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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고종, 부국강병 힘쓰지 않고 미국-러시아 외교에 주력…청의 압박에 실패
청의 속국, 잃어버린 자주성…수난의 조선 외교
2020. 02. 16 by 김현민 기자

 

갑신정변이 불발로 그친후 청국과 일본국은 자기네들끼리 사태 수습을 위한 회담을 벌였다. 당사자인 조선은 끼워주지도 않았다. 일본측 대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청측 대표는 이홍장(李鴻章)이었다. 두 대표는 1885418일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골자는 조선에 주둔한 양국군이 철수한다 중일은 조선의 군사를 훈련시키지 않는다. 조선은 다른 나라의 무관을 고용해 군사를 훈련시킬수 있다 조선에 변란 또는 중대한 사건이 생겨 양국중 한나라가 군사를 파견하려 하면 서로에게 통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청군과 일본군은 그해 521일 동시에 철수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凯)도 청국으로 돌아갔다.

 

이제 조선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고종으로서는 조선군을 근대화하고 강군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청과 일본이 무슨 빌미를 잡고 군대를 파견한다면 주권을 수호할 군사력을 양성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은 그럴 혜안이나 추진력이 없었다. 청과 일본이 비운 자리를 또다른 강대국, 즉 러시아와 미국을 기웃거리며 약자가 써서는 안 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외교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청과 일본군이 철군한후 청일전쟁이 벌어지는 1885~1894년 기간은 조선에게 잃어버린 10이 되어 버렸다. 고종은 이 시기에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쓰지 않았다.

 

전남 여수시 거문도의 영국군 묘 /여수시
전남 여수시 거문도의 영국군 묘 /여수시

 

이토와 이홍장이 텐진조약을 마무리할 무렵인 1885415일 영국국함 4척이 제주도와 남해안의 중심에 있는 거문도(巨文島)를 일방적으로 점령했다. 그들은 그 섬을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영국군 주둔 규모는 200~300명이었고, 군함도 5~6척 기항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영국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청의 이홍장은 러시아 공사로부터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전해줌으로서 영국군은 2년후인 18872월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기 전후로 조선은 러시아와 접촉하고 있었다.

조선은 188477일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청의 이홍장은 조선에 미국·영국·프랑스·독일과 통상조약을 맺도록 주선하면서도 러시아만은 소개하지 않았다. 이에 텐진에 주재하던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는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해상무역 뿐아니라 육상 무역에 관한 규정도 추가해 조약을 맺자고 요구했다. 조선은 육로 통상을 거부했다. 독일인 외교고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중재에 나서 육로 통상을 뒤로 미룬채 조선-러시아 사이에 수교조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은 김홍집이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을 올렸을 때만해도 러시아 경제정책에 공감했다. 조선책략에 위정척사파들이 극렬히 반대했지만 고종은 김옥균 등 개화파를 아끼며 개방을 서양국가와 수교를 했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주둔하며 간섭이 심해지자, 청이 전해준 조선책략의 저의를 의심하게 된다. 고종은 청이 조선을 지켜줄 역량이 없으면서 간섭만 하려는 것에 불만을 터트리며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청을 견제하는 방법일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파울 묄렌도르프와 오웬 데니 /위키피디아, 국사편찬위원회
파울 묄렌도르프와 오웬 데니 /위키피디아,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의 변심에 묄렌도르프의 역할이 컸다. 묄렌도르프는 임오군란을 진압한후 청의 이홍장이 외교 능력이 없는 조선을 위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다.

그는 프로이센 브란덴브루크 출신으로 할레대학에서 법학, 언어학, 동양어를 공부하고 청국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다가 이홍장의 눈에 띠었다. 그는 조선의 생활에 완전히 빠져들어 수염도 기르고 조선관리의 정복을 입고 다녔다. 조선식으로 목인덕(穆麟德)이란 이름도 썼는데, 조선인들은 그를 목참판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다지 능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고종은 그를 조폐를 담당하는 전환국을 맡겼는데, 조선의 재정 확보를 위해 당오전(當五錢)을 찍어내자고 주장해 인플레이션만 유도한 결과를 빚었다. 또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조선의 개방을 추구하면서도 개화파들을 증오했다.

묄렌도르프는 청의 의도와 달리 조선을 자주국으로 보았다. 조선은 청에 조공만 할 뿐 내정과 외교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와 수교를 주선했다. 이홍장은 자신이 파견한 인물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18847월 묄렌도르프를 중국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그는 이홍장을 설득해 다음달 조선으로 다시 부임했다.

 

갑신정변이 진압되자 고종은 두가지 루트를 통해 러시아와 접촉했다.

첫째는 18851월 김지성(金智性)을 몰래 블라디보스톡에 파견해 러시아 연해주 총독과 접촉하게 했다. 요구사항은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해 조선 연해를 보호하고 조선 군대를 훈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김지성은 밀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청국 길림성 훈춘(珲春)의 관리에게 포착되어 이홍장에게 보고되었다. 이홍장이 다그치자 고종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소인배가 국왕과 대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일이라고 변명했다.

고종은 또 그해 2월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보내 주일 러시아공사관 스페이어 서기관과 만나 군사교관 파견 문제를 협의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측 스페이어(Speyer, A. de) 서기관을 만나 밀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묄렌도르프와 스페이어 사이에 체결된 밀약의 골자는 3국이 조선을 침략할 때에 러시아가 군사력을 동원해 보호한다 러시아는 대신을 조선에 주재시킨다 조선의 해역은 러시아 군함이 방위한다 양국은 육로로 통상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스페이어는 6월에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해 김윤식(金允植)을 만났는데, 김윤식은 자신도 모르는 내용이라며 거절했다. 친청파인 김윤식은 그 내용을 청국에 누설했다.

 

고종이 몰래 러시아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청의 이홍장은 노발대발했다.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즉각 소환해 청국으로 불러들이고, 러시아에 접근하는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하도록 조치했다.

대원군은 1885103일 청에 끌려간지 3년만에 귀국했다. 그러나 민씨 일파들은 대원군에 대한 경계심으로 그가 귀국하기 전에 대원군파 관리들을 제거하고 귀국 후에도 가택에 연금시켜 외부와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경비를 엄히 했다.

이홍장은 또 러시아를 불러들여 청국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조선의 인아거청(引俄拒淸) 정책을 제어하기 위해 조선주재 진수상(陳樹裳)을 경질하고 위안스카이를 다시 조선에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두 내란을 진압한 군인인데다 조선 내정에도 밝았다. 이홍장은 위안스카이에게 주차조선 총리교섭 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긴 이름의 타이틀을 주어 조선의 외교와 내정을 감독하는 감국대신(監國大臣)의 역할을 부여했다. 영국과 프랑스 식으로 보면 보호령 총독인 셈이다.

 

고종은 청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친러파 이범진(李範晋)의 건의 받아들여 러시아 공관 개설을 허가하고 청국에 주재하던 베베르가 초대 공사로 부임했다.

18863월에 고종은 러시아 베베르 공사에게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필요하면 군대를 파견하는 내용의 밀약을 체결했다. 이 사건도 민영익이 위인스카이에게 밀고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번 기회에 청군을 출동시켜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을 옹립해야 하다고 주장하며 압박했다. 다급해진 고종은 또 자신과 관계 없다며 발뺌하고 이홍장이 수습하면서 소동은 잠잠해 졌다.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우리나라 최고 오래된 태극기. /문화재청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우리나라 최고 오래된 태극기. /문화재청

 

이홍장은 묄렌도르프 대신에 미국인 오웬 데니(Owen N. Denny)를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파견했다.

데니는 미국 오하이주 출신으로 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했고 중국 영사로 나가 상하이 총영사 시절에 이홍장과 친해졌다. 그는 귀국해 자택에 있던 중에 이홍장의 초청 전보를 받고 18863월에 조선에 부임했는데, 이홍장은 그가 법률에 밝아 조선에 대한 서양 열강의 책동을 국제법 지식으로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도 전임 묄렌도르프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자주국으로 보았고, 1888년 조·러 조약을 주선하면서 한국측 대표로 문서에 서명했다. 이 때문에 이홍장의 미움을 받아 고문직에서 파면당했는데, 그는 그동안의 체험을 기록한 <청국과 조선>(China and Korea)라는 책자에 출판해 청의 황포를 실날하게 비판했다.

그는 책자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은 청의 조공국이다. 그렇지만 조공관계는 그 주권, 독립권에 대해 영향을 주지 않으며, 그럴수도 없다. 따라서 조선은 청 황제에게 매년 조공을 하지만 그 공납으로 인해 조선의 주권과 독립을 손상시킬수 없다.”

 

2018년 복원한 미국 워싱턴 DC 소재 주미공사관 /문화재청
2018년 복원한 미국 워싱턴 DC 소재 주미공사관 /문화재청

 

데니는 이홍장-위안스카이에 의한 청의 종주권 행사에 반발해 조선 정부에 다각적인 자주외교를 권고했다. 그중 하나가 주미 공사 파견이었다.

고종은 데니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7516일 민영준(閔泳駿)을 일본 주재공사로 발령했다. 이 문제에 위안스카이는 반대하지 않았다. 조선의 재정이 취약하므로 일본 이외에는 공사를 파견할 여력이 없을 것으로 본데다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일본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흘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을 주미 전권공사, 심상학(沈相學)을 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러시아 등 유럽 5개국 전권공사에 임명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즉각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이홍장은 조선의 주미 공사 파견을 반대했다.

이에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가 위안스카이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미 조약은 양국이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으며, 그 조약에 상호 외교관 파견이 규정되어 있으며, 외국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규정이 없다는 게 미국측 주장이었다. 게다가 일본 주재 대사는 되고 미국 주재 대사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다고 따졌다.

고종은 이홍장이 데니를 텐진으로 보내 이홍장을 설득하게 했다. 이홍장은 데니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조건부로 조선의 주미공사 파견을 승인했다. 그 조건은 영악삼단(另約三端)이란 것이었는데, 조선의 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야 하고, 청국의 안내로 국무부로 간다 조선의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조선의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동을 거쳐 박정양 초대 주미전권공사는 18881월 미국에 상륙하고, 115일 글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공사관을 개설했다. 그는 청국이 제시한 영악삼단을 이행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주미 청국공사 장음환(張蔭桓)은 속국의 외교관들이 영악삼단을 지키지 않았다고 본국에 보고했고, 이홍장은 박정양을 장정을 위반한 죄’(違章之罪)를 묻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공사관 직원들은 그해 11월 귀국길에 올랐다. 유럽 주재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홍콩에서 귀국해야 했다.

박정양은 일본에 4개월이나 머문뒤 18893월에 귀국했다. 위안스카이는 박정양을 징계하라고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런데 고종은 박정양을 부재학에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홍장은 격노했다. 위안스카이는 고종에게 달려가 따졌지만 고종은 대답을 회피했다. 박정양은 병을 칭하고 입궐하지 않았다. 박정양은 그후 이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고종은 청에 강하게 대들지는 않았지만 나름 임금으로서의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한 것이다.

 

19904월 조대비가 죽었다. 왕가의 어른이 죽으면 중국에 고부사(告訃使)라는 사절을 보내고, 중국은 칙사를 보내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하지만 고종은 고부사를 보내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며 고부사를 보낼 것을 윽박질렀다. 하는수 없이 조선 정부는 고부사를 보냈고, 청의 칙사가 왔다. 국왕은 서대문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를 영접해야 했다. 위안스카이는 승리했고, 조선은 굴욕적인 행사를 치렀다.

위안스카이는 10년 동안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다가, 청일 전쟁 직전인 1894719일 변장을 하고 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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