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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나라는 제1차 아편전쟁(1840~42)에서 유럽의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에게 굴욕을 당한 후 1850년부터 1864년까지 14년에 걸쳐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겪게 된다. 16개 성(省)을 장악하고 600개 마을을 파괴한 이 난리에 죽은 사람만 해도 1천만~3천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다 ‘염군(捻軍)의 난’이 1851년에서 1868년까지 계속되어 8개 성을 뒤흔들었다. 윈난(雲南)성에서는 1855~1873년 회교도 반란이, 서북지역에서는 1862~1878년에 또다른 회교도 반란인 동간인(東干人) 반란이 이어졌다. 20여년에 걸친 반란으로 청은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반란은 한족 사대부들이 청조에 충성심을 보이며 진압되었다.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과 같은 유학자들은 반란을 진압한후 멸망의 길로 접어든 만주족의 나라를 위해 몸부림을 치게 된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이요 역모다. 어느 혁명이나 반란에 앞서 반드시 민심이반이라는 기초여건이 형성된다.
19세기 중엽 청나라가 반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사회경제적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강희·옹정·건륭 3대에 걸친 150년의 평화기는 새로운 모순을 노출시켰다. 신농법이 개발되었다고는 하나 번영기는 인구 폭발을 야기했다. 1741년 1억4,300만명이던 인구는 1850년에 4억3천만명으로 3배나 늘어났다. 이에 비해 경작지는 1661년 5억4,900만 묘에서 1833년 7억3,700만 묘로 35% 증가하는데 그쳤다. 당연히 1인당 경작면적이 축소되고, 인구압에 의해 전쟁 또는 내란이 벌어질 조건이 형성되었다.
토지소유 면적의 축소는 산출량의 감소로 이어져 소농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토지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팔린 토지는 부농에게 넘어가 토지집중현상이 확대되었다.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50~60%의 토지는 부농의 수중에 넘어갔고, 10%는 만주족 기인, 관청이 차지했다. 토지가 없는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50%의 소작료를 내야 했다.
조세 수단인 은(銀)의 가격이 상승(디플레이션)해 세 부담이 두배로 늘어났고, 이런 가운데 대금업자들이 세금과 토지 유통과정에 고리대를 뜯었다.
부패도 만연했다. 건륭제 말기에 어전시위 화신(和珅)이라는 자는 25년에 걸쳐 뇌물을 걷어들여 8억냥의 부를 축적했는데, 이는 20년간 국가총수입의 절반보다 더 많은 액수라고 한다. 그의 부패는 전형적인 사례일뿐, 문무관리들 사이에 뇌물수수, 갈취, 불법수탈이 만연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자연재해마저 닥쳐왔다. 1848년 허난성 가뭄, 1849년 후베이·안후이·장쑤·저장성 등 양쯔강 연안 4성의 홍수, 1849년 광시성 기근이 닥쳤고, 1852년 산동성 황허강이 물길을 바꾸며 광대한 지역을 수몰시켰다.
청조도 민심을 잃었다. 외세 침략에 굴복하고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부패했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외세의 침략이 아니라도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고, 반란의 기운은 충만했다. 누가 불을 던지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은 광저우(廣州)에서 30마일 북쪽 화현(花縣)에서 한 객가(客家)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머리가 아주 뛰어나 학업성적이 우수했다. 그는 평생 네 번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모두 낙방했다.
1836년, 22살의 그는 두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던 중에 저명한 유학자 주차기(朱次琦)를 만나 예기의 예운(禮運)과 대동(大同)에 관한 설교를 들었고, 미국인 선교사 에드윈 스티븐스(Edwin Stevens)를 만나 <권세양언>(勸世良言)이란 기독교 복음서 요약본을 얻어 대충 읽었다.
이듬해인 1837년 세 번째 낙방한 이후 그는 낙심해 중병을 얻었다. 그는 40일간 혼미한 상태에서 한 노부인에 이끌려 하늘나라 궁전에 갔다. 그곳에서 금색 수염을 한 노인이 요마(妖魔)를 베는 보검과 옥새를 주었다. 또 그 궁전에서 자신이 큰형이라 부른 중년 남자를 만났다. 또 공자(孔子)가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아난 이후 몸집이 커지고 성격도 온화해졌다. 그의 40일간 혼수상태는 예수가 광야에서 시련을 겪은 기간과 일치한다.
1843년 네 번째 과거에서 낙방했을 때 이종사촌 동생 이경방(李敬芳)이 찾아와 책꽂이에 꽃힌 <권세양언>을 빌려갔다. 이경방은 그 책자에 감명받아 홍수전에게 소책자를 다시 읽어보라고 했다. 홍수전은 그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자신이 정신이 혼미했을 때 꿈결에서 본 것을 다시 해석하게 되었다. 하늘나라 궁전의 노인은 천부황상제(天父皇上帝), 즉 하느님이고, 자신이 큰형이라 부른 중년 남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였으며, 따라서 자신은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며 예수의 동생이라는 논리를 정립했다.
유교와 기독교를 뒤섞은 이 기이한 종교는 불가촉 천민의 세계를 파고들었다. 과거시험에 떨어진 서생인 사촌동생 홍인간(洪仁玕), 이웃의 벗 풍운산(馮雲山)과 자신의 가족이 종교에 귀의했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던 공자의 위폐를 없애고 훈장직도 버렸다.
1844년 그는 포교활동에 나섰다. 풍운산은 광시성 쯔장산이란 곳에서 홍수전의 종교를 토대로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홍인간은 침례교 선교사인 미국인 로버츠(Issachar J. Roberts)에게서 기독교 예절, 의식, 조직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은 백성들은 홍수전의 종교에서 탈출구를 모색했고, 신자들이 불어났다. 1850년에는 신자가 1만명으로 불어났다.
1849~1850년 대기근이 닥치자 광시성의 비밀결사 천지회는 “부자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돕자”(劫富濟貧)는 기치를 내걸고 봉기했다. 홍수전은 1850년 7월 회원들에게 광시성 금전촌(金田村)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1851년 1월 11일 자신의 38세 생일을 맞아 스스로를 천왕(天王)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정한 후 청조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를 선언했다.
광시성(廣西省)은 중국 남쪽에 위치해 베이징 정권의 통제력이 약했고, 남명(南明) 정권의 근거지였으며 죄인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총조에 반항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관리들의 횡포가 심한 곳이었다.
광시성에서 궐기한 태평천국 군은 파죽지세로 청군을 격퇴했다. 1851년 광시성 영안(永安)을 점령했다. 홍수전은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위창휘를 북왕, 풍운산을 남왕, 석달개를 익왕(翼王)에 봉했다. 태평군은 북상하면서 호북성, 하남성으로 진군했고, 곧이어 양쯔강 중하류 군사요지인 구강(九江)과 무호(蕪湖)를 거쳐 1853년 3월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남왕 풍운산과 서왕 소조귀는 전사한다. 홍수전은 난징을 천경(天京)이라 칭하고 수도로 삼는다. 이로써 태평천국은 중국 남부 6개 성을 점령해 북쪽의 청과 중국을 반분하게 된다. 홍수전의 신도는 1백만으로 증가했다.
반란군은 한때 청의 수도 베이징 인근까지 쳐들어갔다. 북벌군은 1855년에 텐진시에서 2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군했지만 후속지원이 없어 실패했다.
다급해진 청의 함풍제(咸豊帝)는 양쯔강 이근의 각 성의 향신 관리들에게 고향에서 민병대(團練)을 조직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852년 때마침 모친상을 당해 고향 후난성 상향현(湘鄕縣)에 내려가 있던 예부우시랑 증국번(曾國藩)은 황제의 명을 받자와 유학자를 장교로 삼고, 농민을 병사로 하는 상군(湘軍)을 조직한다.
태평천국의 결정적인 패인은 내부분열이다. 태평군의 근긴이었던 풍운산과 소조귀가 전사한 후 홍수전과 남은 왕들 사이에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홍수전은 동왕 양수청(楊秀清)이 역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북왕 위창휘(韋昌輝)와 익왕 석달개(石達開)에게 밀지를 내려 동왕을 제거하라고 명했다. 북왕은 동왕과 2만명의 추종자를 살해했다. 이에 익왕은 동지간의 살육이 너무 지나치다고 북왕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이에 북왕은 익왕을 죽이려 하자, 익왕은 도망쳤다.
홍수전은 이번엔 지나친 살육을 이유로 북왕을 처단했다. 익왕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태평군을 떠나 7년간 전전하다가 1863년 살해되었다.
1856년의 내분은 태평천국 군의 사기와 힘을 떨어뜨렸다. 청군과 증국번의 상군이 힘을 얻어 반격에 나서는 가운데 태평군이 1864년까지 오랫동안 버틴 것은 충왕(忠王)으로 임명된 이수성(李秀成)의 투지와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의 난 막바지에 외국인 용병부대가 활약했다. 1860년 충왕이 상하이를 공격했을 때 도시의 상인들과 실업가들의 지원으로 미국인 모험가 프레데릭 워드(Frederick T. Ward)가 양창대(洋槍隊)를 조직했다. 워드는 유럽인 장교 100명의 지휘 아래 4천~5천명의 중국인 사병을 모집했다. 이 부대에는 필리핀 사람도 2백명 있었다.
청의 실권자 서태후(西太后)는 이 부대의 이름을 항상 승리한다는 의미로 상승군(常勝軍, Ever Victorious Army)이라고 명명하며 아부를 떨었다. 부대는 태평천국군과 여러번 전투에서 승리했다. 1862년 워드가 전투에서 사망한 다음 또다른 미국인 모험가 헨리 버지바인이 지휘했고, 그는 급여와 보수문제로 다투다가 영국인 장교 찰스 고든에게 지휘를 넘겼다.
찰스 고든(Charles G. Gordon, 1833~1885)은 1860년 중국 파병부대를 지원해 홍콩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태평천국의 난 소식을 들었고, 처음엔 예수의 생임을 자처한 훙수전에 동정심을 느꼈다. 하지만 중국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반란군들이 농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상승군 지휘를 맡은 고든은 1863년 5월 중무장한 대포를 동원해 금산(金山)을 공격하고,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 함락작전에도 참여해 잔인하고 참혹한 내란을 종식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난징 함락시 10만명이 죽었다.
서태후는 고든에게 은 1만냥을 하사하라고 명령했다. 황실의 전달자들이 바구니 가득 은덩이를 이고 찾아갔을 때 고든은 그 선물을 거절했다. 서태후는 그의 얘기를 듣고 서양인들 중에 비야만적이고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반란군이 패퇴하면서 홍수전은 1864년 6월 1일 자살했다. 52세였다. 16세 아들이 유천왕(幼天王)이라 칭하고 사촌동생인 간왕(干王) 홍인간이 섭정이 되었다. 7월 19일 증국번의 상군이 난징을 함락하자, 유천왕은 도망치다가 잡혀 처단되었다. 이로써 14년간에 걸친 태평천국의 난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