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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아관파천 전 고종 구출작전…반일 정동파 주도, 내부 밀고로 실패
친미파 주도한 춘생문 사건…실패한 친위 쿠데타
2020. 02. 21 by 김현민 기자

 

1995108일 민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한 이후, 고종은 유폐되다시피 했다. 고종과 왕세자(후에 순종)의 일거수일투족이 친일파 관리와 일본군이 훈련시킨 조선병사들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김홍집(金弘集) 총리대신에 의해 주도되었다.

왕비가 살해된 날 아침,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와 미국 대리공사 알렌Allen, Horace Newton은 경복궁으로 가 고종을 알현했다. 일본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임금 곁을 지키고, 고종은 겁에 질려 있었다.

고종은 음식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까 두려워 궁중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조선의 군주는 서양 선교사 부인들이 가져다 준 캔 음식 이외에는 먹지 않았다.

고종은 끊임 없이 퇴위와 독살 위협에 시달렸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며느리가 죽은후 궁궐에 어슬렁거렸다.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장자인 이재면(李載冕)을 궁대부 대신에 올려 궁궐을 감시하게 하고, 고종을 퇴위시켜 적손자 이준용(李埈鎔)을 새 임금에 올리려고 책동을 벌였다.

고종을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김홍집 내각이 죽은 부인을 폐서인(廢庶人)한 조치다. 김홍집 내각은 욍비를 사악한 여자로 선언해 을미사변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무리 힘없는 고종이었지만, 이 조치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죽은 왕비를 두 번 죽이는 셈이어서 고종은 끝까지 거절했다. 하지만 김홍집 내각은 자기들의 도장을 찍어 왕비를 빈()으로 강등시켰다. 고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고종을 도와준 사람들이 미국과 캐나다, 영국, 러시아 공관원과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서울 중구 정동에서 자주 만났기 때문에 정동구락부라고 불렀다.

당시 서울 중구 정동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의 공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청일전쟁이 끝날 무렵인 189412월에 러시아의 베베르 대사의 처남의 처형인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孫澤, Antoinette Sontag)이 뛰어난 사교술로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을 엮어 사교모임을 만들었으니, 정동구락부 또는 정동파(貞洞派)라고 했다.

정동구락부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책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김홍집 내각의 왕비 폐서인 조치가 일본의 범행을 은폐시키기 위한 조작이라고 규탄했다.

 

앙투아네트 손탁의 사저에 있던 자리에 세워진 손탁호텔 /자료사진
앙투아네트 손탁의 사저에 있던 자리에 세워진 손탁호텔 /자료사진

 

정동구락부 멤버들은 불쌍하고 고립된 고종을 구출하기 위한 음모를 추진했다. 이른바 국왕탈취음모였다. 공모자들은 을미사변이 나자 외국공관과 외국인들의 집으로 피신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국내 관료로는 이재순(李載純) 임최수(林最洙) 김재풍(金在豐) 이도철(李道徹) 이민굉(李敏宏) 이충구(李忠求) 안경수(安駉壽) 등이 주도적으로 모의했고, 여기에 관료 이범진(李範瑨)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윤웅렬(尹雄烈) 윤치호(尹致昊) 이하영(李夏榮) 민상호(閔商鎬) 현흥택(玄興澤) 등이 가세했다. 친미파와 친러파의 합작품이었다.

군부도 호응했다.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南萬里)와 제2대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李奎泓) 이하 수십명의 장교가 가담했다.

 

서양인으로는 언더우드(Underwood, H. G.), 에비슨(Avison, O. R.), 헐버트(Hulbert, H. B.), 다이(Dye, W. Mc) 등과 미국 대리공사 알렌(Allen, H. N.), 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 I.)와 같은 구미외교관도 이 사건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호응했다.

거사일은 18951128일 새벽으로 잡았다. 작전 내용은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임금을 궁궐 밖으로 모시고 나와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새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임금의 내락을 받았다. 언더우드씨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은 회고록 조선견문록에서 그날 일을 이렇게 정리했다.

“(남편 언더우드씨 등) 미국인들이 급히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곧장 임금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임금에게 밤새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왔노라고 알리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금은 그들에게 다이 장군의 방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방은 임금의 신변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무슨 일이 나면 맨먼저 경계를 취할수 있는 곳이었다.”

고종은 자신을 구출하러 오는 군인들을 기다리며 가장 가까운 곳에 미국인 무관을 지키게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부에 배신자가 생겼다.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친일파 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했다.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록을 좀 더 인용해 보자. “열두시 정각에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언더우드씨는 벌떡 일어나 임금의 숙소로 달려갔고, 다른 두사람이 그 뒤를 바싹 좇았다. [] 문 바로 저쪽에는 장교 몇 명이 칼을 뽑아들고 가로막고 있었다. 언더우드씨는 권총으로 그 칼들을 물리치고 뛰어 들어갔고, 그 뒤에 있던 두 사람도 곧 들어섰다. 그때 막 그들은 임금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은 어디 있느냐. 외국인들을 불러라.” “여기 있습니다. 전하. 저희들은 여기 있습니다.” 세사람(미국인)은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임금은 그들의 손을 잡고 밤새도록 자기 곁에 머물게 했다.

임금의 벗들(친위 쿠데타세력)은 안타깝게도 무장이 안 되었기 때문에 미리 작정해 두었던 숲속까지는 잘 진격해 들어왔으나, 함정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벗어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몇몇은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도망쳤다.“

 

중대장 남만리와 이규홍은 200명의 군인을 인솔해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建春門)에 이르러 입궐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이 진격해올 것을 알고 있던 친일 정부는 그 곳에 군대를 미리 준비해 두었기에 공격자들의 시도가 실패한 것이다.

임금의 친위군대는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春生門)에 이르러 담을 넘어 입궐하려 했다. 그런데 이 곳도 친일 반역의 무리들이 지키고 있었다. 친위 쿠데타군은 체포되거나 도주해야 했다. 결국 어용쿠데타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임최수·이도철은 사형, 이민굉·이충구 등은 종신유배형, 이재순·안경수·김재풍·남만리 등은 곤장 100대에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각각 받았다. 일부 정동파 인사들은 재빨리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해 중국등지로 망명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용했다. 일본은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중이던 을미사변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전원 석방했다. 일본은 서양인들이 쿠데타를 내외에 선전했다.

 

이 사건을 춘생문사건이라고 한다. 한자로 봄춘’()은 동()을 의미하는데, 경복궁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문(小門)으로, 일제 시대에 헐렸다. 경복궁 후원(지금의 청와대)으로 가려면 지금 남아있는 서쪽 신무문과 동쪽 춘생문을 통과해야 했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 청와대 춘추관 앞 어딘가였다.

춘생문 사건은 실패한 친미(親美) 쿠데타라고 할수 있다. 이 계획은 실패했지만 고종은 두달 반 후에 18962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니,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경복궁 춘생문의 위치 /김현민
경복궁 춘생문의 위치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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