 성대한 환영행사가 열렸다. 황제는 직접 사절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황제 알현에 이어 매카트니 사절단은 청측에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영국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청 조정은 영국 사절단이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러 온 것이므로, 외교적 협상을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황제를 알현한 것으로 사절단의 일이 완수된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청 조정은 외국인이 베이징에 40일 이상 머문 적이 없다며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더 억지를 부려야 소용 없다는 것을 알게된 매카트니 일행은 107일 베이징을 떠났다.

청조는 사절단의 요구에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지만, 그해 103일자 영국 국왕에게 칙서를 보냈다. 그 칙서에서 건륭제는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며, 기묘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그대 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것도 아무런 필요가 없다면서 사절단의 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매카트니의 외교는 철저히 실패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5개월간 운하를 이용해 여행하면서 중국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살피고 약점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뒀다. 매카트니는 청의 과학 기술이 아주 보잘 것 없으며 지식인들은 물질적 진보에 전혀 관심이 없고, 군대는 화기를 구비하지 못한채 아직 활을 사용하고 백성들의 삶은 빈곤하며, 관리들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카트니는 중화제국은 노후한 거함으로, 즉시 침몰하지는 않겠지만 조타수가 무능하므로 난파선처럼 한동안 포류하다가 해안에 충돌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진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조선 정조 시절에 박지원(朴趾源)1780년 건륭제 칠순연을 축하하는 조공사절단에 참여해 그동안 듣고 본 내용을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적었다. 영국 매카트니 사절단이 열하를 방문하기 13년 전의 일이다. 박지원은 앞선 중국 문물에 놀라는 내용을 기행문에 담고 있는데, 이 무렵 유럽 열강은 중국과 교역을 추진하고 있었다.

 

조지 매카트니(왼쪽)와 윌리엄 애머스트 /위키피디아
조지 매카트니(왼쪽)와 윌리엄 애머스트 /위키피디아

 

매카트니가 돌아간 후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영국은 당분간 중국에 신경쓰지 못했다. 그 사이에 영국은 1802년과 1808년 두차례에 걸쳐 마카오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을 장악한 프랑스가 마카오를 차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1816년 영국은 또다시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Amherst)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이때 황제는 건륭제의 아들 가경제(嘉慶帝)였다. 에머스트의 요구사항도 앞서 매카트니 때와 비슷했다.

애머스트 일행은 1816813일 텐진에 도착해 영접을 받았다. 가경제는 이번에도 애머스트에게 삼배구두를 요구했다. 애머스트는 모자를 세 번 벗고 아홉 번 허리를 굽힐수는 있지만, 땅에 머리를 댈수 없다고 밝혔다. 쌍방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가경제는 나름 용단을 내려 무릎을 꿇는 동작이 서툴러도 된다고 혀용했다. 이에 애머스트 일행은 무릎을 꿇되 가볍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사절단은 829일 새벽에 베이징에 도착했는데, 황제가 전갈을 보내 당장 이화원에서 만나자고 제의했다.

애머스트는 먼길을 와 피곤하고, 국서와 관복이 짐 속에 있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알현하겠다고 했다. 칙명을 받은 청 관리들은 당장에 만나야 한다고 독촉했다. 화가 난 애머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청 관리는 영국 대사와 부사가 병에 걸려 올수 없다고 보고하자 가경제는 영국 사절단의 오만불손에 화가 나서 그들을 베이징에서 축출하고 진상품을 사절하고 알현을 취소했다. 애머스트 일행은 가경제를 알현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애머스트는 군함 알세스트(Alceste)호로 광저우에 도착한 뒤 그해 11월 주강(珠江)으로 진입해 요새를 포격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포격은 대화가 아니라 대포로 중국의 문을 열수 있음을 확인시킨 것이다.

 

아편전쟁 그림 /위키피디아
아편전쟁 그림 /위키피디아

 

영국의 두차례 중국 사절단은 평화적인 협상으로 중국의 문을 열수 없음을 입증했다. 이후 영국은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영국 상인 47명은 중국 연안의 섬 하나를 점령해 달라고 의회에 청원을 넣었고, 영국 지리학자들은 홍콩 섬 인근을 면밀히 조사한뒤 1829년 연구보고서를 외교부에 제출했다.

183411월 광저우 무역감독관으로 파견된 영국 외무부 소속 윌리엄 네이피어(William Napier)는 중국 관리와 마찰을 빚게 되자 소형 구축함 2척을 이끌고 주강 입구로 들어가 포격했지만 실패했다. 네이피어의 공격이 실패하자 영국 상인들은 주강 입구의 섬 하나를 탈취해 통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1939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은 마약 판매에서 촉발된 더러운 전쟁이라는 오명과 함께 동양의 패권이 서양의 패권에게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중국은 더 이상 중화사상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했다.

1842829, 난징(南京) 인근 양쯔강에 정박중인 영국 해군의 콘월리스(Cornwallis) 호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이름하여 난징조약이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광저우(廣州샤먼(廈門푸저우(福州닝보(寧波상하이(上海) 5개 항구를 개항한다 개항장에 영사를 설치한다 전쟁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행상(行商) ,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을 한다는 것 등이다.

난징조약은 앞서 매카트니와 애머스트가 요구한 조항들이 그대로 포함했다. 거만했던 청나라는 영국의 무력에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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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기 2021-11-15 12:10:58
잘 읽었습니다. 굿~~ 굿 1892년 영국은 다시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다. -> 1792년으로 수정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