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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자주독립, 민권운동…準의회 문턱까지 갔다 고종 반대로 좌절
고종 vs 독립협회, 절대군주 vs 입헌군주 대치
2020. 02. 25 by 김현민 기자

 

독립협회는 189672일에 설립되어 18981225일 해산될 때까지 2년반 동안 조선(대한제국)의 자주적 독립과 민권운동을 벌인 민간단체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移御)했을 때 만들어져 대한제국을 수립해 황제로 오른 초기에 고종과 호흡을 같이하며 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에 힘썼다.

하지만 고종황제와 독립협회는 권력을 나눌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고종은 칭제(稱帝)를 통해 절대군주를 지향했고, 협회는 국민주권을 반영해 권력을 나누자고 했으니, 두 정치세력은 끝내 힘의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의 귀국에서 시작된다. 그는 10대에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를 알게 되었고 1882년에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 군사학교에 수학하며 신지식과 군사교육을 받았다. 18847월에 귀국해 그해 12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거사가 실패하는 바람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 21세의 나이에 그는 미국에서 노동과 독학으로 의학을 공부했고,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롬(Muriel S. Armstrong)과 결혼해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영문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10년간 미국 생활은 그에게 민주주의와 근대화에 대한 식견을 높여 주었다. 1994년 을미사변으로 갑신정변 주역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개화파 동지였던 박영효가 입각하면서 서재필의 귀국을 종용했지만 병원일과 결혼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1895년 다시 망명한 박영효가 미국으로 돌아와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서재필은 1896122511년만에 다시 고국 땅에 발을 밟았다.

 

서재필과 부인 뮤리얼 (1930) /위키피디아
서재필과 부인 뮤리얼 (1930) /위키피디아

 

조선에 돌아온 그는 대신급인 중추원 고문관이 되었고, 이어 건양협회(建陽協會)를 조직하고 한성상무회의소를 발족해 석유 직수입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가 개발되어 오일붐이 일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석유가 신에너지의 주축이 될 것으로 보고 미국에서 석유를 직수입할 것을 모색했다. 조선의 석유공급을 독점하던 일본 상인들이 서재필을 견제했다. 일본은 서재필과 함께 석유수입사업을 추진했던 김가진(金嘉鎭)을 도쿄 경시청에서 구속함으로써 석유 사업을 포키토록 만들었다.

서재필은 사업을 포기하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가 조선에 돌아온지 얼마후에 고종의 아관파천이 있었고, 친미파 박정양(朴定陽)이 총리대신이되었다. 서재필은 박정양의 지원을 얻어 18964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 /위키피디아
독립신문 /위키피디아

 

독립신문은 창간호로 1천부를 찍었는데, 반응이 뜨거워 곧바로 발행부수를 3천부로 늘렸다. 당시는 신문이 귀한 시절이어서 신문 한부에 독자가 2~3백명이나 되었다. 또 영문판으로 인디펜던트'Independent)를 발행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정을 알려 주었다.

여론 매체를 갖게 되면서 서재필은 곧바로 사회운동에 나섰다. 그의 첫 사회운동은 독립문 건립이었다. 18966월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마중나가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구상하고, 7월에 사업추진단체로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독립협회 출범에 러시아 공사관이 이어해 있던 고종이 적극 도왔다. 고종은 기대했던 러시아의 미온적 태도에 실망해 새로운 세력의 지지를 필요로 했고,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 건립이 자신이 구상하는 조선의 주체성 강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재필의 입장에서도 10여년전 갑신정변이 대중적 지지 없이 추진되어 실패한 점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데 군주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독립협회는 고종의 지원과 대중적 호응에 힘입어 쉽게 독립문 건설 비용을 추렴했다. 전현직 관료로 구성된 발기인 16명이 510원을 갹출하고, 황태자가 1천원의 거금을 하사했다. 7천명의 소액기부자로부터 59백원가량을 거뒀다. 건립 기금의 80% 이상이 1원 이하 소액을 기부한 백성들이었다는 점에서 독립협회는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했다.

파리 개선문을 본 따 디자인도 마련되었고, 1897523일 독립관 현판식이 열렸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문 /위키피디아
대한제국 시절 독립문 /위키피디아

 

독립은 청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난 자주를 의미했다. 자주와 독립이라는 명분에는 고종과 독립협회는 공생관계에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적인 나라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칭제 상소가 올라오고 있었다.

고종은 절대군주제를 구상했다. 강화된 왕권을 토대로 내각과 군대를 장악하고 근대화를 일으킬 생각을 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자신의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독립협회 주축인 서재필과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민권이 바탕이 된 군주제, 즉 입헌군주제를 원했다. 절대군주제와 입헌군주제는 권력의 배분에 차이가 있다. 절대군주는 모든 권력을 갖는데 비해 입헌군주제는 헌법의 통제 하에 의회에 권력을 넘기고 군주는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일본에서 공부한 윤치호는 메이지유신의 입헌군주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독립문 건립의 틀이 마련된 직후 윤치호는 서재필을 찾아가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전환하고 토론회 개최를 열어 지지자를 확보하자고 했다.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뜻이 통했다.

첫 토론회는 1897829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란 주제로 열렸다. 이후 토론의 주제는 산업개발, 국가부강책, 자주권 확보와 안전보장, 도로·위생·안전관리, 보건사회정책, 인권문화정책등을 두루 아울렀고, 토론 과정에서 찬반의 시비를 가리는 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토론은 20개월이나 계속되었다. 토론회가 진행되면서 조선지배층의 추악성, 외세의 개입 등이 토론에 붙여지고 급진과 온건 세력이 나뉘고 일부 봉건세력들이 이탈하게 되었다.

189710월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수립했다. 한편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Alexis de Speyer)의 압력이 거세지고, 외세와 결탁한 봉건관료들이 국가의 이권을 열강에 넘겨주려는 기미가 드러나 국가의 위기가 드러나게 되었다. 일부 보수세력은 독립신문을 정간시키려는 공작도 발생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활동방향을 계몽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전환했다. 1898220일 독립협회는 국난극복을 위한 구국선언과 상소를 결의했다. 이때부터 독립협회의 대정부투쟁이 시작된다.

이 무렵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 군항과 연결하기 위해 부산 앞 절영도를 조차해줄 것을 요구했다. 독립신문은 러시아의 조치가 주권 침해라며 강력히 성토하는 논설을 연일 게재했다. 러시아측은 독립협회가 유독 러시아에 반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조선 정부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을지를 24시간 내에 알려달라고 통보했다. 독립협회는 310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했다. 이 모임에는 1만여명의 시민이 참여했는데, 독립협회의 첫 만민공동회였다.

고종이 러시아 지원을 거부하는 공문을 보내자 러시아측은 즉극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철수했다. 러시아의 철회는 독립협회에 큰 힘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5월에 프랑스의 광산체굴권 요구를 거부하라고 정부에 건의해 성사시켰고,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모욕한 독일 영사를 추방하라고 규탄해 사과를 이끌어 냈다.

 

고종과 협회 사이에 결정적으로 금이 간 것은 1898915일 황실 경호원으로 외국인 용병 30명을 고용하려는 것을 반대한 일이다. 독립협회는 신문을 통해 황실의 방침을 비판하고 군중대회를 열어 성토했다. 고종은 1년치 비용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을 출국시켜야 했다.

그동안 열강의 이권 침해에 반대하던 협회가 고종과 정부를 비판하면서 고종은 독립협회를 멀리하게 된다.

그해 10월 독립협회는 고종 독차사건 처리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이 사건은 친러파 김흥륙(金興陸)이 독차(毒茶)를 타서 고종을 암살하려다 고종이 커피 냄새가 이상해 뱉어내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김흥륙은 심한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되었다. 독립협회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기본적 인권이 있으며, 과거의 참형을 부활하려는 관리의 파면을 요구했다. 고종은 협회가 자신의 목숨을 해하려 한 역적을 두둔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만민공동회의 절정은 그해 1028일 황국협회, 협성회, 중앙총사회등 각계각층에 초청장을 보내 종로어세 개최한 관민공동회였다. 이 회의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6개 항의 건의문을 채택했다. 이날 집회에는 박정양등 내각도 참여했다.

헌의6(獻議六條)로 불리는 건의사항은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해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표할 것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 중의에 따를 것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등이다.

 

1898년 만민공동회 /국가보훈처
1898년 만민공동회 /국가보훈처

 

박정양은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어 114일 중추원 개정안을 공포했다. 이로써 중추원이라는 의회의 중간쯤 되는 기구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렀다. 박정양 내각은 중추원 의관(의원) 50명 가운데 25명을 독립협회가 담당한다는 약조에 따라 다음날(115)까지 명단을 넘겨달라고 했다.

그러나 114일 밤 서울 광화문 곳곳에 독립협회를 역모로 모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조선 왕조가 이미 쇠퇴했으므로, 만민이 공동하여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이라는 벽보는 참정 조병식, 군부대신 유기환, 협판대신 이기동이 공모해 잡배들을 시켜 붙인 것이었다.

보고를 받고 고종은 놀랐다. 조병식은 한술 더떠 독립협회가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부대신, 정교를 외부대신으로 하고, 국체를 공화정으로 개편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그렇지 않아도 독립협회를 곱게 보지 않던 고종은 사실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이상재, 정교, 남궁억 등 협회간부 17명을 체했다. 윤치호등은 도주했다. 고종은 이어 독립협회를 혁파한다는 칙령을 내리고 헌의6조를 올린 박정양 내각을 사퇴시켰다. 아울러 중추원 관제와 헌의6조를 무효화했다.

 

독립협회 간부 체포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만민공동회를 구성해 투쟁에 나섰다. 시정 상인들도 철시하며 독립협회를 응원했다. 117일 이상재 등 17명은 재판소로 이송되었고, 수만명의 시민들은 재판소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군부대신 유가환은 군대를 동원해 진입하려 했으나 워낙 많은 군중들이 참여한데다 일부 군인들이 만민공동회에 동조, 명령을 어기는 일이 일어났다. 고종은 하는수 없이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태형 40대의 가벼운 형을 선고해 모두 풀어주었다.

하지만 1121일 전국 보부상들의 모임인 황국협회 회원 2천여명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몽둥이로 무장하고 농성중인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이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만민공동회를 지원했고 보부상들은 시민들의 기세에 놀로 모두 도망갔다.

고종은 이번에는 독립협회를 모함한 조병식, 유가환, 이기환을 재판에 회부하고, 길영수,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을 유배 보내 독립협회 측과 화해를 모색했다. 만민공동회는 조병식등 8명의 역도 처벌 황국협회 해산 현명한 대신 기용을 내걸고 1123일 해산했다. 고종은 2일간의 시한이 지나도록 요구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

1126일 또다시 수만명의 시민들이 종로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그날 오후 2시반 고종황제는 몸소 덕수궁 돈례문(敦禮門) 군막에 나가 만민공동회 대표들과 만났다. 조선 역사상 군주가 백성 대표와 만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대표들은 독립협회를 다시 세울 것 대신들을 잘 선택해 임명할 것 부부상회를 혁파할 것 헌의6조를 실시할 것 조병식등 8인을 처벌할 것등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부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어 오후 4시 고종은 보부상 2백여명을 만나 요구조건을 들었다.

1129일 고종은 약속한 대로 중추원 의원 50명을 선정하겠다고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측 17, 황국협회측 16, 황제측 17명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약속 이행을 지연시켰다. 그러자 만민공동회는 다시 126일 집회를 열어 고종에게 약속 이행을 압박했다. 고종은 하는수 없이 중추원을 개원키로 했다. 의장에 황제측 이종건, 부의장에 독립협회측 윤치호가 뽑혔다.

그런데 독립협회측이 추천한 중추원 의관 11명에 고종이 눈썹을 치켜뜨게 된다. 그 명단에는 박정양, 한규설, 윤치호, 서재필 이외에 박영효가 포함되었다. 박영효는 청일전쟁 직후에 친일 내각에 참여했다가 민비를 시해한 혐의로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고종은 김옥균만큼이나 박영효를 미워했다. 고종은 대역죄인을 천거한 것을 트집잡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키로 결정했다.

만민공동회 집해가 18일째 계속되던 12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강제해산했다. 이틀후 1225일 독립협회를 불법화하며 강제해산했다.

 

현재의 독립문 /문화재청
현재의 독립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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