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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미군, 용산서 나가야”…골프장 환수, 용산가족공원으로
노태우 시절④…용산 미군기지 이전 논란
2020. 02. 04 by 김현민 기자

 

김 보좌관,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시오. 이전의 장단점을 파악해서 보고하시오.”

198846공화국 정부가 들어선지 한달이 지난 무렵, 노태우 대통령은 김종휘 외교안보 보좌관을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김 보좌관은 국방부와 외무부에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보고토록 통고했다. 그러나 두 부처는 정부가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은데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있느냐며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미국측과 협의조차 착수하기를 꺼려하는 눈치였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은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처음 몇 달간은 정부 내에서도 미온적인 자세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그해 하반기 무렵, 행사가 있어 헬기를 타고 용산 일대를 다녀 오면서 김 보좌관에게 용산 미군기지 이전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봤다. 김 보좌관은 난처했다. 그래서 김 보좌관은 국방부에는 미 8군측과, 외무부에는 주한미국대사관측과 본격적인 접촉에 나서라고 재촉했다.

 

한국정부의 뜻을 전달받은 주한미국대사관은 전적으로 한국정부의 뜻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일단 본국 정부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루이스 메네트리 한미연합사령관은 가능한한 교섭을 피하려는 자세였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은 미국측의 소극적인 자세도 문제였지만 협상 상대가 복잡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 사안을 주한미국대사관이나 미 8군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의 승인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교섭상대가 4곳이나 됐고, 따라서 그만큼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김종휘 보좌관은 기다리다 못해 제임스 릴리 대사를 만나 우리 정부의 입장을 본국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도심 한가운데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군도 계룡대로 이전하고 있는데 미군도 이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용산 미군기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6년동안 병참기지로 활용해오던 곳이다. 구한말인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확전으로 치달을 무렵 일본군이 효창공원 일대와 아현·원효이태원·서빙고 일대를 점령했고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본격적으로 일본군 군사기지가 된 곳이다.

해방과 동시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미 24군단이 용산 군영을 접수했고, 6·25를 계기로 설치된 유엔사령부와 미 8군 사령부가 용산기지에 자리를 잡았다. 1백년 이상 외국군 주둔지로 굳어져 버린 용산기지를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동안 한미 관계를 인식해 역대정부가 미뤄오던 사안이었다.

 

용산기지 이전 협상은 1988년 말부터 본격화했다.

메네트리 사령관은 자신이 사령관으로 재임하는 중에 용산기지에서 밀려났다는 평가를 남길수 없다는 소감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측은 밀릴 기색도 없었고 교섭에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우리측은 요구안을 대폭 수정, 용산 미 8군 기지 923천평 중에서 미 8군 골프장 9만평을 먼저 이전해 줄 것을 제시했으나 미국측은 미군기지 내에 골프장이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이 수정안마저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측의 반대에 부딪치자 정부는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의 제외공관에 지시를 내려 미군부대가 있는 국가의 기지내 골프장의 규모와 기지의 거리등에 관한 현황을 조사토록 했다.

그 결과 미군기지 내에 골프장을 두고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는 자료와 함께 군사작전과 골프장이 어떤 연관을 갖느냐며 반론을 제시했다. 용산기지를 둘러싼 한미 간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고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때 조지 W. H.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19892월 한국을 방문한 부시 대통령은 미 8군 영내를 헬기로 지나치게 됐다. 이때 같이 타고 있던 미국인이 저 곳이 바로 한미 간에 논란이 되고 있는 골프장이라고 설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골프장을 내려다 보면서 그 문제라면 한국인들이 문제를 제기할만하다는 듯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이 다녀가고 교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프랭크 칼루치 미국방부 장관도 미 8군 이전에 동의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나가라면 나간다고 하면서도 한국측의 필요에 의해 나가니 부담은 한국측에서 하고 특히 새로 설치되는 시설은 현재 미국이 쓰는 것보다 질적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며 조건을 달았다. 정부는 미국측의 입장 선회를 받아들여 미국은 성남에 있는 남성대 골프장을 무료로 임대하는 조건으로 대체하기로 했고, 다른 시설의 이전 비용은 주한미군의 지방 이전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일단 수용키로 했다.

이에 따라 19906월 양측은 용산 미군기지를 지방으로 이전하고 이전비용을 한국이 부담한다는 용산계획 합의각서(MOA)’에 서명했다. 이로써 용산 일대의 1백만평은 늦어도 1996년까지 되돌려 받는 일정을 확보하게 됐다.

용산골프장 부지는 그후 1년 정도의 공사를 거쳐 199211월 서울시민의 가족공원으로 개장됐다.

 

미군이 쓰던 골프장 부지를 환수해 1992년 11월 개장한 용산 가족공원/ 서울시 블로그
미군이 쓰던 골프장 부지를 환수해 1992년 11월 개장한 용산 가족공원/ 서울시 블로그

 

6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미 관계가 크게 달라졌다. 그만큼 우리 국력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로서 미국을 맹종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대등한 관계로 전환해야 된다는 시대적 요구도 있었다. ‘혈맹이니, ‘우방이니 하면서 무조건 좋은 나라로 인식되던 미국에 대해 할말은 해야 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고, 국민적 분위기도 그랬다.

용산의 미 8군기자 환수요구가 대표적인 케이스였고, 광주 미국문화원과 서울 내자호텔 환수도 같은 케이스였다.

광주 미국문화원 문제는 학생들의 화염병 투적으로 건물이 부숴졌기 때문에 미국측이 수리비를 한국측에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정부 관계부처도 미국 행정당국의 부속건물은 한국측이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만큼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야갰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가 이를 뒤틀었다. 미국문화원은 한국의 건물이니, 부서지든 말든 되돌려 받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광주 미국문화원에 대한 환수 조치를 내렸다.

그 건물은 원래 일본인이 소유하다가 미군이 점유해서 사용해 오던 목조건물이었다. 해방직후 일본의 패전으로 미군정이 주권과 재산 일체를 넘겨받는 과정에서 이 건물을 점유, 지금까지 써왔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미군정이 관리해오던 일본 소유 재산이 대한문국에 되돌려져야 하므로 이 건물의 소유권도 한국에 있다는 것이 청와대측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1948년 체결된 한미간 협정의 예외조항을 근거로 들어 미국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계속 사용할수 있다며 우선권을 주장했다. 우리측은 그 예외조항이 미군의 필요를 규정한 것이지, 미국대사관 소속인 문화원의 필요를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군정이 건물을 미국 대사관에 넘긴 것은 미군의 필요가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따지자 미국측도 할 말을 잃었다.‘그러나 미 대사관측은 이번에는 광주문화원이 이전할 때 새 건물을 마련할 경비를 한국측이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측은 이 요구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미국측은 임대로 건물을 모색해서 다른 곳으로 문화원을 이전해 나갔다.

 

광주 미 문화원 건물 환수를 계기로 고무된 정부는 이왕이면 내자호텔도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내자호텔은 정부제1종합청사 뒤에 우중충하게 자리잡고 있어 도시계획을 세우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정부 내에서도 내자호텔을 달라는데 대해 반대의견이 있었다. “내자호텔 정도는 그만 둔들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외무부를 다그쳐 미 대사관과 협의, 8군 내에 이미 건축이 허가된 드래곤힐 호텔의 증축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환수 처리하고 말았다.

한미 관계에서 6공화국 정부가 미국측에 많은 요구를 하고 무리한 관계를 시정하려고 했다고 해서 한미 관계가 붉편해진 것은 아니다. 한소 수교등 북방 외교로 미국과 소원해진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북한 핵문제, 걸프전 비용 분담 등에서 양국 사이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사이에 6차례의 정상회담이 이뤄진 점도 한미간 전통적 우호관계를 흐트려선 안된다는 기본원칙에는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은 6공화국 정부가 한 미간 대등한 관계정립을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용산기지 이전을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내 서울시가 세워놓은 민족공원 건설이 차질이 빚어졌다. 이는 6공 정부의 시도는 시도일뿐 진정한 의미에서 한미간 대등한 관계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이뤄지는 것임을 다음 정권에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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