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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일본, 류큐 병탄하다…폐번치현 조치로 국왕 폐위, 오키나와 현으로 강등
비운의 류큐왕국 쇼타이왕…조공국 외면한 淸
2020. 02. 06 by 김현민 기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유신 주역들은 국가 체제를 어떻게 형성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다. 천황 중심의 체제를 형성한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지만, 쇼군(將軍) 체제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유신 3인방으로 꼽히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모두 사무라이 출신으로 쇼군이 될 자격이 없었고, 조슈(長州), 사쓰마(薩摩), 도사(土佐)의 번()도 유신에는 합심했지만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 유신 정권을 주도할 뚜렷한 세력이 없었다. 결국은 천황을 앞세우고 공화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준독립적인 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18683월 패배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가문의 영지를 천황에게 이양했다. 유신을 주도한 번의 영주들도 자신의 영지를 그대로 보유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번을 폐지하는 폐번(廢藩)이 고려되기 시작했다.

폐번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조슈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곧이어 18691월 유신을 주도한 조슈, 사쓰마, 도사와 히젠(肥前)의 번이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선포했다. 판적봉환은 다이묘(大名)들이 영지와 영민(領民)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조치다. 주도세력이 영지와 백성을 내놓자 다른 영주들도 대세에 휩쓸려 4월에는 전국 276명의 다이묘 중에서 118명이 판적봉환을 선언한다. 메이지 천황은 그 답례로 다이묘들을 영지의 지시(知事)로 임명하고, 세습권을 주었다. 그후 다이묘와 중앙 귀족들을 포함해 화족(華族)이라는 새로운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마침내 메이지 천황은 1871829일 폐번치현(廃藩置県) 조치를 전국에 선포했다. 다이묘들이 갖고 있던 번()을 폐지하고, ()이라는 새로운 행정조직을 재편하는 조치였다.

폐번치현은 왕정복고로 막부를 타도한 이후에 다이묘들의 권한을 빼앗는 제2의 쿠데타였다. 이 조치로 일본은 수백개의 영지로 쪼개져 있던 국토를 하나로 통일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의 독일과 이탈리아도 1871년 같은 해에 통일되었다. 수십개 또는 수백개의 지방영주 또는 왕국으로 갈라져 있던 세 나라가 동시에 통합국가를 실현하게 된 것은 세계역사에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양의 강자이자 선발 주자인 영국과 프랑스, 동양의 패자 중국에 대항하는 신생 통합국이 생겼다는 의미로, 이들 세나라가 2차 대전에 동맹을 체결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일은 아닐 것이다.

 

2019년 11월 화재로 소실된 슈리성 세이덴(正殿)의 모습 /김현민
2019년 11월 화재로 소실된 슈리성 세이덴(正殿)의 모습 /김현민

 

일본 열도 전역이 천황의 치하로 들어왔지만, 유독 이를 거부한 곳은 오키나와(沖繩) 열도에서 독립왕국을 유지하던 류큐(琉球)왕국이었다.

류큐 왕국은 앞서 임진왜란 때 조선과 도요토미 막부에 중립을 지켰다는 이유로 사쓰마 번이 1609년에 침공해 청()나라와 일본의 이중속국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 류큐 왕국은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18543월 미국의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이 흑선 함대를 이끌고 와서 막부에 통상협상을 요구한 다음에 오키나와로 내려가 나하(那覇) 항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막부는 이때 류큐는 멀리 떨어진 독립국가로서 일본은 나하항의 개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페리 제독은 막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페리는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은후 다시 흑선을 이끌고 나하로 왔다. 류큐왕국은 막부와 사쓰마의 허락을 받고 미국과 별도로 -류큐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왕국은 이어 1855년 프랑스, 1859년 네덜란드, 1860년 이탈리아와도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겉으로 류큐의 독립을 인정하는 듯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 본색을 드러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세력 가운데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사미치는 사쓰마 출신으로, 류큐왕국의 실정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사이고와 오쿠보는 유신이 성공한후 일본의 팽창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어디를 먼저 침공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달리했다. 사이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처럼 조선을 먼저 정벌하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오쿠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처럼 류큐를 먼저 내지화해야 한다는 류큐 병탄론을 펼쳤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사이고가 실각하고 오쿠보가 힘을 얻게 되었다.

18718월 메이지 정부가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를 발표한 후, 오쿠보는 류큐에 메이지유신 축하사절단을 도쿄로 파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아울러 류큐 국왕은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일본 귀족과 동등한 자격을 부며, 국왕을 번왕으로 격하한다고 통보했다. 류큐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박탈하고, 일본의 일개 번()으로 강등한 것이다.

 

류큐국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尙泰)왕. /위키피디아
류큐국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尙泰)왕. /위키피디아

 

당시 큐슈 왕국의 군주는 제2쇼씨(尚氏) 왕조의 19대 왕이이었던 쇼타이(尙泰)왕이었다.

아무리 힘 없는 왕이었지만, 쇼타이왕은 거부했다.

그러자 1875년초 오쿠보는 류큐 정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세 정승(삼사관)을 도쿄로 불러, 천황의 처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류큐의 정승들은 돌아가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자 그해 7월 오쿠보는 내무대신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했다. 마쓰다는 오쿠보의 심복으로, 독립국 류큐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데 총대를 맸다.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 /위키피디아
마쓰다 미치유키 /위키피디아

 

마쓰다는 류규국에 대해 10개 조항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말 것 류큐 번왕(국왕)이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을 금한다 메이지의 연호를 따를 것 일본 형법을 따를 것 내정개혁 청의 연호를 따르지 말 것 류큐 번왕의 섭정을 둘수 없다 중국 푸저우(福州)의 영사관을 폐지하고, 류큐의 무역을 일본 영사관 관할하에 둔다 번왕이 직접 도쿄로 와 천황을 알현한다 일본은 류큐에 군대를 둘수 있다.

한마디로 나라를 내놓으라는 얘기다. 이른바 마쓰다 10개 조항이이 공포되자 류큐 주민들이 격분했다. 슈리성의 백성들은 마쓰다가 머무는 숙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즉시 류큐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마쓰다는 두달여 류큐에 압력을 넣었지만 의외로 강한 저항을 받아 도쿄로 돌아왔다. 일본정부는 곧바로 류큐 선박이 중국에 가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쇼타이왕은 6살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버지 쇼이쿠(尙育)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는데, 형이 일찍 사망한데다, 부왕이 급서하는 바람에 국정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등극했다. 그는 어려서 보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무는 정승들(삼사관)에게 맡겼다. 일본이 나라를 집어심키려고 할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쇼타이왕으로선 의지할 곳이 중국 밖에 없었다. 450년간 조공을 바치며 모셔온 중국이 일본으로부터의 압력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쇼타이는 청나라에 밀사를 보내기로 했다.

187612월 세명의 밀사를 태운 배가 푸젠(福建)성으로 떠났다. 밀사는 쇼 토쿠코(向德宏), 린 세이코(林世功), 사이 타이테이(蔡戴程) 3인이었다. 이들을 실은 배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몇 달째 동중국해 바다를 헤메다가 19774월에 중국 해안에 도착해 푸젠성 순무에게 일본이 조공을 방해하고 류큐를 지배하니, 청나라가 이를 막아달라는 내용의 국왕의 밀서를 제출했다. 류큐왕의 밀서는 곧바로 청 조정에 전달됐다. 당시 청의 실세는 이홍장(李鴻章) 북양대신이었다.

이홍장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중국의 주적(主敵)은 러시아였다. 청국은 가까스로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력 소모가 심했고, 러시아가 흑룡강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양무운동파는 외부와의 전쟁보다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일본은 바다 건너의 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 300년 가까이 직접적인 위협이 약했다. 오히려 집권세력 내에선 일본과 연대해서 러시아에 대항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그들에겐 국토는 육지를 의미했고, 지상에서의 방어만을 생각했다. 바다건너 조공국 류큐를 구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홍장의 결론은 류큐 포기였다. 앞서 일본의 대만 침공에서도 청나라는 해상에서의 세력방어에 속수무책임을 보여주었다.

 

세 밀사가 상국 청나라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들은 한편으론 배신감을, 다른 한편으론 절망감을 느꼈다. 쇼와 린은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승으로 변장해 북양군의 본진이 있는 텐진(天津)으로 갔다. 그들은 이홍장의 관저 앞에서 꿇어 앉아 혈서를 썼다.

류큐 신민들은 살아서 일본인으로 살수 없고, 죽어서 일본의 귀신이 될수 없습니다. 대청제국은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주십시오.”

두 밀사는 단식을 하면서 멸망의 위기에 있는 나라를 구해달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울부짖었지만, 이홍장의 관저의 대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일주일째 되던날, 린 세이코는 머나먼 남쪽 나라 류큐 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후 단도를 꺼내 자결했다.

(을사늑약 이후 1907년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 명의 밀사를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회회의에 파견해 주권회복을 호소했지만, 어느 나라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준 열사는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순국했다. 류큐 밀사의 모습은 30년후 조선이 겪을 모습을 미리 보여 준 것이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다. 1879311일 메이지 천황은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전환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일본인이 쓴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쇼타이왕의 퇴위일은 이날이다.

이어 일본 정부는 마쓰다 미치유키를 류큐 처분관으로 임명해 500명의 군사를 주어 류큐로 급파했다. 마쓰다가 류큐에 도착한 날은 327. 일본군은 무력으로 슈리성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고 포고했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왕 쇼타이와 왕자를 비롯, 왕족들을 도쿄로 압송했다. 이로써 450년 류큐왕국은 종언을 고했다.

쇼타이는 330일까지 류큐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527일 수행원 96명과 함께 오키나와를 떠났다. 617일 도쿄 황궁에서 메이지 천왕을 접견한 이후 그는 도쿄에서 사실상 유폐됐다.

류큐 왕족들은 일본 귀족(華族)으로 편입돼 쇼타이는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고, 도쿄에서 류큐 국왕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1901819, 그는 58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슈리의 쇼씨왕가 무덤 타마우둔(玉陵)에 묻혔다. 일본 정부는 류큐 왕실의 전통 절차에 따라 2년간 그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게 허용했다.

 

오키나와 타마우둔(玉陵)에 있는 쇼타이왕의 무덤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타마우둔(玉陵)에 있는 쇼타이왕의 무덤 /위키피디아

 

쇼타이왕의 폐위와 류큐국 병탄은 일본이 제국주의 팽창을 시도하는 과정의 첫걸음이었고, 그 다음 순서는 조선이었다. 임진왜란 때와는 반대방향이다. 300년전 일본은 조선을 먼저 침공해 실패한 연후에 류큐를 침공했지만, 이번엔 그 역순을 선택했다. 손쉬운 곳을 먼저 먹은 다음에 보다 큰 것을 먹고, 그다음은 만주, 중국 본토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열도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열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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