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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서양을 배워라”…유신 지도부 1년 9개월 해외 순방
메이지유신 직후 해외시찰 떠난 이와쿠라사절단
2020. 02. 05 by 김현민 기자

 

1868314, 막부(幕府) 토벌군 대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막부파 대표 가쓰 가이슈(勝海舟) 사이에 역사적인 담판이 벌어진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두 거물은 타협하고, 그 결과로 천황파 군대가 에도(江戸)에 무혈입성한다. 1869328일 메이지(明治) 천황은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사용하던 에도로 옮기고, 명칭을 도쿄(東京)으로 바꾼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된 것이다.

 

1869년 2월 20일 메이지 천황의 에도 행차를 그린 프랑스 르몽드지의 삽화 /위키피디아
1869년 2월 20일 메이지 천황의 에도 행차를 그린 프랑스 르몽드지의 삽화 /위키피디아

 

유신파들은 정권을 잡은후 나라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서양 국가들처럼 발전시킬지를 몰랐다. 그들은 대부분 사무라이 춣신으로 칼을 쓸줄은 알았고, 우국충정에 불탔지만 서양 문물에 관해 아는 것은 없었다. 막부파 군대는 홋카이도로 건너가 에조(蝦夷)공화국을 세워 저항하고 칼잡이들은 외국인들을 살해하는 어수선한 정권초기 분위기에서 혁명 지도부는 우선 서양 국가들을 직접 찾아가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유신 지도부에게 사절단을 보내라고 권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 귀도 베르벡(Guido Verbeck)이었다.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그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소에지마 타네오미(副島種臣) 등 유신파 사무라이들에게 서양문물을 가르친 선생이었다. 베르벡은 유신 직후 외무경에 임명된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와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서양 5개국에 사절단을 보낼 것을 제안했다. 베르벡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에 보낸 사절단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귀도 베르벡과 명치유신 지도자들 (1868년) /위키피디아
귀도 베르벡과 명치유신 지도자들 (1868년) /위키피디아

 

유신 정부를 조직한후 지도부는 미국과 1856년에 체결한 가나자와조약(미일화친조약)의 갱신 필요성을 절감했다.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흑선(黑船) 함대의 무력 앞에 굴욕적으로 체결한 조약을 만국공법에 맞춰 개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 조약은 국제법을 모르던 당시에 체결했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주었고, 관세율을 미국과 협의 하에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권침해 요소가 강한 이러한 불평등 조항을 바로 잡는 것이 혁명정부가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재협상해야 할 필요성에다 서양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절박감이 만들어 낸 것이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이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처음에 발의할 때에는 사절단 규모가 소규모였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규모가 더 커졌다. 유신 혁명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서양 국가들의 인준을 받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신 지도자들이 서양 문물을 시찰할 기회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모두 갈수는 없었다. 유신 주역 3인방 가운데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일본에 남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절단에 참여하기로 했다.

18719월 사절단의 명단이 확정되었다. 공식사절단 46, 수행자 18, 유학생 43명 등 모두 107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 지도부 핵심멤버 대부분이 사절단에 참여했다. 공식사절단의 평균 나이는 한창 젊은 32세였다.

해야 할 일이 많은 혁명 초기에 주역들이 대부분 장기 외유에 떠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의 경우는 탄탄한 기득권 세력이었지만, 일본의 유신 세력은 취약한 신생정권이었다. 그들에겐 그만큼 서양을 배우고 선진문물을 일본에 도입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고, 정권 초기에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사절단의 특명전권대사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맡고, 부사(副使)에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히루부미, 야마구치 마스카(山口尚芳)에게 배당되었다.

 

사절단이 떠나기 전에 잔류자와 순방자 사이에 맹약이 서명된다. 서명자는 사이고, 기도, 이와쿠라,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4인이었다. 내용인즉, 사절단의 해외 순방기간에 서로가 외교와 내치에 섣부른 결정을 내리지 않고 현상유지에 주력하며, 사절단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없으며, 잔류자는 고위직 인사를 단행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서양을 순방해 배우고 돌아와 일본에 도입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권력 공백기에 잔류자가 마음대로 정책을 결정하고 순방자가 일방적으로 협상하지 못하도록 했다. 권력자들 간에 일종의 정치적 휴전을 선언한 셈이다.

 

사절단은 18711128일 미국 태평양 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 소속 아메리카 호(SS America)를 타고 요코하마(橫濱)를 출항해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이들은 1973913일 다시 요코하마항으로 돌아올 때 19개월 21일간 지구를 일주했다. 그들은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12개국을 방문하고,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돌아왔다.

첫방문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현지언론은 얼마전까지 그 나라가 처해 있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표들이 왔다고 평가했다.

기록의 나라답게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가 대표필진을 맡아 순방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낱낱이 적어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를 편찬했다. 또 주미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는 럿거스대학(Rutgers University) 데이빗 머레이(David Murray) 교수에게 미국 교육학자들을 대상으로 일본 교육 발전을 위한 견해를 수집하도록 부탁해 책자를 낸다. 머레이 교수는 일본도 영국과 같이 막강한 경제대국이 될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책자는 근대 일본의 교육개혁에 지침이 된다.

미국에서는 10명의 유학생들을 떨어뜨렸다. 이중 18살이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는 하버드대에서 유학하면서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친분을 맺는다. 러일전쟁 이후 가네코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재를 부탁해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는데 기여한다. 또 단 다쿠마(團琢磨)는 후에 미쓰이(三井) 재벌의 총수가 되어 일본 재계를 이끌게 된다.

사절단이 데려간 미국 유학생 가운데 여성이 5명이나 된다. 홋카이도 개발에 투신하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여성 교육을 중시해 제안한 일이었는데 처음 공모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공모에 다섯명이 지원해 모두 데려갔다. 조건도 좋았다. 10년간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주었다. 나이는 가장 어린 지원자는 6살 쓰다 우메코(津田 梅子)였는데, 그녀는 교육학을 전공해 일본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10살이었던 나가이 시게코(永井繁子)는 커네티컷 뉴헤이븐에서 역사학자 존 애벗(John S. C. Abbott)의 집에서 5년간 숙식하며 동부 명문 배서 대학(Vassar College)에서 공부하며 일본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자가 된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따라간 일본 여학생들. 왼쪽부터 나가이 시게코(10), 우에다 테이코(16), 요시마쓰 료코(14), 쓰다 우메코(10), 야마카와 스테마츠(11). 1871년. /위키피디아.
이와쿠라 사절단을 따라간 일본 여학생들. 왼쪽부터 나가이 시게코(10), 우에다 테이코(16), 요시마쓰 료코(14), 쓰다 우메코(10), 야마카와 스테마츠(11). 1871년. /위키피디아.

 

바깥 세상으로 나온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일본인이라는 자존심을 강하게 내세웠다. 남성 대부분은 삭발을 하고, 양장을 입었고, 단장인 이와쿠라는 일본 문화에 대해 자부심으로 상투와 기모노를 입은 모습으로 도항을 했다. 이 모습은 미국의 신문 사진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미국에 유학하던 아들 이와쿠라 도모사다 등이 미개 국가로 멸시를 받는다고 설득해 시카고에서 삭발하고, 이후는 양장을 입었다.

이와쿠라는 큰 충격받았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철도를 보고 놀라워 했고, 영국에서 공업 기술에 압도되었다. 그는 일본의 번영이 철도에 달려 있으며, 일본을 동서로 잇는 철도 건설이 급선무라고 보고, 귀국후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으로 관여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가 1872년 런던 체류중 촬영 사진. 왼쪽에서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상투를 튼 이),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위키피디아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가 1872년 런던 체류중 촬영 사진. 왼쪽에서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상투를 튼 이),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위키피디아

 

독일에 들렀을 때, 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강연을 듣고 그들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깨달았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각국은 모두 친목과 예의를 유지하면서 외교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 뿐, 그 이면에는 강약의 다툼이 있고, 각국이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 소국은 만국공법에 의지해 자주권을 지키려 하지만, 강자의 실력주의 정략에 휘둘리면 자신을 지킬수 없다. …… 우리는 국력을 통해 서로 자주권을 지키며 대등하게 교제하는 세계에 살고 싶다. 영국과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 산물을 이용해 국력을 강화했다. 다른 나라들은 두 나라의 행동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유럽의 평화는 신뢰할수 없다. …… 일본은 국권과 자주를 중시하는 우리 독일과 가깝게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비스마르크의 강연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귀국후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과 철학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프랑스 아돌프 티에르 대통령을 만나는 이와쿠라 사절단, 1872년 12월 26일. /위키피디아
프랑스 아돌프 티에르 대통령을 만나는 이와쿠라 사절단, 1872년 12월 26일. /위키피디아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며 배운 철학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유신 지도자들은 서양인들의 지도 없이는 급속한 근대화를 이룰수 없다고 판단했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였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젊은이의 유학 지원에 그치지 않고, 외국인 전문가들을 데려와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들은 비싼 돈을 지불하며 외국인들을 초빙했다.

독일인 로에스레르는 헌법초안을 만들고, 영국 해군중좌 더글러스는 근대 해군을 훈련시켰다. 킨데르는 금본위 화폐제도를 창설하고, 샨드는 중앙은행 설립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다이에르 공학박사는 200명의 학생을 교육해 기술자로 배출시켰다.

일본 통계에 따르면 1874~1875년에 약 540명의 외국인이 고용되었다. 이중 기술자가 240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그 이후 1980년엔 그 절반으로 줄었다. 유신 이후 약 10년간 기술교육, 국가제도 수립, 입법 등에 필요한 외국인을 적극 수용해 배웠던 것이다.

월급도 넉넉히 주었다. 1874년 통계를 보면, 당시 총리 월급이 800엔인데, 총리급 급여가 지급된 외국인이 10명이나 되었다. 200~300엔이 18%, 100~200엔이 35%, 100엔 미만이 18%로 되었다. 그해 외국인에게 지급한 봉급이 76만엔으로 공부성의 경상경비 227만엔의 3분의1을 차지했다. 당시 1엔은 쌀 40kg을 살수 있었는데, 메이지 정부가 얼마나 많은 돈을 외국인 고용에 썼는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외국인 고용 비용이 메이지 정부에게 재정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배운 일본인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함으로써 몇배의 이득을 냈다. 일본에 고용된 외국인들은 일본 사회에 서구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양복착용, 태양력 채택, 일요일 휴무제, 서양 부기법 채택, 노동 적립금제, 진료소 설치, 전신선 설치, 가스등 사용등도 외국인들의 지도로 이뤄진 것이다.

유신 지도자들은 서양인을 통해 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해 서양국가들처럼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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