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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개화파, 청의 속국 상태 벗어나 독립추구…민씨일파, 청 보호하에 동도서기론
개화당과 사대당의 이념정당, 정변으로 치닫다
2020. 02. 15 by 김현민 기자

 

1884124일 밤 10시부터 6일 저녁 6시까지, 날수로는 3, 시간으로는 이틀이 채 안되는 44시간의 짧은 갑신정변(甲申政變)‘3일 천하라 불린다. 천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 주모자들은 고종 임금을 인질로 삼아 창덕궁에 웅크리고 일으킨 변란이다. 조선의 개념으로는 역모였고, 현대의 개념으로는 불발 쿠데타였다.

 

주모자의 한사람인 박영효는 4년후인 1888년 망명지인 일본에서 고종에게 올린 건백서(建白書)란 상소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옛일을 생각하건데, 서인·남인·대북·소북의 분당이 있어 서로 논박해 배척하고 반역의 이름을 뒤집어 씌워 서로 살육했습니다. 그런데 전일의 당()은 국체와 상관된 것이 없었으므로, 붕당(朋黨)이라 해도 마땅합니다. 몇해 전에 이르러 당파가 취신자립(就新自立)과 수구의뢰(守舊依賴)의 두 개로 나뉘었습니다.

신들이 나라의 형세가 급박해짐을 보고 헛되이 시일을 보낼수 없다고 하여, 조급히 부흥을 도모하고자 잔혹망상한 거사(殘酷罔狀之擧)를 감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국체에 관계되는 것이 크므로 정당(政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수많은 파벌 싸움, 당파 싸움, 족벌 싸움이 있었지만, 박영효의 주장처럼 갑신정변을 전후로 처음으로 이념을 앞세운 정당이 만들어 졌다고 할수 있다. 새로운 이념정당의 실험은 상국(上國)의 군대가 주둔하고 군주제의 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폭력을 통해 이념을 실현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민주주의 토양이 없는 사회에서 이념 갈등은 곧바로 폭력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대해 많은 분석이 나와 있다. 사학자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개화세력의 무모한 실력 행사 청군의 신속한 개입과 압도적 군사력 일본군 이용에 대한 반발 고종의 지지 확보 실패 국제정세에 대한 오판 민중의 반발 등을 꼽을수 있다.

무엇보다 힘의 균형에서 개화파가 절대적으로 약체였다. 청나라는 15백명의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켰고 개화파들이 끌어들인 일본군은 150명에 불과했다. 개화파는 조선군을 끌어들이는데도 실패했다. 개화파가 동원한 병력은 군인 70, 일본 군사학교에 유학했던 사관생도 14, 장사 30여명 등 1백여명이 고작이었다.

 

갑신정변 때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된 창덕궁 낙선재 /문화재청
갑신정변 때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된 창덕궁 낙선재 /문화재청

 

이런 작은 집단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방법은 정적을 살해하고 군주를 납치하는 길이었다. 조선조에 중종반정(1506)·인조반정(1621)에서는 이 정도의 병력으로 왕을 교체했다. 하지만 갑신정변 시기에는 국내에 주둔한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소수의 역모로 정권을 교체하기 어려웠다. 또한 앞서 두 반정에서 국왕의 패악이 심했기 때문에 왕권교체에 대한 지배층과 민중의 반발이 없었지만 갑신정변에서는 민중들이 개혁파를 지원한 일본인을 죽이고 그들의 집과 상점을 방화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 모든 면에서 개화파는 처절하고도 완벽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개화파의 쿠데타는 구습에 온존하고 외국군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하는 고종과 민씨 척족에게 큰 충격을 줌과 동시에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백성들에게 전파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수 있다. 서재필은 당시 상황에 대해 급기야 황제와 그 일족을 강제로라도 궁정 내의 썩어 문드러진 주위로부터 구출해 내서 모든 인습과 폐풍을 개혁하기 위한 새로운 칙령을 내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회고했다.

 

개화의 사상은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서 싹튼다. 박규수의 사랑방 제자였던 김윤식,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 뒷날 개혁파의 중심이 된다. 그들은 개국(開國)을 통해 나라의 문호를 열고, 개화(開化)를 통해 근대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옥균 /위키피디아
김옥균 /위키피디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가 주둔하면서 민씨 일파가 다시 정권을 잡고 상황이 개화파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대원군이 청에 압송되고 위정척사파들이 위축되는 시기에 민씨 일파도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화파와 민씨 일파의 개혁 강도와 속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민씨 일파는 청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받아들여 서양의 무기와 기술은 받아들이되 전통적인 가치관과 윤리, 도덕 체계는 유지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해 개화파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급격한 개방을 주장했다. 개화파도 당시 군주제를 철폐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두 세력의 논점에 결정적인 차이는 중국, 즉 청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였다. 민씨 일파는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권력을 향유했고, 개화파들은 조선-청 간의 조공관계를 허물어뜨리고 중국의 화이질서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화파들은 청의 속국인 조선을 독립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화파를 독립당이라고도 하고, 민씨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는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민씨 일파의 핵심세력으로 깁신정변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된 민영익(閔泳翊)도 당초 개화파들과 생각이 같았지만,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으면서 수구파로 돌아선 케이스다. 결국 개화당와 민씨일파의 사대당은 청군의 주둔으로 조선의 국체를 논하는 단계에서 갈라졌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가 한달전쯤, 개화당의 윤치호가 사대당의 민영익을 만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민운미(閔蕓梶, 민영익)가 나에게 묻기를, ‘근래에 독립을 이룰수 있는 기회가 있는가라고 해였다. 대답하기를 공은 어찌 이와 같이 묻는가. 우리나라가 미·영 등 여러나라들과 조약을 맺은 날부터 곧 독립국이 된 것이다. 세상에 어찌 속국과 더불어 평등한 조약을 맺을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윤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윤미가 이와 같이 묻는 그 뜻을 가히 알수 있다. 그것은 개화당이 새로운 것을 일으키고 옛 것을 고쳐 항구적인 독립을 도모하는데 뜻을 두고 있으니, 윤미가 이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이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동원한 3천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조선의 외교권만이 아니라, 군사권, 내정권까지 장악했다. 청은 조선에 영사 재판권을 설정하고 인천에 중국전관조계를 두었다. 청국은 마건충(馬建忠)을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보내 조선이 수교한 서양국가에 사절을 파견하거나 차관을 제공받지 못하도록 간섭했다. 도 청은 군사제도를 개편해 친군영을 세우고 위안스카이(袁世凯)가 군대를 훈련토록 했다.

 

갑신정변 당시 25세의 나이에 불과했던 위안스카이는 특유의 감각으로 청군을 지휘했다. 조선 주둔 청군이 정변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사건발생 다음날인 115일 새벽이었다. 청군 지휘관인 오조유(吳兆有)이 본국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위안스카이는 본국에 보고도 하기 전에 군대를 동원했다. 당시 서울과 텐진, 도쿄가지 전신선이 가설되지 않아 가장 빠른 보고는 배편으로 해야 했는데 아무리 빨라도 1주일 이상 걸렸다. 청의 직예총독 이홍장(李鴻章)이 정변 소식을 보고받은 때가 발생 5일후였다.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갑신정변을 실패로 귀결시킨 것은 위안스카이의 순발력, 돌파력이었다고 할수 있다. 만일 상관인 오조유의 생각대로 청군이 본국의 명령을 기다렸다면, 아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승승장구해 직예총독, 중화민국 초대 총통과 황제가 된 것도 조선 땅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에서의 무공 덕분이었다.

 

갑신정변의 신호탄이 올라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우정총국 /문화재청
갑신정변의 신호탄이 올라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우정총국 /문화재청

 

갑신정변은 현재 조계사 자리에 있는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담장 밖 불길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주동자들은 가장 먼저 민씨 일파의 핵심인 민영익을 쓰러뜨렸다. 주동자들은 창덕궁 금호문을 통과해 침전에 이르러 고종 임금에게 급히 변고를 아뢰고 시급히 옮기어 변고를 피하도록 진언했다.

이에 고종이 요금문을 통해 지금의 현대 계동 사옥 뒤편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급히 옮겼다.

다음날인 125일에 고종은 종친 이재원의 집 계동궁으로 이어(移御)했다가 청나라와 내통한 명성황후가 경우궁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5시경 관물헌으로 들어갔다.

개화당이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협소한 관물헌을 이용해 소수의 병력으로 위안스카이의 청군(淸軍) 공격을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고 창덕궁을 작전본부로 삼았다. 이날 저녁 김옥균 주도하에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제정하고 공포한 후 서울 시내 곳곳에 게시했다.

 

위안스카이가 청군을 동원한 시기는 사건 발생 이틀후인 126일 오후 4시경이었다. 12백여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창경궁 쪽 선인문과 돈화문으로 밀고 들어왔다. 개화당과 일본군의 연합군사 200여명이 전투를 치렀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오후 6시경에 고종은 창덕궁 후원 연경당으로 다시 옥류천 뒤 북쪽 궁장문인 건무문을 거쳐 군인들의 호위를 받아 성균관이 있는 관우의 사당인 북묘(北廟)로 향했다.

1차 방어선은 쉽게 허물어졌다. 2차방어선을 구축했던 일본군은 싸움 한번 변변히 하지 않은 채 도망치기 바빴고, 남은 것은 개화당의 50명의 병사와 몇 안되는 사관생도로 구성된 내위뿐이었다.

싸울 의지를 잃은 일본군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모두 함께 건무문 쪽으로 해서 궁을 떠났으나 홍영식등 생도 7인만이 뒤따라 북묘로 가 고종의 어의(御衣)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홍영식을 뿌리치고 사인교에 타고 떠나버렸다. 그 자리에 남아있던 홍영식과 박영교 등 생도 7인이 청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몇몇은 겨우 몸을 빼내 도주하면서 급진개혁파들이 시도했던 근대국가 건립의 희망은 3일만에 막을 내렸다. 혁명 당시 김옥균읜 34, 홍영식은 30, 광법은 26, 박영효는 24세였다.

 

충남 아산시 영안면 아산리 소재 김옥균선생 사당/문화재청
충남 아산시 영안면 아산리 소재 김옥균선생 사당/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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