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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민비시해, 단발령에 민심이반…러시아 뒤에 숨은 고종, 친일내각 포살령
아관파천에 놀란 군중, 총리대신 김홍집 포살하다
2020. 02. 22 by 김현민 기자

 

그해 겨울, 조선은 어수선했다.

18951128일 조선에 주재하는 서양인들과 친미·친러파들이 고종을 탈출시키려는 이른바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일본측은 자기네들을 비난하는 서양인들에게 을미사변이나 춘생문 사건이나 잘못된 것은 마찬가지라며 민비 시해의 주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50여명을 무죄로 방면했다.

일본인 고문은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정국주도권을 쥐기 위해 단발령이라는 발상을 내놨다. 김홍집 내각은 덜컥 그 아이디어를 받아 들고 1230일 단발령을 내렸다.

지금이야 머리를 깎는게 당연하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머리는 부모가 물려준 신체의 일부였다. ‘효경’(孝經)에 공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했다. 충과 효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 친일파들이 머리를 깎으라 하니, 전국의 유림과 백성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인에게 상투는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소년이 장가를 가면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투를 올렸다. 만주족이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해도 조선인들은 상투를 고집했다. 조선인에게 상투는 종족적 자존심이자, 어른의 상징, 부모가 물려준 신체의 일부였다.

친일파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고 있던 차에 단발령이 내리자 백성들이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고, 의병들이 궐기했다. 일주일 사이에 일본인 36명이 살해되었다. 일본군이 지휘하던 서울의 친위대 주력부대는 의병 진압을 위해 지방에 파병되었고, 서울 궁궐의 경비가 느슨해졌다. 고종과 친러파는 이 틈을 노렸다.

 

2009년 보수후 옛 러시아공사관 /문화재청
2009년 보수후 옛 러시아공사관 /문화재청

 

해가 바뀌어 1896년초,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이 러시아공사에게 고종의 궁궐 탈출 의사를 전달했다. 18일 베베르 공사는 멕시코 공사로 전임 발령되고 일본에서 근무하던 스페이어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고 러시아는 전임 베베르를 서울에 머물게 해 이례적으로 전임·신임 두 공사가 동시에 근무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두 공사는 본국에 고종의 이어(移御) 계획을 보고하고 인천항에 군함 1척을 정박시키고,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백명의 병사를 서울에 진입시켰다.

 

211일 새벽 두 개의 가마가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빠져 나왔다. 앞의 가마에는 엄 귀비가 바짝 출입문에 앉았고 뒤에는 고종이 몸을 숨겼다. 뒤 가마에는 다른 궁녀가 가마문 앞에 버티고 앉았고 세자(후에 순종)가 바로 뒤에 숨어 있었다. 건춘문을 통과한 두 개의 가마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미국 공사관을 지나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공사관에는 이범진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 대신들이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선에서 그 전날 미리 출동시킨 수군 120명의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한다.

 

궁궐에서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엄 귀비였다. 엄 귀비의 머리와 배짱이 아관파천을 보기 좋게 성공시킨 것이다.

민비가 살해되고 고종을 끝까지 지킨 여인은 엄 귀비였다. 그녀는 영친왕(英親王)의 생모로, 나중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 추증되었다.

엄 귀비의 아버지 엄진삼(嚴鎭三)은 평민으로,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했다고도 한다. 집안이 빈한해 8살에 궁궐에 나인으로 들어갔다. 민비의 시위 상궁이었던 그는 1885년 어느날 밤 고종의 승은(承恩)을 받았다. 불 같은 성격의 민비가 그 사실을 알고 엄 상궁을 형틀에 매달아 고문하려 했지만, 고종이 왕비에게 사정사정해서 엄 상궁은 죽음을 모면했다. 민비는 국왕의 청을 이기지 못해 엄 상궁을 살려주기는 해지만 상궁직을 박탈하고 궁궐밖으로 내쫓았다. 10년간 궁궐밖에 쫓겨나 있던 엄 상궁은 민비 사후 5일째 되던 날,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엄 귀비는 거사 전 며칠 전부터 가마를 타고 궁궐출입을 자주했다고 한다. 궁궐지기들에게는 나갈 때마다 몇꾸러미의 행하(行下, 수고비)를 주었다. 무료하게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은 처음에 경계를 하다가 행하의 맛에 빠져들어 엄 상궁의 궁궐 출입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을 두지 않았다.

드디어 1896211일 새벽, 고종을 감시하던 여인들이 잠에 골아 떨어진 사이에 엄 귀비는 임금을 모시고 탈출에 성공했다. 임금을 감시하던 여인중 한 사람이 흥선대원군 부인이자 생모였다고 한다. 아마도 어머니가 아들을 가련하게 생각해 탈출을 모른척 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1895년 러시아공사관 모습 /문화재청
1895년 러시아공사관 모습 /문화재청
1895년 러시아공사관 모습 /문화재청
1895년 러시아공사관 모습 /문화재청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각 김홍집 내각에 대한 포살령을 내렸다. 그는 문서로 쓰지 않고 구두로 시종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고종이 이어하던 그날,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은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금을 찾아갔지만 임금을 만날 수 없었다. 김홍집은 돌아오는 길에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민비를 폐서인(廢庶人) 한 일, 단발령을 내리게 한 일, 고종 임금을 연금시킨 일들은 조선 백성들을 분노케 했다. 왕명을 전달받은 군중들은 험악했다.

수행원들은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지만, 김홍집은 사양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은 천명(天命)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에워싸여 뭇매를 맞고, 타살되었다. 그때 나이 55세였다.

1842년 참판 김영작(金永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홍집은 1868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관계에 들어갔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청국 공사관에 들렀다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들고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원래 친청파였다. 갑신정변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상대로 협상할 때 한발도 물러서지 않아 일본측이 당황해하기도 했다. 고종과 청국 사이가 뒤틀어졌을 때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총리대신으로 발탁되었다.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돌아선 것이다. 그게 그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나라가 기력을 상실해 청나라와 일본으로, 러시아로 질질 끌려다니는 것 자체가 총리대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 본질일 것이다.

김홍집이 포살된 직후,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鄭秉夏),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등은 성난 군중들에 맞아 죽었고, 유길준(兪吉濬) 등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 목숨을 건졌다.

총리대신의 죽음은 그보다 더 큰 국왕의 파천에 의해 묻히고 말았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도운 앨런 미국 공사의 추천에 따라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하는 친미·친러 내각을 발족시키고 친정 체제로 들어갔다. 아울러 갑오경장의 개혁조치를 무효화시켰다.

 

복원된 ‘고종의 길’ (왼쪽은 미 대사관, 오른쪽은 선원전) /문화재청
복원된 ‘고종의 길’ (왼쪽은 미 대사관, 오른쪽은 선원전) /문화재청

 

한 나라의 국왕이 어찌 외국공사관에 피신할수 있단 말인가. 백성들은 고종의 아관 피신이 병신년(1896)에 일어났다 하여 고종이 병신됐네 병신됐네하고 놀렸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수명은 10년 정도 더 늘어났다.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공보처 장관을 역임한 오인환씨는 저서 고종시대의 리더십에서 아관파천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수 없다고 했다. 오인환씨는 고종은 일본군의 손아귀에 놓인 경복궁을 탈출함으로써 생명의 위협, 왕권 고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친일 내각을 붕괴시키고 친미·친러 내각을 발족시킴으로써 왕권을 되찾을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그는 가장 주목되는 점은 민비를 시해하고도 뻔뻔스럽게 한반도 침략 공장을 계속 벌이고 있던 일본에 회심의 일격을 가할수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꺾고, 을미사변으로 민비를 시해한 일본 보수정객들이 고종의 아관파천에 땅을 치며 후회했다. 이제 일본은 러시아를 꺾어야 조선을 먹을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도 일본 못지 않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고종은 여우를 피해 도망갔다가 호랑이 굴에 뛰어든 셈이 되었다.

 

엄 귀비(순헌황귀비) /위키피디아
엄 귀비(순헌황귀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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