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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도 “금리안정” 돈 많이 풀다 실패…긴축 선회, 본격적인 고금리시대 진입
노태우 시절⑦…금리 자유화 논란
2020. 02. 07 by 김현민 기자

 

199211월 하순 서울 삼청동의 한 안가.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이진설 청와대 경제수석, 이용만 재무장관, 조순 한은 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금리 문제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이용만 장관과 조순 총재는 당시 첨예하던 금리 문제에 대해 서로 견해를 달리 했기 때문에 회의 분위기는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관은 한은 재할인 금리와 은행의 여수신 금리등 규제금리를 인하, 실제금리 하락의 심리적 저항선을 낮추자는 주장을 해왔다. 이에 비해 조순 총재는 실제 금리가 떨어져 규제금리와의 격차가 좁혀진 만큼 이미 예정된 2단계 금리자유화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면서 이 장관과 견해를 달리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최각규 부총리가 거중조정에 나서 이 장관과 조 총재의 견해차를 좁히고 중재를 하는 입장에 섰다. 이날 안가 회의에서는 일단 규제금리 인하계획을 철회하고 실세금리 인하에 주력하는 한편 규제금리와 실세금리의 격차가 좁혀지면 2단계 금리자유화를 빠른 시일안에 단행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무부와 한은의 서로 다른 입장을 절충하자는 게 이날 회의의 목적이었지만 사실상 한은의 판정승으로 결론지어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나기까지에는 최 부총리의 역할이 컸다. 최각규 부총리 자신은 이미 2단계 금리자유화를 여러번 언급하는 등 금리자유화를 선호했고, 그 무렵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같은 방침을 재확인해 놓고 있었다. 게다가 경제기획원 출신인 이 수석도 금리자유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용만 재무장관도 세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차기 대권주자를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 시즌. 선거를 앞둔 집권여당은 규제금리 인하라는 가시적인 정책을 보이게, 보이지 않게 정부측에 요구하고 나섰다. 게다가 거품경제가 사그라들면서 경제성장률이 계속 둔화되고 있었다. 2단계 금리자유화는 정권 말기라는 상황 여건 속에 더 이상 추진력을 앓고 다음 정부의 손으로 넘겨지고 만다.

금리자유화는 6공화국 전반에 걸쳐 논란을 거듭해온 경제현안이었다. ‘자유화라는 순리와 경제 상황이라는 역리가 엇갈리는 가운데 미국의 금융시장 개방압력이라는 외부적 여건이 작용하면서 지루하게 끌어온 주제였다.

 

그러면 6공화국 5년 동안 끊임없이 제기된 금리자유화 문제를 정리해 보자.

금리자유화에 대한 구상은 5공화국 말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무부 관리들 사이에는 금리를 더 이상 정부에서 주무를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5공 말에 경제수석에서 재무 장관으로 부임한 사공일 장관은 개인적으로 금리자유화를 선호한 학자였다. 국제화·개방화의 조류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자유화가 불가피하다는 게 그의 평소 소신이었다. 그러나 장관 스스로도 은행에 잔뜩 짐을 지워 놓은 상태에서 금리를 비롯한 금융자율을 제기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장 개방의 파고는 거세게 밀려들어 오고 있었고, 우리 은행도 국제경쟁에서 이겨 나가려면 시장 기능을 익혀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공일 장관은 틈만 나면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부하 직원들에게 털어 놓았다. 재무부 내에 금리자유화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장관만이 아니었다.

1987년말 윤증현 금융정책 과장과 실무자 몇 명이 대출 및 예금금리를 결정하기 위해 여관방에 들어앉아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인위적인 방식으로 언제까지 금리를 결정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금리자유화라는 방안을 생각하게 됐다. 3저 현상으로 해외 부문에서 터져 나오는 통화증발을 통화채로 흡수하는데도 한계가 있었고, 금리라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가도 안정됐고 국제수지도 걱정할 바 아닌 여건이었다. 그런 만큼 자유화를 단행해서 일시적으로 금리가 오르더라도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윤증현 과장과 실무자들은 이같은 복안을 백원구 이재국장에게 건의했지만 백 국장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그렇지만 사공일 장관은 평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재무부 내에서조차 제기되자 이들을 불러 구체적인 추진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금리 자유화 문제는 5공화국 말과 6공화국 초를 거쳐 구상단계에서 구체적인 방안 마련으로 전환된다.

금리자유화에 대한 반대는 한은에서 제기됐다. 한은은 금리자유화를 위해 돈을 풀수도 있다는 재무부의 주장에 대해 통화의 신축적 운용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한은과의 협의가 어려워지자 재무부는 문제를 아예 공론화해서 한은을 어쩔수 없게 만든다는 전략을 세웠다. 공론화의 장소는 주로 금융발전심의회 은행분과위원회. 당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박제윤 서울대 교수가 맡고 있었다.

박 교수는 금리자유화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한은의 반대 분위기를 삭이고 자유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금리 자유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됐지만, 남은 것은 일시적인 금리 상승에 대한 우려였다. 금리 상승을 막자면 돈을 풀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은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금발심에서 오랜 토론 끝에 통화의 신축적 운용에 의견이 모아졌다. 장관은 넉넉 잡아 총통화의 1% 범위 내에서 통화를 신축운용하면 3개월 내에 금리가 안정될 것이라며 한은을 설득해 나갔다.

198811월말 사공일 장관은 자신만만하게 금리자유화 계획을 발표한다. 금리자유화 조치는 당초 예정대로 125일부터 실시에 들어갔다. 1·2 금융권의 모든 대출금리가 자유화됐고, 수신 금리도 2년 이상 장기예금과 2금융권의 단기·장기수신, 실적배당금·금융채·회사채의 발행금리 등의 규제가 풀렸다.

그러나 금리 자유화를 추진하던 장관은 금리가 자유화되던날 개각으로 물러났다. 후임으로 이규성 장관이 부임하고 석달만에 기세좋게 추진되던 금리자유화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무역수지 흑자에서 발생하는 통화팽창이 물가 불안을 자극했고,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춤추듯 뛰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규성 장관으로서는 일시적으로 돈을 풀어 금리자유화를 추진하기보다는 통화긴축이 급선무였다. 이 장관에 이어 정영의 장관도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초긴축 정책을 들고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도 고금리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표시했고, 재무장관으로서 물가가 불안한 시기에 통화를 방만하게 운용해서는 안 된다며 실무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정영의 장관은 마침내 1990628일 단자회사의 대출금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시중 실세금리를 1% 포인트 내리도록 조치를 내렸다. 이 조치는 당시 상황으로 성공할수 없는 정책이었다. 실세금리란 말 그대로 규제할수 없는 금리인데다 돈을 풀지 않으면서 실세금리를 힘으로 누를수는 없는 여건이었다. 한달 정도 실세금리가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이내 반대로 돌아섰고 변칙거래만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정책실패가 정 장관으로 하여금 금리자유화로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이 무렵 미국측은 한미 귬융협상 등을 통해 금리를 포함한 금융자율화에 대해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6공화국 초 쌀 개방문제로 청와대까지 나서 미국측의 분노를 달래야 할 정도였던만큼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재무부로서는 외국인에 대한 주식투자도 개방한 마당에 금리를 언제까지 묶어둘수는 없었다.

재무부는 정 장관의 지시도 있었던 만큼 한미 금융협상이 끝난후 구체적인 금리자유화 일정을 발표한다는 계획 아래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래서 918월 재무부는 97년까지 4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단계적으로 금리를 자유화한다는 내용의 방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정 장관에 이어 이용만 장관이 6공화국 마지막 장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현실에 입각해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미국의 압력이 어떻든 간에 행정력을 동원해서라도 실세금리를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관에 부임하기 앞서 금융기관에 몸담았던 이 장관은 금리자유화가 오히려 금리 상승을 부추길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실세금리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은의 조순 총재가 이 장관의 규제금리 인상 주장에 반대하면서 2단계 금리자유화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나섰다. 6공 초기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921111일 서울 팔레스 호텔. 이용만 재무장관과 조순 한은 총재가 만났다. 두 사람은 당시 첨예하던 금리문제로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입장이어서 분위기가 어색했다. 그러나 이 장관과 조 총재는 금리의 하향안정을 위해 급격한 통화긴축은 피한다는 원칙에 합의, 애써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며칠후인 1120일 이 장관은 한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할인금리 인하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마침 해외출장중이던 조 총재가 귀국하자마자 기자회견을 갖고 재할인금리 인하에 반대한다고 공표, 금리 논쟁이 가열됐다.

최각규 부총리가 나서 이 장관과 조 총리를 중재하면서 조 총리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당시는 선거상황이었다. 선거 날짜가 다가오면서 민자당의 황인성 정책위 의장과 박제윤 경제특보가 이 장관과 조 총재에게 금리인하를 요청했다. 최 부총리는 물론 조 총재도 정치논리를 수용하지 않을수 없었다. 2단계 금리자유화의 조기실시는 이렇게 해서 물 건너가고 새로 출범한 정권에 바통을 넘겨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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