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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평화 대가 내라” 압력에 의료지원단 파병, 5억 달러 전비 부담
노태우 시절⑧…걸프전 비용 분담
2020. 02. 10 by 김현민 기자

 

19908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이 발발했다. 다음해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의 반격이 개시됐다. 다국적군은 반격 개시 한달여만인 912월말 쿠웨이트를 탈환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20세기초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세계사의 주도권을 쥔 미 합중국은 세기말 전쟁에서도 여전히 초강대국임을 입증했다.

걸프전은 첨단 병기의 시험장이었고, 석유를 둘러싼 국제적인 경제전쟁이었다. 세계의 경찰임을 자부하던 미국은 더 이상 전쟁을 단독으로 수행하지 않고, 막대한 전비를 석유 소비국들에게 전가했다. 우리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걸프전에서 우리 정부는 5억 달러의 전비를 부담했다.

 

걸프전 발발 20여일 후인 1990828.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토로 3해병비행단. 대한항공 소속 점보화물기가 활주로를 비상했다. 방향은 사우디아라비아. 내용물은 미군의 전쟁물자였다. 토로 부대에 소속된 KAL기는 외국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사막의 방패작전에 참가한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전비 부담을 요구한 것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직후부터였다. 중동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미국 정부는 전쟁이 개시될 경우 하루에 10억 달러씩 소요되는 막대한 전비를 일본·서독 등이 부담하도록 요구했고 한국정부에도 그러한 요구를 했다.

서태 발발 직후인 89일 정부는 강영훈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열고 유엔 안보리가 결의한 이라크에 대한 국제적인 경제제재 조치에 동참하기로 결의했다. 정부는 이날로 이라크·쿠웨이트와의 원유수입 금지 상품 수출 및 수입 금지 건설공사 수주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이라크 금수조치를 즉각 시행했다.

중동사태가 발발하자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침공한 이라크와 침공당한 쿠웨이트는 원유 주수입국이었고, 그곳에 우리 건설업체들이 나가 공사를 진행 중에 있었다. 이라크의 침공을 제재하려는 요구에 따르지 않을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라크와 외교관계를 단절할수도 없었다.

외무부는 공식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결의하기에 앞서 이라크 정부에 그 배경을 설명하는등 줄타기 외교를 벌이려고 했다. 경제제재 조치 결의직후 유종하 외무 차관이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전달됐다.

이번 조치로 우리의 경제적 피해가 예상되나 유엔 결의가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회원국과 같은 입장에서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교민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우리나라가 특별히 이라크에 비우호적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이라크에 설명했습니다. 비상사태에 대비, 양국 대사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기로 했습니다.”

 

미국 정부의 요구는 대이라크 금수조치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페르시아만에 주둔하느 S 미군의 비용을 한국이 부담할 것을 요구해 왔다.

821일 박동진 주미대사는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솔로몬 차관보는 한국 정부가 무역금수 조치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처럼 군사적인 제재도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비슷한 시기에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브루킹스 연구소 공공정책센터 소장인 로런스 코브씨도 뉴욕타임스지 기고를 통해 한국 정부에 대한 군비 부담을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사우디에 지상병력 10만명과 4척의 항공모함을 포진시키는데 하루 2,000만 달러가 소요된다이를 미국이 혼자 부담할 것이 아니라 걸프 지억에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일본등도 분담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역금수 조치 정도로 대이라크 제재조치를 마무리하려 했던 우리 정부는 미군의 군비를 부담하지 않을수 없었다. “너희 나라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중동 평화의 반사 이익을 얻으려 하는가라는 미국측 논리를 무시할수 없었다.

외무부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우리 비행기와 배로 미군의 군수물을 실어나르면서 걸프전의 미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에 취항하는 항공사는 대한항공 밖에 없었으므로, 대한항공의 화물기가 선정됐다. 그런데 탱크·야포등 중량화물은 항공기로 수송할수 없고, 선박을 이용해야 했는데, 현대상선·한진해운등 국적 해운회사의 선박 가운데 자동차수송선(카캐리어)이 선정됐다. 해운항만청의 백옥인 외항과장은 이를 위해 수차례 워싱턴을 방문해 미군이 필요로 하는 선박을 골라야 했다. 물론 항공기와 선박 운항에 대한 비용은 정부가 부담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미군과 물자수송을 협의했던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국제선 중에서 파나마에 등록한 우리 배를 페르시아만 작전에 참가시키고 한국국적 배는 투입시키지 않았습니다. 파나마에 등록한 배는 태극기를 달지 않고 운항하기 때문에 이라크 군이 포격을 할 염려가 없는데다 우리 정부가 걸프전에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1990년 걸프전 참전국 /위키피디아
1990년 걸프전 참전국 /위키피디아

 

미군 물자 수송을 통해 걸프전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미국의 전비 부담 요구를 멈출게 할 수는 없었다.

조지 부시(아버지) 미국 대통령도 중동 전비 분담금을 거론하면서 일본·서독과 함께 한국을 지칭했다. 부시 대통령의 언급은 거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행으로 나타났다.

97일 니콜라스 브래디 미국 재무장관이 특사 자격으로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방한했다. 브래디 특사는 노 대통령을 접견하면서 부시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안보 면에서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가능한 군비를 지원하겠다고 밝히면서 구체 사항에 대한 협의를 외무부에 맡겼다.

917일에는 드세이 앤더슨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일행이 최호중 외무부 장관을 방문, 군비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45,000만 달러의 현금 지원을 우리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 40억 달러의 군비 지원을 요청했던 만큼 한국 정부도 그 정도는 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 장관은 국제사회의 규범과 안보 상황을 감안, 능력 범위 내에서 분담금을 낸다는 방침이나 때마침 당한 서울·중부지방의 수재로 경제가 어려운 만큼 분담금을 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924일 정부는 미국과의 협의 결과, 다국적군의 유지경비 12,000만 달러, 주변 피해국에 대한 재정 지원 1억 달러등 도합 22,000만 달러의 현금 및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측도 우리 제의에 수긍을 햇다.

그리고 페르시아만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젠 남의 일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1027일 외무부 유종하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조사단이 중동에 급파됐다. 터키·요르단등 페르시아만의 전선을 방문하면서 다국적군의 지원 내역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한국측이 제시한 경제적 지원에 만족하지 않고 정규군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해왔다. 페르시아만에 전운이 감돌면서 미국은 전쟁을 구체화해 나갔고, 군비 부담 뿐 아니라 병력의 지원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해를 넘겨 911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종구 국방장관은 군 의료지원단의 파견을 구체화하겠다고 밝혔고, 다음날인 5일 서울 삼청동 모처에서 서동권 안기부 장관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관계장관회의에서 100여명의 군의료진을 파견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정부로서는 더 이상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한 고육책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정부가 정규군을 피해 군의료진으로 파견한다고는 했지만 의료진 역시 정규군의 일부였다. 베트남전 파병 이래 두 번째 파병이었다. 야당의 군의 걸프전 참전을 반대, 걸프전 파병 문제는 정치 쟁점으로 비화됐다.

정부와 여당은 미국의 군비부담 요구를 22,000만 달러로 줄이면서 정규균의 군사적 개입 대신에 인도적 차원의 의료진을 파견하는 것이라고 방어진을 쳤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등 야당은 베트남전에서처럼 의료단 파견이 본격적인 정규군 파견으로 확대되고 자칫하다가는 아랍민족주의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다국적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분비 부담을 증액하고 군사적 지원을 늘릴 것을 또다시 요구해왔다. 130일 정부는 다국적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송기 파견과 28,000만 달러의 추가지원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미국의 끈질긴 요구로 한국은 전비는 전비대로 물고 비록 보병은 아니었지만 푸른 제복의 의료진까지 파견해야 했다.

걸프전은 세계의 움직임에 우리가 더 이상 제3자로 남아 있을수 없음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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