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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임직원, 야당에 로비, 정치 쟁점화…총재 경질에 한은 독립 기치
노태우 시절⑤…한은법 파동
2020. 02. 05 by 김현민 기자

 

19888월 김병주·박재윤 교수등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네 명이 과천의 재무부 장관실을 찾아왔다. 한국은행법 개정을 둘러 싸고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공방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평민·민주·공화의 야권 3당이 한은의 주장을 수용해 한은법 개정 단일안을 국회에 상정하기 직전의 미묘한 시기였다.

이들은 임명직 금통위원인 여섯명의 이름으로 중앙은행제도 개선방향에 대한 금통위의 독자적인 의견서를 사공일 재무장관에게 전달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다. “금통위를 재무부나 한은 어느 쪽에 예속시킬 게 아니라 금통위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임토록 해서 금통위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금통위 위원은 각계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금통위 의장은 위원들의 호선으로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토록 하는 게 좋습니다.”

가뜩이나 복잡한 재무부와 한은 간의 논쟁에 금통위원들까지 끼어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제안한 의견 가운데 재무부 장관이 통화신용 정책과 금융 행정의 최종 책임을 진다는 대목은 한은이 걸고 넘어졌다.

이들의 의견서는 당시 수세에 몰려 있던 재무부의 마지막 대안과 일치했다. 당사자들은 재무부와 사전협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을 했지만 한은측은 재무부가 금통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했고, 또 그럴만도 했다.

 

한은은 금통위원들의 의견이 중앙은행 독립에 역행하는 처사라며 즉각 평직원협의회 명의로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게다가 부서장까지 모임을 갖고 성명을 내는등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금통위원들은 이로 인해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의견서에 참여한 금통위원들의 집에는 협박편지가 날아 들어왔고, 새벽에 항의전화가 불쑥불쑥 걸려오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일부 위원들의 집에는 항의단이 몰려오기도 했다. 특히 의견서 초안을 작성한 박재윤 교수는 학생들에게 항의를 받아야 했고, 공개강의를 열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후 대자보를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사과함으로써 박 교수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국의 통화문제를 결정하는 최고기구의 위원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고 해서 곤욕을 치를 정도로 한은법 개정 논란은 달아 오를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한은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은 6·29 선언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9 선언이 발표된지 며칠뒤인 198778일 한은 부산지점 행원 36명이 한국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 본래의 기능을 다할수 있도록 독립성과 중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한은 독립 논쟁의 불씨를 던졌다. 그후 한은 본점을 포함한 7개 지점에서 동조성명을 발표했다. 85일에는 한은 본점 과장들이 한국은행의 중립성 및 자율성 보장의 필요성이라는 자료를 만들어 각 언론사와 정당·학계등에 배포, 한은 독립운동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한은은 이 문제를 정치적인 쟁점으로 몰아 나갔다. 한은의 열성적인 직원 몇사람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민주당 의원을 찾아 갔다. 그들은 한은의 독립성 보장이 경제민주화의 관건이라며 헌법 개정에 이를 반영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여당인 민정당이 재무부의 편을 들게 뻔했고 야당에 기대한다는 생각이었다. 민주당 쪽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야당은 개헌 협상에서 한은 독립성 보장을 헌법에 명시하지 않는 대신에 한국은행법에 야당안을 반영한다는 선에서 타협선을 찾았다. 따라서 한은법 개정 문제가 한은 독립 논쟁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한국은행 홈페이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한국은행 홈페이지

 

6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한은 독립과 한은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었다.

사건의 발단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88325. 임기를 110개월이나 남긴 박성상 한은 총재를 전격 경질했다. 한은은 평직원협의회를 통해 임기 중인 중앙은행 총재를 뚜렷한 이유 없이 갈아치운다면 한은 독립성 보장은 기대할수 없는 일이라며 정부를 성토하고 나섰다.

수세에 몰렸던 재무부가 그해 520일 금융산업발전심의회에 금융산업 개편안을 상정하면서 논쟁은 본격화했다. 재무부는 중앙은행 독립성 보장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금융감독 체계의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재무부는 금융감독 체계를 효육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며 원칙적인 표현을 썼지만 한국은행은 이를 한은으로부터 은행감독원을 분리하려는 재무부의 저의라고 해석했다.

이때부터 한은법 개정 논란이 다시 달아올랐고 6월 들어 재무부와 한은은 각각 중앙은행 제도 개편방안에 대한 별도의 실무작업반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722일 평민·민주·공화당의 정책전문위원들은 야당의 공동발의안에 최종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한은 직원들은 신이 나서 야당을 찾아가 조문 정리와 인쇄를 도와주기도 했다.

 

야권 3당의 단일안은 한은이 주장하던 내용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금통위원장을 한은 총재가 맡고 금통위의 관장 업무를 통화신용정책은 물론 외환신용정책까지 포함하며 한은 총재의 임명 제청권자를 재무부 장관에서 국무총리로 격상시킨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돌연 약속을 번복, 단일안 제출에 참여치 않겠다고 나왔다. 당시 민주당의 정책변경을 주도한 인물은 정책위 의장이었던 황병태씨. 기획원에 오래 근무한 그는 경제법안이 정치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곱게 생각하지 않았고, 한은법 단일안에 소극적이었다. 민주당이 돌아서자 한은 직원 수십명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상도동 자택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그래서 민주당은 김 총재의 지시로 다시 단일안으로 복귀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화당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재무장관 출신인 김용환 의원이 당시 공화당 정책위 의장을 맡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단일안에 반대했던 김 의원은 민주당이 태도 변화를 보이자 야권의 공동보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재무부는 김 의원이 재무장관 시절에 신임했던 부하 직원들을 보내 설득작업에 나섰다. 한은도 뒤질세라 김 의원의 학교 후배들을 통해 호소하는 한편 미국에 체류 중이던 한은 출신의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동원, 국제전화로 김씨에게 협조를 당부하기까지 했다.

야권 단일안의 상정은 기정사실로 굳어져 갔고, 재무부는 민정당과의 당정협의를 통해 야권 단일안이 상정될 경우 대통령의 비토권을 행사키로 하는 등 최후까지 저지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중앙은행의 의사결정기구인 금통위의 의견서 제출로 한은은 금통위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됐고, 여론으로부터의 지지도 약해졌다.

그러는 사이 9월 재무부는 금통위의 의견을 대폭 수용한 중앙은행제도 개편시안을 만들어 발표함으로써 역공에 들어갔다. 그 내용의 골자는 금통위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임하되, 은행감독원장을 한은에서 분리, 확대 개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은도 이에 맞서 금통위가 외환정책까지 관장하되 의장은 한은 총재가 겸직한다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두 기관이 정면 대결 양상으로 치닫자 이현재 당시 총리와 금통위 출신의 박승 경제수석이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잔치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말라며 중재에 나섰다. 논쟁은 올림픽을 전후해서 한달여 동안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고 재무부와 한은은 다시 대결상태로 돌아간다. 그해 가을 정기국회 국정감사 자리에서 김건 한은총재는 한은 독립에 관한 소신을 밝히면서 통화신용정책 집행 및 감독업무는 한은의 고유업무라며 금통위는 한은의 내부기구라고 포문을 열었다.

김 총재의 발언이 있자 재무부가 발칵 뒤집혔다. 재무부는 즉각 독립 행정위원회인 금통위와 무자본 특수법인인 한은은 엄연히 별개의 기관이고,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감독기관과 피감독기관의 위치에 있다며 반박했다.

 

논쟁이 다시 재현될 무렵, 잠잠하던 야권 3당이 단일안 마련에 다시 합의, 파문을 일으켰다. 야권 단일안의 골자는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겸임하고 재무 차관을 금통위의 당연직 위원으로 하며 임명직 위원도 금통위 의장으로 추천될수 있다는 것이었다. 야권 단일안은 그동안의 한은 주장에 재무부 주장을 절충한 셈이었다. 한은측은 이에 대해 성명을 내고 현행 한은법을 개악하는 격이라며 반박했다.

전반적인 상황이 한은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를 거쳐 한은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정부·여당안은 금통위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임하며,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떼어 내겠다는 것이었다. 한은으로선 막바지 코너에 몰렸다.

1127일 김건 한은 총재는 기자회견을 자청, “야권 단일안이나 정부·야당안 모두를 반대한다며 한은의 개정 방향을 밝혔다. 그러자 한은 직원들은 이에 가세, 1백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가두로 나가기에 이르렀다. 한은법 개정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가자 정기국회의 막을 내렸다. 이에 앞서 평민·민주당은 다시 당론을 변경, 한은의 견해에 근접한 개정안을 마련했다.

밖으로 이런 공박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재무부와 한은은 수차례 내부 접촉을 가졌고, 총리실과 금통위 위원들도 지금 이런 논쟁을 할 시기가 아니다며 중재에 나섰다. 해를 넘겨 양쪽은 감적을 삭여 합의에 의해 한은법을 개정키로 했으나, 다른 경제 현안에 밀려 법 개정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6공화국 초의 한은법 개정파동은 중앙은행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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