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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기력하게 일본에 패하다…러·佛·獨 삼국간섭으로 일본 견제
동양 패권, 중국서 일본에 넘어가다…러시아 부상
2020. 02. 19 by 김현민 기자

 

조선은 중국에 가장 중요한 조공국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매년 세 번, 청나라에 매년 네 번 조공사절단을 정기적으로 보냈고, 별도로 수많은 사절단을 파견했다. 1637~1894년까지 2세기반동안 507회의 조선 사신이 중국에 갔고, 중국 사절단은 169회 조선에 갔다.

조선이 중요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참전해 1천만 냥을 소비했고, 정유재란 때에 그만한 돈을 썼다. 명조는 임진왜란 때 국력을 완전히 소모하는 바람에 청조에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그런 사태가 19세기 말에 다시 나타났다. 서양열강이 밀려드는 가운데 청나라는 조선을 방어할 여력이 없어 개방을 권유했고, 개방 과정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조선 내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두 번의 내란을 거치면서 청나라는 조선에서 일본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았지만, 일본은 호시탐탐 중국을 조선에서 배제시킬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일본이 내세운 명분은 조선의 자주국이었다. 조선을 청과의 조공관계에서 차단해 자신들의 개입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일본이 내세운 조선의 자주론이었다.

 

1895~95년 청일전쟁은 양국이 그 한가운데 위치한 조선을 차지하려는 아시아 패권전쟁의 필연적 결과였다.

1894329일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이 이홍장(李鴻章)의 양아들 이경방(李經芳)의 초대를 받아 상하이로 갔다가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조선 정부는 청에 역적의 시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대중이 보는 앞에서 시체를 능지처참하고 머리를 효수했다.

일본에선 김옥균에게 욕을 보인 것은 그를 보호하던 일본에 대한 무례라며 무력을 사용해 조선을 보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외상은 조선인이 중국에서 다른 조선인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없다고 반대했다. 그들은 다른 전쟁의 구실을 찾았는데, 바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청일 대립과 러시아를 그린 만화 /위키피디아
조선을 둘러싼 청일 대립과 러시아를 그린 만화 /위키피디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은 청에 병력 파병을 요청했고,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도 파병했다. 청군은 189468일 아산만 마산포에 도착했고, 일본군은 이틀후인 10일 인천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조선에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경복궁 점령이었다. 일본군은 723일 경복궁을 점령한 뒤 흥선대원군과 개화파를 앞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틀후 25일 일본군은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공격하고 28일 충청도 성환(成歡)에서 섭지초(葉志超)와 섭사성(葉士成)이 이끄는 34백명의 청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81일자로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은 러일전쟁때, 태평양 전쟁 때에도 선제공격을 해 상대국의 예봉을 꺾어 놓은 다음에 선전포고를 하는 비열한 수법을 써왔다.

청의 이홍장은 개전에 앞서 주중 러시아 공사 카시니(Arthur Cassini)를 불러 일본과 전쟁이 붙을 경우 러시아가 나서서 간섭할 것을 보증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교 주재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가 중국을 지지할 경우 영국이 일본을 지지할 것이라며 반대의견을 내 러시아는 어정쩡한 상태였다.

이홍장은 이번에는 영국에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도록 중재를 요청했다. 영국은 청군이 북쪽으로 가고, 일본군이 남쪽으로 철군해 중간에 있는 조선의 수도 주변에 중립지대를 둘 것을 일본에 제의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 제의마저 거절했다.

 

청일 전쟁의 일본군 /위키피디아
청일 전쟁의 일본군 /위키피디아

 

이홍장은 자신이 이끄는 회군(淮軍) 14천명을 평양에 파병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선인들은 환영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청국인보다 더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군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인들의 호의를 무시하고 약탈하고 장정을 끌고가 사역시켰다. 규율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런 무리를 이끌고서야 손자나 오자 같은 장수라 한들 어찌 싸워 이길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915일 평양성 전투에서 청군은 하루만에 일본군에 괴멸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북쪽 방어를 맡은 장군이 전사하고 방어선이 곧바로 무너졌다. 청의 장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청군 전사자는 2천명에 달했는데 이중 대다수는 패주하는 과정에서 사살되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180명에 불과했다.

30년 동안 서양문물을 배워 군을 현대화했다는 청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장수 위여귀(衛汝貴)는 군비를 횡령해 자신이 운영하는 전당포의 자본금으로 사용했고, 그 바람에 병사의 급료가 늦게 지급되어 병사들이 약탈에 나서야 했다. 청군은 현대식 라이플 총이 한정도 없었고, 화승청과 머스켓 총을 들었다. 총알도 총마다 제각각이어서 총에 맞는 총알을 분류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청군은 평양에서 후퇴하면서 포 40, 소총 1만정을 버리고 도주했다 금과 은 등 귀금속과 비밀 정보, 기밀문서들도 그대로 놓아두고 도망치기 바빴다.

평양에서 물러난 청의 육군은 압록강 건너 구련성(九連城)으로 퇴각했다가 그곳이 함락되자 봉황성(鳳凰城), 금주(金州)로 도망쳤다. 전투는 없었다. 도망치는 자와 쫓는 자와의 달음박질만이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117일 요동반도의 대련(大連), 21일에 여순(旅順)을 함락했다.

 

성환 전투도 /위키피디아
성환 전투도 /위키피디아

 

한편 청의 북양함대는 915일 병사를 싣고 대련을 출발해 압록강 하구 대동구(大東溝)에 도착했다. 청의 함대는 일본 함대를 피해 다녔는데, 마침내 대동구에서 병사를 내려 놓고 돌아가다가 일본 함대에게 발견되었다. 함선의 수로는 일본 12, 청군 14척이었고, 총배수량에서도 일본 4만톤, 청군 35천톤으로 한번 붙어볼만한 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지 30분만에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호(定遠號)의 마스트가 일본 함대가 쏜 포탄에 맞아 신호기가 떨어져 나갔다. 청의 해군은 신호전달체계를 상실해 각 군함이 독자적 판단에 의해 전투가 치러졌다. 북양함대는 3척의 전함을 잃고 2척이 대파되는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일본 군함 피해는 없었다.

당시 중국 해군은 모두 65척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은 32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은 모둔 군함을 전쟁에 투입하지 않았다. 이홍장이 보유하고 있는 북양함대만 일본과 교전했을 뿐 남양함대 등은 각자의 군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함을 파견하지 않고 불구경하듯 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23척의 전함을 동원했는데 그중 9척은 1889년에 건조된 최신형이었다. 속도도 일본 함대는 시속 23 해리로 청 함대 15~16 해리에 비해 빨랐다. 중국 함대는 방대하지만 낡고 속도가 느렸고, 이에 비해 일본 함대는 작지만 정교하고 속도가 빠르고 현대화되어 있었다. 청의 함대가 일본에 비해 현대화에 뒤진 것은 서태후(西太后)가 지낼 거대한 인공산(萬壽山)과 인공호(昆明湖)가 들어서는 이화원(颐和園) 건설에 군함 구입비 36백만 냥을 전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 때문에 청의 해군은 1887년부터 94년까지 7년 사이에 전력을 증강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 거함 정원과 진원(鎭遠)1886년에 요코마하 항을 방문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는 반드시 정원호를 타도하자는 슬로건이 등장하고, 어린이들도 정원잡기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후 일본은 해군 증강에 나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순양함 요시노(吉野)호를 영국에서 건조해 인도받고, 청의 해군이 새 군함을 사들이지 못하는 사이에 아키쓰시마(秋津島) 등 최신형 군함 9척을 확보할수 있었다.

 

청일 전쟁시 압록강 전투 /위키피디아
청일 전쟁시 압록강 전투 /위키피디아

 

일본은 18952월에 산동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점령했다.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11척의 전함을 일본에게 넘겨주고 자결했다. 중국이 30년간 전개해온 자강운동의 결과는 초라했다.

청일전쟁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홍장의 회군과 북양함대와 일본과의 대결이었다. 이홍장은 자신의 군대만으로 일본 전체와 싸워 승리할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해직당하고 좌천되어야 했다.

 

청 해군의 정원호 /위키피디아
청 해군의 정원호 /위키피디아

 

청은 해군이 괴멸당하자 일본과 강화를 준비했다. 청은 호부시랑 장음환(張蔭桓)을 협상대표로 일본에 보냈지만 일본측이 하급관료와 대화할수 없다며 이홍장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홍장은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가 강화협상을 벌였다. 일본측 대표는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였다.

협상 초기에 한 일본인이 저격하는 바람에 이홍장은 눈 아래쪽을 크게 다쳤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크게 난처해져 휴전을 선포했다. 무쓰 외상은 이홍장의 아들에게 부친의 불행은 청의 행운입니다. 협상은 훨씬 쉬워질 것이고 전쟁도 중지될 것입니다.”고 위로했다.

1895417일 일본과 청은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승인하며 조선은 앞으로 중국에 조공하지 않는다 청은 배상금으로 일본에 2억 냥의 백은을 지불한다. 대만, 팽호(澎湖)제도, 요동반도를 할양한다 청국은 사스(沙市충칭(重慶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를 개항하고 일본 선박의 양쯔강 및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을 용인한다 일본인은 중국에 공장을 개설해 제조업에 종사할수 있다는 것이다.

 

청군 포로를 감시하는 조선 병사 /위키피디아
청군 포로를 감시하는 조선 병사 /위키피디아

 

이 조약으로 조선은 명목상 자주국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청의 속국에서 일본의 속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병자호란 때 상국(上國)을 명에서 청으로 바꾼지 260년만에 또다시 상전이 바뀐 것이다.

대만 할양에 대해 대만 거주 중국인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프랑스와 전쟁 이후 청은 대만을 성()으로 격상시켰는데, 이제는 그 영토를 일본에 내주게 된 것이다. 대만인들은 1895525일 순무를 총통으로 추대해 타이완 공화국을 세웠지만, 청 조정은 이홍장의 양아들 이경방을 파견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일본군의 접수를 지원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지 6일째 되던 423일 도쿄 주재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개국 공사들이 일본 외무성 하야시 다다스(林董) 차관을 방문해 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한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본국의 훈령을 전달했다.

이날 3국 간섭을 주도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면 연해주에서 남하해 만주를 차지하려는 시도가 꺾이기 때문이었다. 시모노세키 협상 도중에 이홍장은 협상 내용을 중국 주재 러시아 공사 카시니에게 알려주었고, 카시니는 본국에 이 사실을 알렸다. 러시아는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라고 공사에게 지시했다.

러시아는 단독으로 요동반도 할양을 반대하면 일본이 영국과 손잡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영국의 경쟁자인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프랑스는 또 독일을 끌어들였다.

러시아는 군함을 일본과 중국 연안에 배치하고 비상을 걸었다. 일본 해군은 여전히 요동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제 막 청나라와 전쟁을 끝낸 상태에 또다시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결국 삼국의 간섭을 받아들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었다.

비록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 주었지만, 청일전쟁은 동양의 패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 러시아가 새롭게 동양에 개입하는 기회가 되었다. 조선은 수천년만에 처음으로 중국의 조공국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일본과 러시아라는 새로운 강자의 힘에 좌우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청일전쟁 전개 /위키피디아
청일전쟁 전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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