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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시대
러일전쟁 직후 이토 히로부미, 고종 겁박해 체결…조선, 일본의 보호국으로
을사조약 체결에 비분강개…전국적인 의병운동
2020. 02. 28 by 김현민 기자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날은 190595일이다. 그로부터 두달도 안된 1028일 일본 각의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지배할 것을 의결했다.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대한국 황실뮈문 특파대사라는 명함을 주어 조선에 파견했다. 이토가 서울에 들어온 날은 119일이었다.

이토는 정동 손탁호텔에 숙소를 정해 놓고 다음날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 각의에서 결정한 협약서를 주었다. 고종은 이토에게 그 안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이토는 고종을 위협했다. “폐하의 불만은 알겠다. 그러나 조선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생존해 왔는지 아는가. 조선의 독립이 누구의 덕에 유지되었는지 아는가. 이런 사실을 알고 불만을 말하는가.”

고종은 아랫사람에게 돌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대한 문제에 당면하면 대소 문무백관과 상의하고, 전국 유생들과 백성들로부터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 국왕의 도리다. 따라서 이 문제를 나 혼자 단독으로 처리할수 없다.”

이토는 강하게 말했다. “각료에 하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귀국은 군왕 전제로서 만기일통의 친정을 하고 있다. 폐하가 백성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백성들을 선동해 일본의 제안에 반대하도록 하려는 것 아닌가.”

고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짐이 한 몸을 던져 나라에 바치는 한이 있어도 결고 이 안을 승인할수 없다.“ 이토는 고종에게 5일 이내에 답변하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위키피디아
을사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위키피디아

 

이토가 고종을 만날 때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일본 공사는 박제순 외부대신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조약문을 건네주고 1116일까지 의견을 모으라고 말했다.

1115일 오후 이토가 다시 고종을 알현해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대외관계를 일본이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목적은 동양평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에 있을 뿐 다른 것이 없다.”

고종은 일본에 외교권 이양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교권의 형식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여러차례 요청했다.

이토는 고종을 협박했다. “이 안은 일본 정부가 여러 가지 생각을 거듭해 만든 것으로 추호의 변경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다. 움직일수 없는 확정안이므로 폐하의 결심 여하에 달려 있다. 승낙하든지, 거부하든지 자유이지만, 일본 정부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에 거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나도 알수 없다.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이상으로 곤란한 경우로 전락해 한층 불이익의 결과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곤스케 공사간에 교섭이 끝나면 의정부 회의에서 결정하겠다고 책임을 내각에 돌렸다고 한다.

 

1116일 오후 4, 이토는 대한제국 각료와 원로대신을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로 소집했다. 참정대신(총리대신) 한규설,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참석했다. 이토는 한국 대신들에게 한사람씩 의견을 말하라고 했다.

한규설은 조선은 일본이 전쟁을 치를 때 다소 협력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법무대신 이하영도 한규설의 의견에 동조했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도 반대했다.

17일 오전 11시 참정대신 한규설 등 8명의 대신이 일본공사관에 모여 조약 교섭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의견을 내놓지 않고 눈치만 보았다. 대신들이 결론을 내지 못하지 하야시 공사는 대신들과 덕수궁으로 가 고종의 알현을 요청했다. 고종은 몸이 불편하다며 하야시의 알현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들과 어전회의를 열었다. 모두 반대의견이었다.

 

을사조약 체결후 기념사진 /역사박물관, 코넬대학교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사진
을사조약 체결후 기념사진 /역사박물관, 코넬대학교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사진

 

그날 오후 8시 이토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거느리고 입궐했다. 이토는 고종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고종은 만나주지 않았다.

이토는 대신회의를 주재하며 대신들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 참정대신 민영기와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반대했다. 박제순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이토가 찬성으로 적었다.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찬성했다. 53, 이토는 다수결 원칙에 의해 가결되었다고 선언했다. 1118일 새벽 1,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늑약(勒約)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란 뜻이다. 절대군주국에서 황제의 동의나 도장이 없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견이 있다.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이 나중에 올린 상소문에는 고종이 재가만 하지 않았을 뿐 조약안을 자세히 살피고 문구 수정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일본측 사료는 이토가 정부 대신들을 강요해 수정한 조약안을 궁내부대신 이재극과 외부대신 박제순이 어전에 가지고 들어가 황제의 재가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여하를 떠나 고종이 비겁했던 것은 사실이다. 황제가 끝까지 반대했다면 을사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인 김용삼씨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그날, 고종이 조약문을 보태거나 깎을 것을 법부대신이 일본대사, 공사와 교섭하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약문이 일부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을사조약문 /위키피디아
을사조약문 /위키피디아

 

어찌되었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직한 대신과 백성들의 비분강개가 터져 나왔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통해 ,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그저 편안히 살아남아서 세상에 나서고 있다.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폐하를 대하며,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대하겠느냐.”며 통탄했다.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저항하고, 시종무관 민영환, 특진관 조병세, 법부주사 송병찬, 전 참정 홍만식, 참찬 이상상, 주영공사 이한응, 학부주사 이상철, 병정 전봉학, 윤두병, 송병선, 이건석 등 전현직 관리들이 목숨을 던졌다. 심지어 청국인 반종례(潘宗禮)와 일본인 니시사카 유타카(西坂豊)도 투신자결하며 일본의 침략행위에 항거했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무장투쟁을 벌였다. 을사조약 직후 의병투쟁 가운데 충청남도 당진 앞바다의 소난지도 투쟁을 짚어보자.

당진 앞바다에 소난지도(小蘭芝島)라는 자그마한 섬이 있다. 면적 2.63. 북쪽으로 400m 지점에 대난지도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당진시 석문면 난지2.

충남지역에선 당진, 서산, 홍주, 경기도의 수원 등지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났다. 충남 당진에서는 최구현(崔九鉉) 의병장이 의병항쟁을 펼쳤다. 최구현 선생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서울에 근무하던중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자 관직을 내던졌고,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구국운동에 나섰다.

1906년 봄, 선생은 당진 송악읍 기지시리에서 창의도소(創意都所)를 설치하고 창의문을 공표하고 일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았다. 그 때 모인 의병이 370.

417일 초저녁 선생의 의병군은 왜군이 점거한 면천성을 공격해 첫 승전고를 울렸다. 당시 <황성신문>은 의병들이 관리들을 포박하고 무기 등을 탈취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의병들은 맨주먹 단심의 의지로 참여했지만 무기가 열악했다. 화승총과 농기구가 유일한 무기였다. 이 것으로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수 없었다. 이날 전투는 다음날 새벽까지 전개됐다. 일본군의 식신총포의 위력에 상당수의 의병들이 숨지거나 부상을 당했다.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의병들을 해산하고 목숨을 각오하고 싸울 결사대 36명과 함께 왜병의 추격을 피했다. 낮엔 산에 숨고 밤에 행군해 423일 소난지도에 도착했다.

이미 그때 당진 의병과 화성 의병장 홍일초의 군사 40여명이 그 섬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서산의병 김태순 등 28명이 합류한데 이어 홍주에서 패한 차상길 등 15명의 의병이 도착했다. 도합 120여명.

의병들이 소난지도로 집결한 것은 난지도가 조선조 조세선의 중간 정박지로, 조세미를 전투자금으로 활용할수 있었고, 밤에 배를 타고 일본군의 주둔지를 야간습격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패전시 살아남은 의병들이 배를 타고 간도로 건너가 재기를 도모코자 함이었다.

더 이상 일본과의 전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의병들은 간도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를 알아챘다. 75일 새벽 왜군과 그들의 앞잡이가 된 관군 230명이 소난지도를 기습해 최구현 의병장을 체포하고 의병들을 무차별 살상했다.

최 의병장은 면천 감옥에 갇혀 형언할수 없는 고문에도 투항을 거부하다가 경각에 이르러 출옥했지만 곧바로 운명했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추모제 / 당진시청 홈페이지
소난지도 의병 항쟁 추모제 / 당진시청 홈페이지

 

하지만 의병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06년 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은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퇴해 다시 소난지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새로 가담한 의병들도 이 섬으로 피해 왔다. 다시 뭉친 소난지도 의병군은 홍원식(洪元植)이 인솔하고, 100여 명으로 구성됐다.

독립기념관의 사료에 따르면 당진 소난지도에 근거지를 둔 의병들은 해상으로 당진 일대의 육지에 상륙하여 일본주재소나 관아를 공격했으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홍성경찰분서에서는 소난지도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190831315명으로 구성된 추격대를 편성하여 소난지도에 파견했다.

1908315일 아침 6시경. 일본경찰대는 소난지도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의병으로부터 선착장에서 반격을 받아 우회하여 마을 뒤쪽으로 상륙했다. 의병은 지형을 이용해 일본경찰대에 항전했지만, 탄약이 고갈되어 일본경찰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의병들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자 하였으나 발각되어 5명이 순국하였다. 또 섬의 동남쪽에 있는 돌각지점에서 경찰대의 집중 총격을 받아 14명이 순국하였다. 나머지 의병들은 바닷물에 뛰어 들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으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 소난지도 전투에서 의병은 100여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확인된다. 9명이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으나 이들 역시, 현장에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목격자들의 채록에 의하면, 온 종일 총소리가 콩볶는 듯하였고 피맺힌 절규와 비명소리가 진동하였으며, 화약 연기가 온섬을 뒤덮었다고 한다. 격전지 맞은편인 교로리와 삼길포에서는 어부들의 그물에 의병들의 시신이 걸려 올려지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일본 경찰 홍주분서장이 경무국장이 보낸 소난지도 전투상황보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진군 소난지도에서 폭도를 토벌한 것을 보고한다. 이 폭도는 작년(1907) 가을부터 경기도 수원군을 오가며 난지도 부근 도서에 자주 상륙했다. (19083) 15일 오전 6시 소난지도에 도착, 정찰중에 적은 민가 좌우에서 발포했다. 적은 완강히 저항했다. 추적해 접전하기를 수십번 했다. 적의 대부분을 이 섬 동남의 돌각(突角)까지 추격, 22명을 죽였다. 북방 일대 바위 동굴 속에 잠복한 적이 다시 맹렬히 사격해 5명을 죽였다.

14명을 돌각으로 압박해 죽였다. 바다에 투신한 적이 50명 내외였으며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부상당한 적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의병으로 양식 준비를 하고 봄에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타 방면의 도당과 연락하여 크게 활동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의병들을 폭도와 해적으로 묘사, 토벌을 정당화했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선원과 부상한 의병까지 학살, 잔학상을 드러냈다.

충청문화연구소는 홍주분서장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쓰인 황성신문’ 1908324일자 기사를 발굴, 소난지도 의병항쟁의 실체를 규명해냈다.

 

소난지도 의병들의 패인은 무기였다.

당시 의병이 사용한 무기는 화승총이었고, 일본군은 명치 38식 소총이었다.

화승총은 임진왜란 때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개량된 총으로 3~4인이 불을 붙여 조준했고, 유효사거리는 100m에 불과했다. 또 눈이나 비가 오면 사용할수 없었다.

일본의 명치 소총은 1905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당시 최신무기였다. 볼트-액션 격발장치로, 최대 3km, 유효사거리 365m였다. 5연발식이었으며,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을 자랑했다. 은장도와 광선검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15명의 일본군에 100여명의 의병이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이 무기대결에서 압도적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의 정신은 훗날 1919년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또다시 전국 곳곳에 독립운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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