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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 비망록
미국, 환율조작국 지복하며 환율 압박…양보 끝 88년 15.8% 환율 하락
노태우 시절⑥…3저 호황에 원화 절상 압력
2020. 02. 06 by 김현민 기자

 

1989년초 하와이의 미국 세관회의실. 이 곳에서는 한미 환율협상이 열렸다.

미국측은 원화 환율을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얼마를 내릴 것을 밝히라고 끈질기게 요구했고, 우리측은 어느 선 이상은 안 된다고 버텼다. 미국측은 물러설 줄 몰랐고, 한국측은 미국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 무렵 본국으로부터는 우리측 안이 관철되기 전에는 절대로 귀국하지 말라는 훈령이 도착해 있었다. 대표단은 하와이에서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더 이상 협상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아 어찌됐든 대표단은 귀국하려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우리 대표단은 출발 직전에 마지막으로 미국측 협상대표를 만나 이대로는 절대로 못 돌아간다며 한번 더 우리측 주장을 들어줄 것을 부탁 겸 요구했다. 결국 비행기가 출발하기 10분 전에야 미국측은 우리측 협상안을 받아들였다. 대표단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태평양을 건너 귀국할수 있게 됐다.

 

6공화국 정부는 출발부터 운이 좋았다. 5공화국의 전두환 정부가 앞서의 정부로부터 막대한 외채를 물려받아 시달린데 비해 6공화국 정부는 5공화국으르로부터 막대한 국제수지 흑자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니 행복한 정부였다. 그러나 국제수지 흑자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있었으며, 미국으로부터 원화 절상 요구와 개방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원화절상 압력은 국제수지 흑자가 처음으로 났던 1986년부터 시작됐다. 그때는 처음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요구를 그런대로 따돌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음해 또다시 대규모 흑자가 발생하자 미국의 절상압력은 노골적이었다. 미국 정부는 베이커 재무장관을 비롯, 여러경로로 우리 정부에 환율을 내리라(절상)고 압력을 가해왔다.

1987년에는 6·29 선언이후 전국적으로 타오르는 노사분규를 이유로 들어 절상할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가 미국인들에게는 도저히 먹혀들지 않았다. 다행히 사공일 당시 재무장관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IIE(미국 국제경제연구소)의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이 한국의 노임 상승은 원화절상 효과와 같다며 베이커 장관을 설득, 또 한해를 넘겼다.

그러나 극심한 노사분규에도 불구하고 99년에도 경상수지 흑자규모가 100억 달러를 넘자 미국측의 절상압력도 강도를 더해갔다.

이처럼 6공화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다가오는 원화 절상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는 오랫동안 적자를 경험하다가 모처럼 만난 흑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던데도 그 원인이 있다.

무역 흑자 사태에도 수출만이 살 길이고 수입소비재를 사용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는 개발독재 시대의 흑백 논리는 여전했다. 흑자는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은 일반 국민들은 물론 경제부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적자시대를 통해 형성된 국제수지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5공화국말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무렵, 박운서 상공부 통상진흥국장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끌려가 자신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다. 며칠전 해외공관장을 대상으로 한 개방정책에 관한 강의 내용이 말썽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강의에서 개방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컴퓨터나 전자 같은 분야는 당분간 더 보호를 해야 하지만 양담배 같은 소비재는 오히려 개방해서 통상압력을 누그러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당시 군장성 출신 대사들이 일어나 저런 한심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은 당장에 목을 쳐야 한다며 정보기관에 강의 내용을 전달했다. 이에 따라 박 국장은 치안본부에서 곤욕을 치렀고, 목이 날아갈 뻔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뒤 양담배는 개방되었고, 무역흑자에 대한 대책으로 정부가 앞장서서 수입확대에 급급한 상황으로 변했다.

1986년 처음 흑자가 났을 당시 경제부처는 흑자기조가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흑자규모에 대한 판단도 정확하지 못했다.

1987년초 환율과 수입개방정책에 관한 우리 정부와 IMF(국제통화기금) 협의단이 1주일이나 입씨름을 했다. IMF이대로 가면 87년에 80억 달러의 흑자가 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흑자를 줄이라고 요구했고, 우리측은 흑자가 5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측은 구체적인 자료를 들어가며 주장했기 때문에 그 논쟁에서 이기기는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IMF의 판단이 맞았다. 87년 경상수지 흑자규모가 IMF 추정치보다 훨씬 많은 99억 달러에 달했던 것이다.

앞서 5공화국 정부는 흑자를 줄이기보다는 외채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은 흑자축소가 불가피하다는 모 경제부처 장관 건의를 일축하고 흑자를 가능한 많이 내서 외채를 제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외채 축소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고, 정부도 대통령의 뜻을 좇아 국제수지 흑자를 외채 상환에 많이 썼다.

 

shutterstock 캡쳐
shutterstock 캡쳐

 

개발도상국 가운데 우량한 채무국인 한국이 외채를 갚겠다고 하자 채권은행들이 빚을 천천히 갚으라고 말리기도 했다.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동안의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정부는 흑자관리대책을 제대로 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사공일 당시 재무부 장관의 설명이다.“국제수지에 흑자가 나자 정부도 이 흑자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수 없었습니다. 6공화국이 들어서고도 흑자기조가 계속됐지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욕구가 분출하면서 흑자를 줄이거나 통화 절상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국제수지 흑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났다. 해외부분에서 발생한 통화팽창은 6공화국 정권 출범 초기부터 통제하기 어려웠고 이는 부동산투기, 증권투자, 과소비 등 거품경제로 이어졌다. 또 미국으로부터는 거센 원화 절상 압력을 자초했다.

미국 정부의 절상압력에 대해 6공화국 정부는 한국의 환율을 내리면 흑자를 줄일수 있지만 수입을 늘릴 여지가 줄어든다개방을 통해 수입을 확대하겠다는 논리를 앞세워 미국을 설득했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수입제한을 풀기는 했지만, 실제 수입확대로 나타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흑자는 자꾸만 불어났다.

결국 미국은 환율에 대한 통상압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목하고 공세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수입 개방을 내세워 보류해온 절상분까지 포함해 한꺼번에 환율을 대폭 절상하라고 요구했다. 이 무렵 대만정부가 달러에 대한 환율을 대폭 절상하는 바람에 정부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대만도 한국처럼 미국 정부로부터 환율 절상 압력을 받고 있었다. 정부로서는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어졌다.

국제금융회의가 있을때마다 미국측은 별도의 환율협상을 요구했다. 가능한 한 조금씩 들어주며 질질 끄는 게 최선의 대책이었지만, 협상때마다 한발짝씩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시간을 끌며 조금씩 풀어주었다고는 하지만 1980년대말에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는 상당폭으로 절상됐다. 88년 한해동안 원화의 대미 환율은 1달러당 79230전에서 68410전으로 10820(15.8%)이나 떨어졌다.

급격한 원화 절상에 따라 가격경쟁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자 기업들이 아우성을 칠 수밖에 없었다. 6·29 선언 이후 노사분규와 이에 따른 임금 상승에 시달리던 재계는 정부의 경상수지 흑자 관리 대책을 재고하고 원화 절하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내 891·4분기 들어 수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절상요구는 여전했다. 미국에 대한 수출물량이 줄었어도 달러로 표시되는 흑자는 계속됐기 때문이다.

수출을 늘리는데는 환율을 대폭 올리는 게 즉효였지만 환율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호되게 당한 터라 정책적으로 환율을 올린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미국 정부의 집요한 원화절상 요구에다 재계의 원화 절하 요구로 수세에 몰린 재무부는 시장평균환율 제도라는 묘안을 냈다. 정책적으로 환율을 움직이는 바스켓 제도로는 미국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고 차라리 시장에 맡겨 실세대로 가면 절하가 돼도 미국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당시 환율제도는 복수통화바스켓 관리방식으로 정부는 환율을 결정하는 공식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환율을 정책수단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지만 미국으로부터 절상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평균 환율제도는 자유변동환율제도의 전단계로, 외환시장에서 거래된 실적을 토대로 가중평균을 내서 이를 다음달 기준환율로 삼는 방식이었다.

시장평균환율제도는 904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후 미국은 우리나라 환율제도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절상압력이 사라진 것이 환율제도의 개편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장평균환율제도가 도입될 때 이미 우리나라의 국제수지는 적자로 돌아선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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