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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조선분할-만선교환 협상 실패후 전쟁 돌입…영국, 일본 지원
일본, 영일동맹으로 육군대국 러시아 제압하다
2020. 02. 27 by 김현민 기자

 

세기가 바뀌어 1900년이 되면서 일본에서는 러시아와 어떤 형태이든, 한번 붙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청일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뺏은 요동반도의 여순(旅順대련(大連)을 러시아가 날름 심키고, 민비를 시해하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제압하려던 조선도 러시아의 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든 것이 중국이 물러간 자리에 러시아가 차지하며 동아시아 대륙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는 전쟁으로 러시아를 꺾자는 강경파와 협상으로 만주와 조선을 분할하자는 온건파로 나뉘었다. 강경파의 주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가쓰라 다로(桂太郞), 도고 헤이하치로(東鄉平八郎) 등이고, 협상파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이었다.

두 논리의 차이는 러시아의 군사력을 어떻게 보느냐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대 최강의 육군을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이면 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가쓰라 등은 러시아가 강하지만 극동의 군사력은 약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고립시킬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갈래의 논점은 팽팽하게 맞서며, 주장자들은 각자의 방식을 밀고 나갔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러시아와 협상에 나섰고, 가쓰라 등은 영국과 동맹 체결에 주력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한양에 입성한 일본군 /위키피디아
1904년 러일전쟁 때 한양에 입성한 일본군 /위키피디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190011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에 만선교환(滿鮮交換)을 제안했다. 즉 만주의 이권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조선은 러시아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거부했다. 한반도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역으로 한반도를 북위 39°에서 분할하자는 안을 제안했다. 북위 39°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으로, 한반도 지형상 가장 좁아 방어에 유리한 곳이다. 이토는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남의 나라 땅을 제멋대로 흥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 분할론은 을미사변·아관파천을 거치며 일본이 조선에서 배제되었을 때 러시아에게 38° 분할을 제의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가 일본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번엔 러시아가 북쪽으로 올려 제의했지만 일본이 거부한 것이다.

39° 분할론은 일본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19008월 총리였던 야마가타가 39°에서 조선을 분할하면 전쟁을 피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때 러시아가 거절했다. 몇 달 후에 러시아가 야마가타의 분할안을 역제안했을 때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로의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39° 이남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 했고, 러시아는 만주 외에도 한반도에 발을 걸치려 한 것이다.

이토의 러시아 방문은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무렵 가쓰라 내각은 영국과의 동맹 교섭을 활발히 진행했다. 강경파들은 당대 최대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과 손잡지 않으면 전쟁에 이기더라도 3국간섭으로 모든 걸 내놓아야 할 상황이 재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이토는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프랑스와 독일을 적으로 돌리게 되므로 러시아와 협상하는 것이 상책이라 했다. 하지만 협상론자들이 러시아의 비타협적 태도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자, 강경파들은 영국과의 협상을 빠른 속도로 밀어붙였다.

영국은 베이징 의화단 사건(1900)에 파병된 일본군의 역량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열강은 의화단 진압을 위해 8개국 연합군을 파병했는데, 일본은 그중 절반인 22천의 대군을 파병했다. 영국은 러시아 남진을 막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중앙아시아 등 분쟁지역을 감당해야 헸기 때문에 동아시아에 충분한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 해군의 부족함을 일본군이 메워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독일 빌헬름 2세와 러시아 니콜라이 2세는 황화론(黃禍論)에 공감하고 있었다. 주창자인 빌렐름 2세는 황색인종을 세계의 활동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며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지지했다. 빌헬름과 니콜라이는 러시아 파벨 1(Pavel I)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을 이어받아 서로 사촌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서쪽 경계가 안전하다고 본 니콜라이는 일본과 전쟁을 하면 이길 것이라 낙관했다.

러시아는 190011월 만주 봉천(奉天, 선양) 지역의 청국 사령관 증기(增祺)에게 압력을 넣어 만주지역 철도 주변에 군대를 주둔할수 있도록 비밀협약을 맺었다.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만주 지배를 공식화했다.

 

가쓰라 내각은 영일 동맹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02212일 영일동맹이 공포되었다.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제3국과 교전할 때 타국은 중립을 지키고, 상대가 복수일 때에는 원조를 하고 연합 전투에 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유효기간은 5년이었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화려한 고립정책을 마무리하고 아시아의 황색인종 국가와 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영일 동맹은 일본에게 큰 이득을 주었다.

우선 전쟁 준비를 하는 일본은 당시 최고 선진산업국이었던 영국에서 최신 전함 6, 장갑함 4척을 발주, 구매할수 있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는 영국에서 군함을 건조하지 못해 이제 막 산업화에 들어간 이탈리아에 주문해야 했다.

결정적인 것은 러시아 함대가 영국 관할 하의 항구에 입항하지 못하고 수에즈 운하 통과가 거부되었다는 사실이다. 러일 전쟁이 터졌을 때 러시아 주력해군 발틱함대가 멀리 아프리카를 돌아 오는 바람에 쓰시마 해협에서 괘멸당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일본은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은 어느 시점에서 러시아와 손을 떼고 중립으로 돌아섰고, 미국은 영국 편이었다.

전비 조달도 쉬웠다. 영국은 당시 세계금융시장을 쥐고 있었고, 일본은 전비의 44%를 영국과 미국에서 조달했다. 이에 비해 러시아는 전비의 3분의1을 프랑스와 독일에서 얻어 와야 했다.

 

일본 해군의 여순항 포격 /위키피디아
일본 해군의 여순항 포격 /위키피디아

 

전쟁은 예고되었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전쟁을 걸어오지 못할 것이란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1903년말 러시아는 조선 영토 가운데 북위 39° 이북을 중립지대로 만들어 양국군이 진입할수 없도록 하자는 안을 제안했다. 일본은 거절했다. 일본 고무라 외상은 1014일 조선과 만주 경계에 각각 50km의 중립지대 설치안을 제의했다. 만선교환론의 연장선이다. 협상은 교착 상태로 빠졌다.

190424일 일본은 어전회의를 열어 러시아와 일전을 치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쟁은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28일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해군이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에 어뢰 공격을 감행해 러시아 전함 2척이 침몰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선제공격후 이틀후인 210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일본은 곧바로 대한제국에 압력을 넣어 223일 한국이 일본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의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대한제국은 전쟁 발발 직전인 123일 대외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 조약으로 사실상 중립이 무산되었다.

 

러시아 발틱함대의 항로 /위키피디아
러시아 발틱함대의 항로 /위키피디아

 

일본 육군은 서울에서 북진해 5월초에 압록강변에서 러시아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군 3천명, 일본군 1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러시아는 패주했다. 일본군은 30만에서 90만으로 증원되었고, 러시아군은 130만명이 투입되었다. 만주에 양국군 2백만 이상이 뒤엉켜 전투가 벌여졌다.

여순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망자 58천명으로 러시아군 사망자 31천명보다 더많은 희생을 보았지만, 러시아군을 퇴각시켰다. 양측이 기관총으로 무장해 상대방을 무차별 사격하는 바람에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봉천 전투도 러시아 85천명, 일본군 7만명을 잃으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일본군에게 승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전투는 대서양을 돌아 들어온 발틱함대였다. 190558개월의 기나긴 항해 끝에 러시아 발틱함대가 대한 해협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한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특 항으로 가서 수 리겸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일본 해군이 그 틈을 주지 않았다. 도고 제독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러시아 함대에 포격을 가했다. 러시아는 전함 8척과 많은 소함정, 5천명 이상의 인원을 잃었고, 일본 해군이 잃은 것은 어뢰정 3척과 116명이었다. 러시아 해군 3척만이 블라디보스톡으로 빠져 나갔다.

 

1905년 포츠머스 조약 협상장면. 양측 가운데 사람이 러시아의 비테 재무장관과 일본 고무라 외상이다. /위키피디아
1905년 포츠머스 조약 협상장면. 양측 가운데 사람이 러시아의 비테 재무장관과 일본 고무라 외상이다. /위키피디아

 

일본은 육상과 해상에서 러시아에 완벽하게 승리했지만, 기진맥진했다.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은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러시아를 협상테이블로 끌어 오도록 제안했다.

95일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의 중재로 승전국 일본과 패전국 러시아의 대표가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 북쪽 해안에 있는 포츠머스(Portsmouth) 해군기지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조약에 일본에선 전권대사로 고무라 외상이, 러시아에선 전권 대사로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 재무장관이 참석했다.

전문 15개조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장춘(長春)~여순(旅順)간 남만주철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전쟁배상금 조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할양한다 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나라에 승리하고, 10년 후에 또다시 러시아에 승리했다. 러일전쟁의 전세가 일본의 승리로 결정되자 약삭빠른 미국은 19057월 일본과 비밀 협상을 벌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에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얻어내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합의해 두었다.

결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 편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미국이 자기 것을 챙긴 연후에 일본에 손을 들어주는 조약을 미국 땅에서 체결하도록 주선한 것이다.

이제 조선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졌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두달후인 1117일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을사오적은 을사늑약 체결에 도장을 찍었다. 이로부터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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