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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중국의 마타하리…만주국 건국, 상하이 사변의 배후로 국민당군에 처형돼
일본 밀정이 된 청 황족, 진비후이(金碧輝)
2020. 02. 02 by 김현민 기자

 

중국 청나라 황족의 일원으로 일본의 스파이가 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중국 이름 진비후이(金碧輝), 일본 이름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이다.

중국 청나라 말기인 1907524일에 태어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시절인 1948325일에 사형당한 여자 스파이다. 청나라 황족으로 태어나 일본 관동군에 붙어 중국을 팔아먹은 동양의 마타하리로 불린다.

 

진비후이는 청나라 황가의 자손이다. 그녀는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의 직계자손이었다. 아버지는 청나라 2대 홍타이지(태종)의 맏아들 호게(豪格)10대 손으로, 숙친왕(肅親王)의 계보를 이어왔다. 부친은 몽골에서 일본의 앞잡이로 일본의 몽골 통치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만주 군벌 장쩌린(張作霖)에게 쫓겨났고, 1916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장쩌린을 살해하려 하다가 실패했다.

아버지는 만주족과 몽고족에서 부인 다섯을 두었고, 자녀의 수가 38명이었다. (위키피디아 일본판) 진비후이는 그중 14번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떠돌아 다녔고 나중에 무일푼 상태로 되었다. 그는 딸들을 남에게 맡겼다. 그중 진비후이는 일본인 친구인 가와지마 로소쿠(川島浪速)의 양녀로 일본에 보냈다. 이후 그녀는 일본인이 되었다. 그녀는 보호자의 성을 따서 가와지마 요시코(川島芳子)라고 개명했다.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그녀는 청 황실 직계라는 사실을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의 사생활은 그의 정치 생활 못지 않게 파란만장했다. 그녀는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로 인해 도쿄에서 충격파를 던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베어(Edeard Behr)가 쓴 마지막 황제에 따르면 그녀는 15세대 자신의 양아버지인 가와지마 로소쿠와 관계를 가졌고, 1년후에 그 아들과 잠지리를 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그후 몽골 귀족 출신의 남자와 짧은 기간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도쿄에서 자유분방한 학생생활을 보내면서 돈 많은 남자들을 번갈아 유혹하며 함께 각지로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녀의 생활에는 부침이 많았다. 베이징에 돌아왔을 때엔 무일푼이 되어 지저분한 여관을 전전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1921년 자금성(紫禁城)에서 도망쳐 텐진(天津)에 머물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와 황후의 손님으로 초대를 받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누르하치의 자손들로 먼 친척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황후 완롱(婉容)는 금방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할까. 완롱은 진비후이의 휘황찬란한 에피스드를 듣고 재미 있어 했다. 좋아하는 남자라면 누구든 밤을 함께 하고,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만 살고, 귀족이든 실업가든, 암흑가의 불량배든 가볍게 사귀는 점,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사교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힘없는 선통제(푸이)의 황후라는 재미없는 일상에 실증을 느끼던 중 이 자유여인을 완전한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1928년 진비후이는 텐진에서 완롱의 손님으로 푸이의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함께 했다. 푸이와 황후는 그녀를 파티에 데리고 가기도 했고, 그녀는 황제 부부에 도쿄와 상하이의 재미난 풍경과 라이프스타일을 들려주었다.

 

이어 진비후이는 상하이에서 생활하던중 한 파티에서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 소령을 만나 그를 유혹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밀정 역할을 하던 다나카로서도 그녀가 필요했다. 다나카는 기밀자금에서 돈을 빼내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는 그 돈으로 상류층과 교제비로 썼다. 진비후이는 다나카로부터 스파이 활동에 필요한 사격, 암호해독을 익혔다. 다나카는 그녀에게 영어 레슨비도 대주었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을 접선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고, 영어는 스파이 노릇하는데 필수 조건이었다.

진비후이의 두뇌는 뛰어났다. 무언가 하고픈 일은 겁 없이 덤벼드는 성격이었다. 스스로가 황족 출신이라는 태생의 우월감이 그의 스파이 활동을 용이하게 했다. 일반 중국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나 장소를 쉽게 만나고 드나들었다.

 

진비후이가 다타카와 콤비가 되어 본격적으로 스파이 활동은 한 것은 1931년부터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24. 그 무렵 텐진에 머물던 푸이는 일본이 정식으로 제안한다면 만주국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해 11월 관동군은 하얼빈을 점령함으로써 만주 북부까지 지배 영역에 넣었다. 황후 완롱은 어쩐지 만주로 가는 게 불안했다. 황후는 천진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푸이에게 일본의 제의를 거절하라고 요구했다.

푸이를 만주로 데려가는 일을 책임진 사람은 일본 스파이 총책 도비하라 대령이었다. 그는 진비후이에게 지급으로 상하이에서 텐진으로 오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텐진의 도비하라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남장하는 버릇이 있다.

일본인 직원이 이름을 대라고 했다. 그녀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대화가 오가자 도비하라는 책상 위의 권총을 준비해 두었다.

진비후이는 남장을 했지만 목소리는 여자였다. 도비하라가 당신 말씨는 환관 같다고 하자, 그녀는 푸이에게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도비하라는 좋아,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말이 나오게 해주지라며 칼을 빼들었다. 진비후이는 눈 한번 깜짝거리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도비하라는 그녀의 남장용 옷자락을 찢어냈다. 그러자 볼록한 가슴이 드러났다. 도비하라는 진비후이가 여자임을 확인하고 수행할 내용을 지시했다.

다음날 그녀는 황후를 찾아갔다. 황후는 그녀를 맞아 기뻐하며 몇시간이나 이야기 꽃을 피웠다. 진비후이는 자신이 일본에 고용된 스파이임을 철저하게 감추고 완롱에게 남성관계 염문을 들려주었고, 완롱은 그얘기를 듣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완롱은 만주로 가기를 망설였다.

일본인들은 부의와 완롱에게 공포심을 자극했다. 금벽휘는 푸이의 시종이 정적인 장쩌린의 아들 장셰량(張學良)에게 고용되어 언제라도 살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도 던져 겁을 주고, 독이 있어 보이는 뱀 두 마리를 푸이의 침대 속에 넣기도 했다. 시한폭탄이 들어있는 선물상자가 부의에게 배달되기도 했다.

일본 공작팀은 텐진에서 대규모 푸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폭동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중국인 전문 시위꾼들이 일본 자금을 받아 총과 폭탄을 준비해 텐진을 혼돈 상태로 몰아넣었다. 3일간의 폭동은 푸이로 하여금 더 이상 텐진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런 공작이 끝나갈 무렵 금벽휘는 황후를 텐진에 남겨두더라도 황제 푸이 혼자서라도 만주로 가서 목숨을 보존하라고 간청했다. 완전히 사기가 꺾인 푸이는 진비후이의 말을 듣고 텐진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푸이는 자동차 트렁크에 몸을 숨기고 빠져나와 배를 타고 만주 뤼순(旅順)으로 떠났다. 푸이는 뤼순에서 일본군의 포로나 다름 없는, 고립된 생활을 했다.

푸이가 만주로 떠난 후에도 진비후이는 텐진에 남아있던 황후를 정기적으로 찾아갔다. 그때마다 그녀는 큼지막한 뉴스를 전했다. 푸이가 도착한 만주 뤼순에 가면 자신의 친척이 소유한 큰 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면 편안하게 쉴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집은 실제 일본이 제공한 집이었다.

완롱은 푸이의 만주행은 잘못된 결단이며, 일본은 그를 기만했고, 약속은 의미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완롱은 용기가 없었다. 황후 된 자로, 황제와 이혼을 할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황후라도 버림받은 여자의 말로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진비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완롱은 마침내 만주로 가기로 했고, 뒤늦게 뤼순에 도착해 부의와 재회했다.

청나라 마지막황제 푸이와 황후 완롱이 만주에 들어오자, 일본은 곧이어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해 푸이를 황제로 올려놓았다.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푸이 부부가 만주로 떠난 직후 19321, 상해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1차 상하이 사변이다.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중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하자, 일본 거주민들과 중국인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에 일본 해군 육전대 및 항공부대가 상륙해 중국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일본이 만주국 건국 공작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따돌리기 위해 만든 또다른 공작이었다. 이 사건의 도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진비후이였다.

이 무렵 진비후이는 두 사람의 연인을 사귀었다. 한사람은 상해 주재 영국대사관 소속 무관이고, 또 한사람은 쑨원(孫文)의 아들 쑨커(孫科)였다. 진비후이는 영국 무관과 잠자리에서 정보를 얻어내 다나카에게 전해주었다. 그 때 얻은 중요한 정보가 영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 비난만 할뿐, 군사적 강경수단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대한 내용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만주국 설립을 본격화하게 된다. 쑨원의 아들에게선 장제스 국민당 군대의 움직임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얻어 다나카에게 보고했다.

 

일본은 1937년 베이징을 점령해 만주국과 별도의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때 진비후이는 스파이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대가로 일본이 접수한 대궐 같은 집으로 옮겨 살았다. 이무렵엔 그녀는 더 이상 일본의 협력자인 사실을 감추지도 않고, 부유한 중국인에게 막대한 돈을 내지 않으면 비밀 경찰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해 많은 돈을 갈취했다.

그녀도 나이가 들면서 뚱뚱해지고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을 유혹해 침대로 끌어들였다. 에드워드 베어의 마지막 황제에 따르면 한번은 진비후이가 유명한 남자 배우를 유혹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지갑을 훔치려 했다고 억지를 부려 구치소로 쳐 넣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양성애적으로 변해 다나카 소령을 위해 데려온 매춘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망한후 진비후이는 일본으로 도망가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194510월 마침내 장제스 군에 붙잡혔고, 3년후인 1948, 41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진비후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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