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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1858~1860년, 청과 영불 사이 중재 댓가로 한반도 5배 되는 영토 획보
러시아,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연해주 삼키다
2020. 01. 30 by 김현민 기자

 

러시아 극동 연해주(沿海州)는 한때 발해(渤海)의 영토였고, 일본 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우리동포들에게 망명지가 되었던 곳이며, 현재는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연해주와 북쪽의 아무르강(중국명으로 黑龍江) 유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기 이전에 중국령이었다. 명나라 시절에 흑룡강 하구에 세운 두 개의 비석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1689, 청나라와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을 체결해 스타노보이(外興安嶺)을 경계로 국경을 정했다. 외흥안령 산맥은 분수령으로, 북쪽의 강은 북극해로, 남쪽의 강은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자연적인 경계가 되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주동이 되어 늙은 제국 청나라를 압박하던 19세기 중엽, 러시아는 피 한방울 흘리지도, 총 한방 쏘지도 않고 어부지리(漁父之利) 격으로 외흥안령 산맥 이남 흑룡강 분지와 연해주를 집어 삼켰다. 그 면적은 100정도로, 한반도의 5, 러시아 영토의 6%가 되는 광활한 땅이다.

 

러시아가 아이훈조약(1858년)과 베이징조약(1860년)으로 얻은 영토 /위키피디아
러시아가 아이훈조약(1858년)과 베이징조약(1860년)으로 얻은 영토 /위키피디아

 

만주에서 발원한 청()나라는 흑룡강과 우수리강(Ussuri River, 烏蘇里江) 북동쪽 지역을 외만주(外滿洲)또는 외동북(外東北)이라고 불렀다. 내몽골 외몽골로 분류하던 식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국경을 확정한 이후에도 러시아인들은 이 지역을 탐험하며 넘보았다. 1845년 러시아 지리학자 알렉산드르 미덴도르프(Aleksandr Middendorf)가 아무르강 유역을 탐사한데 이어 1848년에 게나디 네벨스코이(Gennady Nevelskoy)가 아무르강 하구와 태평양 연안, 사할린 섬을 탐사했다. 네벨스코이는 1850년에 아무르강 하구에 차르의 이름을 본 따 니콜라예프스크(Nikolayevsk) 요새를 건설하겠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러시아 외무장관은 그곳이 중국 영토이므로 정착촌 건설이 불가하다고 했지만, 차르 니콜라이는 1(Nikolay I)는 요새 건설을 허가했다. 니콜라이는 제국의 깃발이 한번 올라간 곳에는 깃발을 내릴수 없다며 중국 영토를 자국령으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

크림 전쟁(18531856)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 해군이 러시아 극동 캄챠카반도의 요새(Petropavlovsk)를 포격했지만,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후 러시아는 극동 지역에 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不凍港)를 찾아 남하했고, 청나라 현지 관리들과 충돌을 빚었다.

 

청나라의 외만주 영역 /위키피디아
청나라의 외만주 영역 /위키피디아

 

1차 아편전쟁(1840~1842)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하며 급속히 약화하자 북방의 러시아는 새로 확보한 땅을 굳히고 새로 탐험한 지역을 영토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856108일 중국 남쪽 광저우(廣州)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애로(Arrow)호에 중국 관원들이 해적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급습해 선원 12명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를 내릴 것을 요구했다. 소위 애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애로호의 소유주는 중국인이고 선장은 영국인, 승무원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원래 이 배는 중국 선적이었으나 홍콩 섬이 영국 조차지가 된 이후 선적지를 홍콩으로 바꿔 영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이 선박은 926일로 홍콩 등록이 만료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은 선박이 등록기간에 출항한 선박은 돌아온 날을 만료일로 한다고 국제법에도 없는 억지를 부리며, 선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은 신성한 영국기를 찢었다는 구실로 광저우를 포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도 자국 카톨릭 신부 오귀스트 샤프들렌(Auguste Chapdelaine)이 한해전에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참전했다. 이 전쟁은 1차 아편전쟁의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2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영불 연합군은 56천명의 병력으로 광저우를 공격해 중국의 양광총독 예밍천(葉名琛)을 체포해 영국령 인도 캘커타로 압송했다. (그는 1859년 그곳에서 병사한다.) 영불 연합군은 광저우에 괴뢰정부를 수립한 후 2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18584월에 베이징의 코앞인 다구(大沽)과 천진(天津}을 점령했다.

 

아무르 분지 /위키피디아
아무르 분지 /위키피디아

 

이때 러시아의 동시베리아 총독은 니콜라이 무라비예프(Nikolai Muraviev)였다. 그는 이 참에 러시아 탐험가들이 개척한 아무르강 이북을 달라고 했다. 청조는 여차하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려는 영불 연합군에 신경 쓰면서 러시아의 요구는 흑룡강 장군 이산(奕山)에게 맡겼다. 이산은 나약한 협상가였다. 무라예프는 이산을 협박해 1858528일 아이훈 조약(Treaty of Aigun, 璦琿條約)을 맺는다. 조건은 외싱안링 산맥 이남에서 아무르강 이북의 땅을 러시아에 넘겨주고, 우수리강 동쪽(연해주)를 공동관리로 둔다는 것이었다.

이때 러시아가 얻은 영토는 60, 한반도 세배 넓이의 면적이다. 무라비예프는 이 공로로 아무르스키(Amurskii) 백작 작위를 수여받는다.

러시아는 무라비예프와는 별도로 해군제독 푸티아틴(Yevfimy Putyatin)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그는 중국과 영불 대표단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의 중재 노력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청나라는 영불 연합군의 무력 시위에 굴복해 1858613일과 18, 영국과 프랑스와 별도로 텐진조약(Treaty of Tientsin)을 체결했다. 조약의 골자는 각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허용 9개 항구 개방 외국인의 내지 여행과 기독교 포교 허용 양쯔강 개방 등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사항을 거의 들어 주었다.

 

청 조정은 영국·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야 이산 장군이 체결한 아이훈 조약의 상세한 내용은 보고받게 되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조건이어서 청의 조정은 비준을 단호히 거부했다.

1859년 러시아 조정은 교착상테에 놓인 청-러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7세의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Nicolai Ignatiev) 백작을 협상대표로 파견했다. 그는 러시아 매파 중의 한 사람으로, 직전에 차르의 사절단을 이끌고 중앙아시아 칸국들을 방문해 협상을 벌인 전력이 있었다. 이그나티예프는 젊은 나이였지만 뱀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두뇌의 소유자였고, 마케야벨리를 뺨치는 술수가였다. 그의 임무는 무라비예프가 체결한 아이훈 조약에 대해 청 조정의 비준을 얻고, 나아가 공동관리지역으로 규정한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그나티예프는 만주족 실세 쑤순(肅順)에게 아이훈 조약을 비준하고 중국 내륙으로 무역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쑤순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1860년 영국군의 베이징 점령 /위키피디아
1860년 영국군의 베이징 점령 /위키피디아

 

이 무렵 영국은 홍콩 섬 건너편 구룡(九龍)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른 나라가 구룡반도를 점령하면 홍콩 섬이 위태로워진다는 군사적 판단 이외에 상업, 위생, 치안 등을 위해서도 반도를 임대 또는 소유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596월 영불 연합군은 텐진조약 비준서를 교환한다는 구실로 영국 사절단은 전함과 병사를 이끌고 다구 앞바다에 도착했다. 중국 내에서도 반영 분위기가 일어나 베이징 북부를 흐르는 바이허(白河) 하구에 외국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쇠사슬을 쳐놓았다. 영국 공병대가 쇠사슬을 끊으려 작업을 하던 도중에 청군이 포격을 가해 영국 전함 4척이 침몰하고 434명의 사상자가 났다.

다시 전쟁 상황으로 치달았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18602만명의 병력을 파견해 베이징을 향하던 도중에 협상이 열렸다. 영국측 협상대표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는 청측 협상대표 이친왕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했고, 이에 분노한 이친왕(怡親王)은 파크스를 비롯해 영국인 26명과 프랑스인 13명을 체포했다.

청측의 강경조치에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 황실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많은 보물과 집기들을 약탈했다. 청의 함풍제(咸豊帝)는 여름 수도 열하(熱河)로 도피했다. 영국군은 차제에 청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도 구상했다. 청조는 황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의 대사 이그나티예프는 청조의 절박한 상황을 활용해 전임 푸티아틴이 실패한 조정자 역할을 다시 들고 나왔다. 그는 중국측에게 어려울 때 도와주는 이웃 친구인양 했다. 청조의 협상대표 공친왕(恭親王)을 만나 자신의 조건에 동의하면 연합군과의 분쟁을 조정하고 배상금을 줄여주고, 영불 군대를 베이징에서 철수시키도록 노력하겠노라고 했다. 목에 칼이 들어온 상태에서 공친왕은 이그나티예프의 역할에 크게 기대했다.

하지만 이 러시아인은 영국과 프랑스 대표를 만나선 딴 소리를 했다. 그는 청군의 배치도를 내놓고 청나라와 비타협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공친왕은 이그나티예프의 이중성을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도를 점령한 외국군을 철수시켜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이그나티예프의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 조건은 아이훈 조약을 비준해 흑룡강 이북을 러시아에 내주고 우수리강을 따라 조선과의 경계선까지를 경계선으로 하며(연해주 양도) 신쟝의 카슈카르와 우르가, 치치하얼에 러시아 영사관을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18601024일 공친왕은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베이징 조약에 공식 서명했다. 이 조약에는 영국이 홍콩 섬 건너편 구룡반도를 조차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그나티예프는 영국과 프랑스 대표를 만나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그때엔 바이허 강이 얼어붙어 중국 폭도들이 들이닥칠 것이므로 빨리 철군하라고 주장했다. 영불 연합군도 조약을 체결한 만큼 더 이상 베이징에 주둔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 젊은이는 곧바로 공친왕에게 달려가 자신이 영불 주둔군을 철수시켰으니,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약속대로 국경확정을 위한 조약을 체결하자고 했다. 1114일 이그나티예프는 중국과 별도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와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병사와 총알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거대한 땅덩어리를 얻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에서의 상업적 특권도 덤으로 얻었다.

-러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의 국경은 조선과 접하게 되었고, 구한말 러시아는 조선의 정치변동에 적극 개입하게 된다.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위키피디아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p244~274

<그레이트 게임>, 피터 홉커크, 2008, 사계절, p380~387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p393~404

Wikipedia, Second Opium War

Wikipedia, Treaty of Aigun

Wikipedia, Amur Acquisition

Wikipedia, Treaty of Tient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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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 2020-08-01 13:52:18
Sea of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