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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야기
뉴욕과 시카고 성장의 주역…동부와 서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물과 문명] 본격적 美서부개척 시대 연 이리운하
2019. 04. 11 by 아틀라스

 

미국 최대도시 뉴욕은 1815년에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 최대도시는 필라델피아였고, 뉴욕은 보스턴, 찰스턴에 이어 네 번째 도시였다. 그러던 뉴욕시 인구는 184030만으로 세배나 불어났고, 10년후 1850년에는 70만으로 명실상부한 미국 최대도시로 우뚝 섰다.

여기에는 이리 운하(Erie canal) 개통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이리운하는 뉴욕주에 있는 운하로 허드슨강 상류의 워터포드(Waterford)와 버펄로(Buffalo)까지 연결하는 584km의 인공수로다. 이 운하는 독립 직후 미국 동부와 오대호 사이에 뱃길을 연결해주었다.

운하로 덕을 본 또다른 도시가 시카고다. 1835년 시카고는 인구 350명의 시골 타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리 운하 개통으로 미국 동부와 뱃길이 열린데다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154km의 일리노이~미시간 운하가 개통되면서 1850년에 시카고의 인구는 3만명으로 늘었다. 시카고는 그후 철도 중심지가 되면서 1890년대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뉴욕까지 배로 3주일 걸리던 시간이 기차로 5일이면 되었다. 시카고는 당시로는 미국 서부였던 농업지대의 곡물과 육류를 가공하고 운송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817년에 착공해 1825년에 개통한 이리운하는 갓 독립한 신생국에 교통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뉴욕을 흐르는 허드슨강과 오대호를 연결해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동부와 서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놓았다. 본격적인 서부개척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리 운하 구간 /위키피디아
이리 운하 구간 /위키피디아

 

미국은 독립 직후인 1803년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수계에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구입했지만, 애팔래치아 산맥이라는 크나큰 장애에 가로막혀 동부와 서부는 사실상 따로 놀았다.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1807년에 증기선을 도입해 뉴욕의 허드슨강을 운행했지만, 서부지역엔 해안을 돌아야 하므로 시간이 엄청 걸렸다. 동부에 밀집해 있던 인구가 서부로 진출하려 하지 않았다. 미시시피강이 가져다 줄 풍부한 부는 미개척 상태였다.

이때 뉴욕주의 사람들이 허드슨강 북부에 운하를 놓아 오대호를 통해 오하이오를 연결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증기선 사업자 로버트 풀턴도 적극 동조했다. 하지만 그 방안을 보고받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내용은 훌륭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거절했다. 그는 한 세기 앞서 간 생각이지만, 조금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드위트 클린턴 /위키피디아
드위트 클린턴 /위키피디아

 

그러나 뉴욕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드위트 클린턴(DeWitt Clinton)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리 운하 프로젝트는 사장되었을 것이며, 미국 서부개척도 상당기간 지연되었을 것이다.

여섯 차례나 뉴욕 시장을 역임한 그는 이리 운하 건설에 매달렸다. 후에 뉴욕 주지사가 되어 운하 공사의 준공을 보게 된다.

1810년 그는 운하건설의 가능성을 확인해보려고 기선을 타고 52일이나 올버니에서 버펄로까지 왕복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여행을 통해 큰 감명은 물론 자신감을 얻었다. 연방정부에서 부정적 의견을 냈지만, 뉴욕주 정치인들은 밀어붙이기로 했다. 정치적 난관과 기술적 의심들이 나왔다.

클린턴 주지사는 1817년 일단 착공식을 열었다. 기술은 남프랑스의 메디 운하와 영국의 브리지워터 운하에서 차용했다.

하지만 길이 1.2m, 니버 12m의 수로를 500km 이상 건설하는 일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모든 작업을 손이나 말, , 발파용 화약으로 진행해야 했다.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를 파 나무뿌리를 제거하고, 배수로를 냈다. 1819년에는 금융공황이 발생해 은행들이 대출을 축소해 자금난에 빠졌다. 하지만 금리가 내려가면서 공채 발행이 쉬워지는 득을 보게 되었다. 그럭저럭 공사는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었다.

허드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동쪽 끝에 내리막 물길을 조절하기 위해 송수교를 세우기 위해 26개의 기둥을 세워야 했다. 서쪽 버펄로에는 나이애가라 폭포로 이어지는데, 견고한 암석지대를 11km나 지나야 했다.

182510월에 드디어 운하가 완공되었다. 총길이 584km의 운하에는 수문 83, 송수교 18개가 건설되었다. 클린턴 주지사는 대대적인 완공식을 열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리운하 개통후 수로 /위키피디아
이리운하 개통후 수로 /위키피디아

 

이리 운하는 초기 미국에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 완공 첫해에 7,000대의 배가 이리 운하를 이용했고, 화물량은 1836~1860년 사이에 31배나 늘어났다. 화물 운송비용은 10분의1로 떨어졌다. 운송비용 부담이 줄어들자 중서부 지역에서 수확되는 밀과 옥수수, 귀리등이 동부 해안으로 운송되었고, 유럽으로 대량으로 수출되었다. 이에 따라 곡창지대인 미국 중부의 농업 생산량이 늘어났고, 미시시피 강 유역에 농지가 확대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미국 중부의 농산물이 미국 동부는 물론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이다.

이리 운하의 성공은 미국에 운하 붐을 일으켰다. 개통 1년 사이에 미국 전역에서 100건의 운하건설 계획이 만들어졌다. 1840년대까지 4,800km의 운하가 만들어졌고, 미국의 하천은 운하를 통해 뉴욕에서 멕시코만까지 연결되었다. 시카고, 클리블랜드, 버펄로, 신시내티, 피츠버그등 그동안 내륙도시들은 증기선이 북적거리는 항구도시로 되었다.

미국 서부는 더욱 확장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정착하기 싫어하던 동부인들이 서부지역으로 몰려 들어갔다. 1840년대에 미국인 40%가 애팔래치아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다.

동과 서가 뚫리자 미국 경제도 성장에 속도가 붙었다. 미국 경제는 19세기초 25년 동안에 연간 2.8%, 그 다음 25년 동안에 4.8%의 성장을 했다. 경제사학자들은 이 기간이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기였다고 한다. 미국이 서유럽을 바짝 쫓아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리 운하가 연 미국 경제의 활력은 그 뒤를 이어 개설된 철도망으로 가속화되었다.

 

모호크강의 수로 /위키피디아
모호크강의 수로 /위키피디아
뉴욕주 록포트의 갑문 /위키피디아
뉴욕주 록포트의 갑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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