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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 비망록
대통령이 주가 일일점검…석달만에 약효 실종, 경제팀 대폭 물갈이
노태우 시절②…무모한 12·12 증시부양조치
2020. 02. 02 by 김현민 기자

 

6공화국의 증시부양책인 ‘12·12 조치는 과연 필요한 것이었는가. 당시의 증시 상황이 이같은 초법적인 개입을 불가피하게 했는가. 또 이같은 조치로 증권시장이 과연 붕괴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증시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이 파격적인 증시 부양조치에 대해 후일 정부기관, 금융기관, 기관투자가, 일반투자가등 관련 당사자들마다 다른 평가를 내렸다. 또 당시 청와대와 재무부에 근무하며 이 조치를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던 당사자들의 증언은 사뭇 다르다. 일부 당사자가 대붕락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한편 이 조치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정책당국자들은 자신들이 이같은 극단적인 증시부양조치를 사전에 몰랐으며, 알았어도 극구 말렸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했다.

 

19891212일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 이규성 재무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12·12 증시부양조치를 발표했다. 한은의 금고를 활짝 열어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 지원하며 시가발행할인율 30%까지 자율조정 고객예탁금 이용율 1%에서 5%로 인상 기관투자가 확대 등으로 포함한 메가톤급 부양조치였다.

12·12 조치는 사실 경제기획원이나 한은과도 사전협의 없이 재무부가 단독으로 결정한 조치였다. 이규성 장관이 조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나 김건 한국은행 총재에게는 직접 전화를 걸어 조치 내용을 설명했다. 조 부총리나 김 총재는 설명만 듣고 반대하진 않았다. 다만 청와대 경제담당 비서실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이 장관은 발표 당시 청와대는 물론 관계부처와 사전조율을 거치지 않은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증시 정책이란 매우 이해관계가 민감하고 보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무장관이 책임을 지고 결단을 내리고, 그 책임 또한 주무장관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재무부 안에서는 충분한 토의를 거쳐서 내가 결정한 것입니다.”

 

12·12 조치에 대해 사후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당시 부총리였던 조순씨도 나중에 이 조치에 대해 잘 한 일이라고 할수 없다고 평했으며, 재무부도 일련의 증시 부양조치들은 주가가 떨어지는 속도를 지연시키는 효과 밖에 없었다는 내부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부양조치는 투자신탁회사들을 빚더미에 앉혔다. 강력한 투약에도 불구하고 3개월 후에는 주가가 조치 당시의 수준 이하로 다시 떨어졌으며, 증권시장의 자율기능을 한층 더 심각하게 망가뜨려 놓았다.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당시 실무 당국자들은 그때엔 이런 극약 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강조했다.

당시 주가는 폭락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증권투자자들은 증시가 붕괴하는데 정부는 뭘 하고 있느냐고 아우성을 쳤다. 투자신탁에 돈을 맡긴 투자자들 사이에서 돈을 되돌려 달라며 환매 러시가 벌어졌다. 언론들은 증시 붕락이나, ‘금융공황이나 하는 용어를 써가며 정부의 정책 부재를 공격했고, 팽배하는 불안심리는 투매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재무부로서도 무언가 부양책을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강도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고민이었다. 이규성 장관은 그의 행정 스타일로는 적극적인 증시부양책을 오히려 꺼리는 편이었다. 그는 12·12 조치 며칠 전에 부양책 마련을 김경우 증권국장에게 지시, 수차례의 부양책을 내놓았으나 약효가 없었다.

 

한국거래소 캡쳐
한국거래소 캡쳐

 

수차례에 걸친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증시 폭락세가 계속되고 특히 1211일은 증시 개장과 동시에 폭락세가 이어지자 이규성 장관의 마음이 흔들렸다. 일련의 주가 폭락 사태가 금융공황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장관은 현재의 증시 상황에 대한 각자의 진단과 한은 지원 여부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증권국장을 지낸 재무부의 모든 간부를 소집했다.

재무부 간부들 가운데 이대로 가면 증시가 심각한 붕괴 상황으로 갈 것이라는 위기론이 지배적이었다. 주무국장인 증권국장만이 특별금융과 같은 극약처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규성 장관은 간부회의에 힘입어 당초 증권국이 마련한 미온적인 부양책을 백지화하고 한은 지원을 포함한 훨씬 강도 높은 조치를 결심하게 된다. 12·12 조치가 재무부에서 입안되는 배경은 이러했다.

 

1989년 말에는 노태우 대통령도 주가 등락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주가가 떨어지면 정치적으로도 정부여당에 좋지 않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노 대통령을 모시고 있던 문희갑 수석도 주가가 한창 떨어질 때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종합주가지수를 챙겼고 이러한 청와대의 분위기가 주무부처로 하여금 강력한 증시부양 정책을 구상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장관을 하더라도 부양책을 강구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여건이었을 것이다.

6공화국 초기에 증권정책 담당자들은 증시 하락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얼마간 금융기관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 받쳐주면 안정을 되찾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큰 폭으로 떨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종합주가지수의 연간상승률이 1987년에 93.8%, 88년에 70.5%를 기록했으니, 정책당국자의 걱정은 어떻게 하면 주가급등 현상을 진정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12·12 조치를 입안하고 발표한 이규성 재무부 장관마저 1989년 초엔 주가가 폭등하는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경제행위를 기대할수 없다주가상승률을 연평균 3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주가가 급등하면서 농민들은 소를 팔아 주식투자에 끼어들었고 월급쟁이들은 일과시간에도 증권회사 객장에 앉아 주가만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초 경제팀에 대한 대폭 개각이 이뤄지면서 노 대통령을 비롯, 청와대의 생각이 바뀐다. 이미 12·12 조치라는 고단위 처방이 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김종인 의원이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으면서 노 대통령에게 증시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경제가 좋아지면 증시는 저절로 좋아지며, 억지로 좋게 하려 하면 부작용만 생깁니다. 특히 대통령이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관료들이 정상적인 정책을 펼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는 주가 동향에 대해 대통령이 아예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수석실에서 보고할때도 주가동향은 빼겠습니다.”

김종인 수석의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그렇게 하라며 동의했다.

19903월의 일이다. 이승윤 경제팀이 들어서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금진호 무역협회 고문과 강성진 증권협회 회장이 함께 청와대로 노 대통령을 찾아갔다. 금씨는 대통령과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을 직접 만나 자문을 할수 있는 처지였다.

노 대통령은 사전에 김종인 경제수석을 만났다. “증권협회에서 사람들이 온다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 것 같소. 대통령은 어떻게 이들을 대해야 하겠소.”

김종인 수석이 대통령의 물음에 그 방법을 일러줬다. “틀림없이 증시 부양책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주가를 올리기 위한 인위적인 부양책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슨 건의를 하건 절대 들어주면 아니 됩니다.”

김 수석의 예상대로 두 사람의 방문은 증시부양책에 관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들이 증시부양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려거든 돌아가라고 잘라 말했다.

뜻밖의 일을 당한 금진호씨는 청와대를 나서자 김종인 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표시했다.

경제수석이 증시에 대해 대통령에게 이러쿵 저러쿵한 모양인데, 그럴수 있는 것입니까.”

뭐가 잘못 됐습니까.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해야 하는 일이 대통령에게 그런 조언을 하는 것 아닙니까. 옳다고 판단하는대로 대통령에게 말한 것일 뿐입니다.”

한국은행의 무제한 지원까지 포함한 위력적인 부양책을 썼어도 주가가 3개월만에 주저앉았고, 증권업계는 금씨를 내세워 또다시 부양책을 모색했던 것이다.

정영의 재무부장관도 역시 증시에 관한 정부의 인위적 부양은 매우 꺼리는 성향이었다. 물론 정 장관 재임시에도 주가폭락이 거듭됐고, 그때마다 여러 가지 부양책이 동원됐으나 종래에 비하면 매우 신중했다.

6공화국 시대의 주가는 종합주가지수 1천 포인트를 돌파했다가 400대로까지 떨어졌다. 이같은 주가추이는 정권 출범시 3저 호황에서 출발해 경제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6공의 증시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평가받는 12·12 조치는 거품경제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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