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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신유정변으로 공친왕과 공동정권 수립…자강운동으로 구질서 회복
서태후, 권력 장악하다…반짝 일어선 동치중흥
2020. 01. 31 by 김현민 기자

 

1861821일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咸豊帝)가 사망했다. 그는 애로호 사건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여름수도 열하(熱河)에 피신해 있던 중에 지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함풍제는 야심이 많은 자희황후가 자신이 죽으면 6살짜리 아들을 앞세워 권력을 휘두를 것을 우려해 죽기 직전에 황족인 이친왕(怡親王), 정친왕(鄭親王)과 만주족 귀족 숙순(肅順) 3인에게 섭정을 의뢰했다. 3인은 다른 5명의 귀족을 합쳐 8인의 섭정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기미를 알아챈 자희황후는 임종 직전에 함풍제 침전에 들어가 자신이 아들을 보호하겠다는 내락을 받고 옥새를 빼돌렸다. 그리고 두달 어린 사촌동생이자 또다른 황후인 자안황후와 손잡았다. 자희는 또 이친왕과 정친왕에 밀려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恭親王)을 끌어 들였다.

함풍제가 죽은후 두 파벌 사이에 본격적인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베이징은 공친왕의 세력이 강했고, 열하는 두 친왕의 세력권에 있었다. 자희와 자안 두 황후는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자고 서둘렀다. 두 친왕과 숙순은 반대했지만 옥새를 빼앗긴데다 황후의 요구를 무시할수 없었다.

자희황후는 황제의 시신보다 먼저 베이징에 도착했다. 공친왕은 베이징의 부하들을 동원해 황제 시신을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숙순은 처형되었다. 이후 자희, 자안은 태후로서 공동섭정이 되고, 자인 태후의 어린 아들은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 10대 동치제(同治帝). 이 궁정반란을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 한다.

신유정변 배후에 영국이 보이지 않은 역할을 했다. 영국은 당시 5~6천명의 군대를 베이징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함풍제 사후에 누가 권력을 장악할지를 예의주시했다. 두 파가 치열한 권력 암투를 벌일 때 영국은 공친왕에 손을 들어 주었다. 공친왕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협상을 벌인 청측 대표였고, 다른 만주족 귀족에 비해 서양 세력에 대해 우호적이고 세련되었다. 영국은 공친왕 세력이 집권하면 이미 체결한 베이징 조약이 충실하게 지켜질 것으로 판단했다. 18633월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 프레더릭 부르스(Frederick Bruce)가 런던에 보낸 보고서에 영국과 우호적인 교제를 할 가능성이 있는 한 파를 양성했고, 이 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주었는데라는 구절이 이를 입증한다.

 

자희태후(서태후) /위키피디아
자희태후(서태후) /위키피디아

 

신유정변으로 자희태후(慈禧太后)와 자안태후(慈安太后), 공친왕이 정권을 잡았다. 자안태후는 문맹인데다 나랏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나서지 않는 성격이어서 정치에 관한 일은 자희태후에게 맡겼다. 자희태후는 모후에게 붙이는 칭호를 좋아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자희태후가 서궁(西宮)에 거주한다고 해서 서태후(西太后), 동궁(東宮)에 사는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라 불렸다.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만주족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예흐나라(葉赫那拉)나라로, 어린 시절에 매우 가난해 청소도 하고 어머니 일을 도우면서 살았다.

16살 되던 1851년 함풍제의 궁녀가 된다. 함께 자금성에 들어간 사촌 여동생 사코타(자안)는 황후가 되지만, 예흐나라는 황제의 부인들 중 서열 5위였다.

예흐나라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는 궁녀에 머물지 않고 황제의 아들을 낳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환관에게 뇌물을 주어 황제와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미모에다 사람을 끄는 말솜씨가 있었기에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다. 황제는 기뻐했고, 그녀를 사촌여동생 사코타와 동일한 위치의 황후 자리로 승진시켰다.

그녀에겐 야심이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유교 경전을 읽고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을 불러 정국과 국제동향을 배워나갔다. 그녀는 황후이자 황태자의 어머니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했다. 함풍제가 병이 들자 그녀는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황제의 이름으로 칙령을 발표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을 침범하자 황실은 열하에 있는 별궁으로 피신하고, 함풍제는 이듬해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자안태후(동태후) /위키피디아
자안태후(동태후) /위키피디아

 

서태후는 신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을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말은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녀는 승부욕이 강하고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고, 타고난 지혜가 많았다. 하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권력욕이 강해 나라를 혁신시키거나 왕조를 부흥시키는데 실패했다.

중국 또는 동양권에서 서태후가 황실을 말아먹은 바람에 청조가 멸망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하지만 봉건질서에 젖어있던 중국에 여성이 권력을 장악하고 난세를 지휘했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에 대한 여러 사후평가를 차치하고, 서태후의 초기 통치는 합리적이고, 난세를 평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정변으로 서태후가 정권을 잡았을 때, 중국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남쪽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자들은 10년째 준동하고 있었고, 서북 신쟝, 서남의 윈난 지방엔 이슬람 세력이 청조에 저항하며 봉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두차례 전쟁을 벌여 수도에까지 군대를 진주시켰고, 러시아는 북동쪽 외만주 지역을 집어삼켰다.

 

청 10대 황제 동치제 /위키피디아
청 10대 황제 동치제 /위키피디아

 

서태후는 청조에 모후가 섭정을 맡은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함풍제의 아우이자 동치제의 삼촌인 공친왕을 앞세웠다. 공친왕은 의정왕(議政王), 군기대신, 내무부총관대신, 외무부격인 총리아문 대신의 직함을 갖게 되었고, 서태후를 자신의 권력 기초로 삼았다. 초기에 서태후와 공친왕은 서로 의존하는 공존관계를 형성했다. 일종의 공동통치다.

공친왕은 개혁에 나섰다. 그는 전쟁을 벌일 때엔 영국에 적개심을 가졌지만 차츰 영국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숭배하고, 영국을 위시한 서양세력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집권하면서 서양을 끌어들여 군대훈련과 무기개발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고, 자력갱생을 통해 중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방향을 설정했다. 당시 유학자들이 주장하던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받아들인 것이다.

공친왕의 정책 방향은 수도에서 만주족 군기대신 문상(文祥)을 끌어들였고, 지방에서 태평천국 반란세력을 진압하던 증국번(曾國藩), 좌종당(左宗棠), 이홍장(李鴻章) 등 한족 유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서양 세력도 서태후가 막후에 있는 공친왕 체제를 지지하고 전국의 반란 진압을 지원했다.

서태후를 뒷배경으로 공친왕은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을 완전히 진압하며 늙은 황제국은 기사회생시켰다.

우선 외국의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재건했다. 황폐한 토지를 개간하고 관계수로를 건설해 농경지를 확대했다. 또 주인 없는 농토에 피난민이나 전역 군인들에 배분했다. 농민이 주류를 이루던 농경사회에 농사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공친왕 /위키피디아
공친왕 /위키피디아

 

공친왕은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정부를 개편했다.

우선 총리아문(總理衙門)을 두었다. 중화사상에 천착해온 중국에는 외교부란 조직이 없었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동안 예부(禮部)가 번국에 대한 조공과 책봉에 대한 예절을 관장했다. 하지만 베이징 조약으로 막강한 물리력을 갖는 서양 국가들이 수도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하게 되자 서양의 외무부를 본따 새 조직을 만든 것이다.

또 서양국가와의 무역을 관장하는 통상대신을 두었고, 개항장에 세관을 설치했다. 외국어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동문관(同文館)을 설치했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던 사고를 버리고 국제법이란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젊은이들을 선발해 해외에 유학보냈다.

또 서양의 산업화에 자극받아 군대와 산업의 현대화도 추진했다. 서양세력에 패한 결정적 요인이었던 해군을 창설하고, 무기 제조에 나섰다. 하지만 무기 제조는 기술력이 모자라 품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결국엔 독일 크루프사의 대포를 사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소, 기계공장도 세우고 광산개발에도 나섰다.

역사가들은 서태후가 집권한 초기의 변법자강운동을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부른다. 멸망위기에 놓였던 청나라는 살아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구질서는 유지되었고,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고, 사회적 인식이 따르지 못했다. 결국 중흥은 청제국의 부활로 이어지지 못하고, 죽음 직전의 일시적 회복에 그치고 말았다.

 


<참고자료>

<연인 서태후>(Imperial Woman), 펄 벅, 2007, 길산

<근현대 중국사(상권)-제국의 영광과 해체>, 이매뉴얼 C.Y. , 2013, 까치, p326~363

<淸史>, 임계순, 신서원, 2000, p414~444

Wikipedia, Empress Dowager Cixi

Wikipedia, Empress Dowager Ci'an

Wikipedia, Tongzhi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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