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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동학농민군, 우금치 전투에서 막강한 조일 연합군의 화기에 패배
뜻은 달랐으나 손 잡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2020. 02. 18 by 김현민 기자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에서 양반인 전창혁(全彰赫)의 아들로 태어났다. 체구가 작아서 어려서 별명이 녹두(綠豆)였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성리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문을 공부하고 한시를 짓기도 했다.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훈장도 하고 장사도 했다고 한다.

그가 동학(東學)에 몸담은 것은 30대 전후로 알려져 있다. 1890년에는 운현궁을 찾아가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도 했다. 대원군과의 인연은 이때 생겼다.

1892년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고부군(古阜郡)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서당에서 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고부에서 그는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고부지방의 접주(接主)가 되었다.

그때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참다 못해 전봉준은 농민들과 함께 연명 상소를 고부군수에게 상소했지만 거부당했다. 조병갑은 전봉준등 농민들을 잡아다가 문초하며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이듬해 18932월 전봉준은 한양으로 올라가 대원군을 방문했다. 대원군은 자신의 식객이었던 그를 반갑게 맞으며 대접했다고 한다.

 

만석보가 있었던 곳 /문화재청
만석보가 있었던 곳 /문화재청

 

고부로 내려간 전봉준은 동지들을 모았다. 전봉준은 인간이 평등하며(弘益人間), 탐관오리를 처벌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역설했다. 그리고 대원군이 뒤에서 도와줄 것이라고도 했다.

18941월 고부 농민들은 조병갑을 상대로 상소를 올렸는데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 등 세사람이 주도했다. 전창혁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

부친이 장살(杖殺)을 당하자 전봉준은 마침내 그해 321일 죽창을 든 농민 수백명을 이끌고 관아로 쳐들어갔다. 대부분 동학교도들이었고, 그들은 고부군수가 물세를 과도하게 걷던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를 보내 농민들을 무마하고 탐관오리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자 농민군은 해산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동학도를 동비(東匪)라 부르며 탄압했고, 동학교도들은 다시 봉기해 전주성을 점령했다. 고종은 청나라에 병력출병을 요청했고,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동시에 출병했다.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자 동학군은 관군과 전주에서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내전을 중단했다. (全州和約)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사발통문 /위키피디아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사발통문 /위키피디아

 

일본군은 723일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의 반대파인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대원군은 못이기는 척하며 입궐해 민비를 폐서(廢庶)하자고 주장했지만 일본이 반대했다. 대원군은 민비를 폐비하고 고종을 하야시킨 다음 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을 즉위시키려는 집념을 갖고 있었는데, 첫단계부터 좌절된 것이다. 이준용은 고종의 친형 이재면(李載冕)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다.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위키피디아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위키피디아

 

대원군은 일본이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알려주지 않은데 대해 분노했고, 일본 공사관 지휘 아래 개화파들이 추진하는 갑오경장에도 반발했다.

그는 반일 음모를 추진했다. 대원군의 계획은 평양에 주둔한 청군과 밀통해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공격하며 친일 개화파 관료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협공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전략으로 평양의 청군에 밀사와 밀서를 보내고 전국에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삼남 지역에 양반가에 봉기를 호소했다. 대원군은 동학지도자 북접(北接)의 손병희(孫秉熙)와 남접(南接)의 전봉준에게도 거병해 일본과 싸우자고 했다.

 

동학군의 2차 거병은 흥선대원군의 사주에 의한 것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대원군의 측근이 전봉준에게 밀지를 보내 주문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대원군이 기대한 평양의 청군은 우수한 일본군의 화기에 의해 하루만에 무너졌다. 허겁지겁 도주하던 청군은 기밀 문서를 파기하지 못했고, 그 안에는 대원군과 이준용, 김홍집이 보낸 밀서도 있었다.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라는 거물급 정치인을 새로 공사로 파견했는데, 그는 반일 음모를 꾸미는 대원군을 제거하기 위해 그 문서를 활용했다. 대원군과 손자 이준용은 결정적 약점이 잡하게 되어, 등장한지 4개월만에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충남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 전적비 /문화재청
충남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 전적비 /문화재청

 

동학군은 9월에 전국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보내 다시 봉기했다. 동학군은 이번에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세웠다.

남접과 북접의 동학군이 논산에서 합류해 공주로 향했다.

1894125일 농민군은 우금치(牛禁峙) 고개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만여명의 농민군이 고개를 올라 갔다. 정부군은 15백이었고, 일본군이 2백명이었다. 숫적으로 농민군이 10배 이상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무기를 당해내지 못했다.

격럴한 전투가 1주일 동안 50회나 치러졌다.

농민군은 조일 연합군을 밀어붙였지만, 고갯마루 150m 앞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쏟아붓는 포탄과 총탄에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농민군은 4일간 접전을 펼쳤지만 패배했다. 1210일 조일 연합군은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이 후퇴했다. 이 우금치 전투에서 2만명 농민군 중에서 살아남아 퇴각한 수가 5백명이라고 하니, 전투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학살이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무기였다. 관군과 일본군이 보유한 무기가 농민군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다. 농민군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총도 없는 사람은 죽창으로 싸웠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었고 분당 12발을 쏠수 있는 신형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을 갖추었기 때문에 농민군은 이 화기를 뛰어 넘을수 없었다.

게다가 농민군은 제대로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고, 전투 기술이 부족했다.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불리한 지형적 조건에서 싸웠다.

 

개틀링건 /위키피디아
개틀링건 /위키피디아

 

남은 농민군은 논산으로, 퇴각했고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정부군은 농민군 소탕작전을 벌였고, 죄 없는 양민들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학살했다.

동학군의 장군 김개남은 1227일 태인에서 친구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228일 전봉준은 순창에서 상금에 눈먼 옛 동지의 배신으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심한 고문 속에서도 대원군과의 관계를 일절 불지 않았다고 한다. 전봉준은 서울로 쳐들어와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간(惡奸) 관리들을 축출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 몇 사람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는 곧장 농촌에 들어가 상직(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1894년 12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위키피디아
1894년 12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위키피디아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전봉준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조선정부에 처형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전봉준은 1895423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혁명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전봉준은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그가 죽은후 조선의 백성들은 그를 추도하며 새야새야라는 노래를 불렀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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