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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고종, 동학난 진압 위해 淸에 파병 요청…일본군 동시출병, 대원군 복권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하에 단행된 갑오경장
2020. 02. 17 by 김현민 기자

 

우리는 총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는 대궐이 일본군에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들, 조선사람들이 모두 크게 흥분했다. …… 신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조선 사람들은 엄청난 공포에 빠졌다. 많은 양반들이 자기 집에서 도망쳐 나와서는 온갖 구실을 붙여 외국공사관이나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평민들은 떼를 지어서 시골로떠났다. 가게란 가계는 모두 문을 닫았고, 도시는 마치 돌림병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잔뜩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 여자와 가마, 조랑말의 무거운 행렬이 중앙통을 지나 성문 밖으로 끊임 없이 흘러 나갔다. 어린애들의 애처러운 모습도 숱하게 보였다. 부모들이 매정하게 버렸거나 사람들 속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혼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이 장면은 1894723일 새벽 4시 일본군 2개 대대가 고종 임금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점령하던 당일의 모습이다. 당시 조선에 입국해 있던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이 쓴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본군 2천명은 30분만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의 신변을 확보했다. 1개 대대는 영추문을 따라 북문에 이르고, 또다른 1개 대대는 광화문을 따라 건춘문에 이르러 빗장을 자르고 조선군 호위대와 전투를 벌였다. 조선군은 무력했다. 일본군은 국왕을 격리하고 4대문을 봉쇄해 외부와 연락을 끊었다. 곧이어 일본군은 조선군 주둔지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곧이어 청나라 공사관을 습격했다. 청의 조선 주재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기미를 알아채고 며칠전에 변장을 하고 청국으로 도망쳤고 관사를 지카던 당소의(唐紹儀)는 재빨리 영국 영사관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고종이 의지할 곳은 서양 외교관들밖에 없었다. 지방에서는 동학(東學)의 민중반란이 일어났고, 청나라 군대는 서울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서양 외교관들이 궁궐에 들어갔을 때, 고종은 좁은 방에 머물면서 살해될 것을 두려워하며 그날 밤을 자신들과 함께 지내자고 부탁했다.

 

전북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전적지 /문화재청
전북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전적지 /문화재청

 

고종이 재위한지 31년째 되던 1894년 갑오년(甲午年), 조선에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그해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이 벌어졌고, 일본의 압력으로 갑오경장이 일어났으며, 민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청군의 전쟁(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해에 닥친 내우외환(內憂外患)은 조선은 물론 동양의 변화에 큰 분수령을 형성했다.

이 모든 것은 고종의 무기력에서 출발했다. 발단은 동학란이었다.

동학농민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해 일어나, 다음 해인 18941월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농민군은 10여일 만에 해산했으나, 정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탄압했다. 이에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다시 일어나게 된다.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한 후 동학군은 관군을 패퇴시키고 연전연승하며 고창·나주·정읍등지를 함락하고 5월말에 전주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조선 조정은 초기에 농민봉기를 초기에 수습할수 있었다. 고부 민란 초기에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를 익산 군수로 전임시키고 후임 군수 박원명(朴源明)이 농민들을 다독이며 생업에 돌아가라고 했을 때 집단행동은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39일만에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다시 부임시켰을 때에 사단이 벌어졌다. 왕실 외척인 조씨 가문의 이익과 호남 곡창에서의 수탈이란 폐습을 조정은 차단시키지 못한 것이다.

또 탐관오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해 지방행정을 감찰시킨 것도 실책이었다. 그는 조병갑을 잡아 넣고 농민들을 진정시킬 의무가 있었는데, 도리어 동학교도를 민란의 주범으로 몰며 횡포를 부렸다. 이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고종의 가장 큰 잘못은 농민봉기를 진압해 달라고 청나라에 요청한 사실이다. 관군이 농민군에 연이어 패퇴하자 민씨 일파의 민영준(閔泳駿)은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자고 고종에게 아뢰었다. 처음에는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했다. 텐진 조약에 의해 청군이 출병하면 일본군도 출병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영돈령 부사 김병시(金炳始)는 청군 차병론을 끝까지 반대하며 동학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패 관원을 처벌하고 정치개혁을 단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고종의 마음이 흔들렸다. 민영준은 고종에게 청국의 신하를 자청하며 출병을 요구하도록 종용했고, 고종은 그의 말을 들었다. 조선 정부는 마침내 61일 중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때부터 상황은 전광석화처럼 전개되었다. 청의 이홍장(李鴻章)64일 북양해군 정여창(丁汝昌) 제독에게 군함 두 척을 이끌고 인천을 향하도록 명령했다. 7일 총은 동경 주재 공사를 통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청군은 8일 아산만 마산포에 도착했다. 청국의 조선 파병 병력은 2,800명이었다.

일본은 청의 통보가 오기도 전에 움직였다. 62일 일본은 내각회의에서 조선출병 건을 의결하고, 5일 제5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청군의 파병 통보가 오자마자 10일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 공사는 육전대 4백여명과 함께 군함을 타고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진입하겠다고 조선 정부에 통보했다.

일본 정부의 목적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 조정에서 친청파를 제거하고 청나라와 한판 전쟁을 벌이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보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위키피디아
야마가타 아리토모 /위키피디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의도는 1890년를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표적 군사전략가이자 총리를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189012월에 조선이 일본 영토에 칼을 겨누고 있는 형상이므로 조선이 러시아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이 공동으로 조선을 보호하는 공동관리론을 폈다. 그러던 그는 3년후인 1893년에 서양 열강의 진출로 중국이 약화되었으므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군이 파견되자 일본의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외무대신은 외무차관, 참모차장과 비밀 회의를 갖고 대책을 협의했다. 당시 회고에 따르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평화적으로 매듭을 짓느냐는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 내 승리하느냐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위해 5~1천명의 병력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무쓰 외무대신은 청국보다 우세한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6~7천명의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보고했다. 그때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는 조선에서 일어난 변란은 중대한 사건이므로, 일본도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청국에 통보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참의 민상호(閔尙鎬)를 파견해 서울 진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지만 오도리 공사는 조선의 요구를 일축하고 서울 입성을 강행했다.

 

전주를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동학군은 청·일 양국군이 출병하자 정부와 화의를 하고 전주에서 철수했다. 청과 일본에 침입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청의 위안스카이와 일본의 오도리 공사는 서울에서 회담을 갖고 군대 증파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어떻게든 청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어 조선을 먹겠다는 야욕에 불탔던 도쿄의 수뇌부는 당황했다. 청은 조선에서 내란이 진정되었으므로 양국군이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난 무쓰 외상은 조선의 내란이 완전하게 진압될 때까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며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일본은 조선 정부가 내정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군대를 증파하겠다고도 협박했다. 616일 일본의 무쓰 외상은 도쿄 주재 청국 공사를 불러 이 안에 동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날 일본은 1만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청군의 4배에 해당하는 대군이었다.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일본인을 보호하겠다고 시작한 일본의 출병은 거류민 보호에 필요한 병력의 10~20배나 불어난 것이다.

 

일본은 7월에 조선 주둔군 제1사령관에 야마가타를 부임시켰다. 그는 앞서 설명했듯이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군사전략가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은 야마가타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 그는 일본 병사들에게 적군은 매우 잔인하다. 포로가 되어 살기보다는 깨끗하게 죽어라,”고 훈시한 강경파 인물이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1개월 동안 점령했다. 그동안 고종은 갖은 핍박을 받았고, 대신들은 일본에게 제발 궁에서 나가달라고 애원했다.

일본은 그냥 궁궐에서 나가지 않았다. 820일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해 조선이 내정 개혁을 급선무로 이행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아울러 경부·경인간 철도를 일본에게 맡기고 조선 정부가 일본인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내용도 얻어냈다.

820일에는 청군을 국경밖으로 물러나게 해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고 청군과 전쟁에서 조선은 일본군의 진퇴 및 군량 준비에 편의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일조공수동맹조약(日朝攻守同盟條約)을 체결했다.

얻을 것을 다 얻은 후에 일본군은 825일에 경복궁에서 철수했다. 조선의 궁궐수비병들이 보유한 무기도 모두 빼앗아 언제라도 다시 들어갈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일본은 외국 공사들에게 궁궐 담을 행군하는 도중에 조선군의 사격을 받아 궁궐에 진입했으며 침략적 의도가 없었다는 내용의 설명문을 돌렸다.

 

흥선대원군 /위키피디아
흥선대원군 /위키피디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 들였다. 궁궐을 접수한지 이틀후인 725일 일본은 고종을 압박해 대원군에게 국정에 관한 전권을 내린다는 소칙을 내리게 했다.

대원군은 일본이 마뜩치 않았지만 민씨 일족에 대한 원한감에서 다시 권력의 빛을 받으러 나왔다. 그는 민씨 척족인 민영준, 민형식, 민응식, 민치헌을 유배보내거나 파직시켰다.

 

일본은 조선의 내각도 개편했다. 김홍집(金弘集)을 총리 대산으로 하고, 갑신정변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을 내무대신, 법무대신으로, 김윤식(金允植)을 외무대신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오도리 공사의 지휘 아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입법기구를 만들었다. 이 조직은 일종의 혁명위원회로, 2백여개의 내정개혁안을 처리했다. 이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청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국 기원(紀元)을 사용하고 과거제를 폐지하며 양반과 상민의 귀천을 없애며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하고 죄인의 연좌제를 폐지하며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를 금납화하며 공사노비를 폐지하며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고 남녀 조혼을 금지하는 것 등이다. 10년전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이 추구했던 것보다 진일보한 내용이며, 조선이 구습의 족쇄를 풀고 바야흐로 근대화로 가는 개혁안들이다. 하지만 이런 개혁이 주체적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일본군의 점령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슬픈 역사적 사실이다.

 

한편 다시 권좌에 오른 흥선대원군은 민씨 일파를 제거한 것도 모자라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하고 자신의 적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또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평양 주둔 청군 장수에게 몰래 정보를 교환하다가 그 비밀문서가 일본군 사령관 야마가타의 손에 들어갔다.

청일 전쟁에 승기를 잡으면서 일본정부는 정계거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조선주재 공사로 임명해 조선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다. 이노우에는 부임후 야마가타가 입수한 비밀문서를 들이대며 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대원군은 청나라에 이용당하고, 일본에 이용당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며 4개월만에 다시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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