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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와 결혼…민비 시의로 구한말 조선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
구한말 조선 실정을 생생히 전한 릴리어스 호튼
2020. 03. 06 by 김현민 기자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구한말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며 의료와 교육 분야를 개척한 미국인이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간 그는 신학을 공부한 후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요청으로 H. G.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선교사로 되어 조선에 입국했다.

그의 부인이 된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은 남편보다 3년 후인 1888년에 조선에 입국했다. 릴리어스는 뉴욕주 올바니에서 태어나 시카고 의대를 다녔고 장로교의 요청으로 조선에 왔다. 그녀는 민비의 시의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인 광혜원(廣惠院)에서 부인과 책임자로 일했다.

입국한 다음해인 1889년 릴리어스는 언더우드와 결혼했다. 남편의 한국명은 원두우(元杜尤), 릴리어스의 한국명은 원호돈(元好敦)이다.

언더워드 부부는 신혼여행과 선교여행을 겸해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순회했다. 이듬해에 아들 원한경을 낳았다.

 

릴리어스는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던 18883월의 어느날 나는 제물포 항구에 내렸다. 나지막한 언덕의 헐벗고 뾰족한 능선을 배경으로 펼쳐진 돌 투성이의 해안으로 나는 눈길을 돌렸다. 모래밭 대신에 냄새 나고 끈적거리는 삭막한 개펄이 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

거칠고 검은 그들의 긴 머리털은 빗질을 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는데 더러는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리기도 했으나 거의가 머리 꼭대기에 되는대로 매듭을 묶어 놓았다. 목과 얼굴 언저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은 흉측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생김새로 보아 그들은 몽고족이었고 입고 있는 옷 말고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 그다지 다를바 없었으나 []

나는 바로 이 사람들과 함께 일하러 왔다. 내 사랑하는 조국의 숲과 교회가 있는 언덕대신에 내가 택한 곳이 바로 이 나라였다. []

이 성문을 들어서면서 우리는 지붕을 짚으로 이거나 기와로 인 나지막한 흙집이 양 쪽으로 늘어선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보았다. 흔히 이 도시는 마치 거대한 버섯 단지처럼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에는 일층보다 높이 지은 집이 한 채도 없기 때문이다.“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했다. 그 책의 이름이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였다. 번역하면 상투쟁이들과 함께한 15인데, 국내에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이다.

 

릴리어스가 조선에 왔을 때 나이는 37. 그녀는 언더우드와 함께 30년 이상 격동기의 조선 땅에 살면서 기독교 선교 활동뿐 아니라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 사회 사업 등에 전력하다 1921년 서울에서 사망해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녀는 조선견문록에서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세력이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던 그 시기에 동학운동과 갑오개혁, 청일전과, 을미사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조선에 대해 꼼꼼히 정리했다. 단발령과 아관파천, 을사조약,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같이 격변의 시대 상황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 책은 그녀가 체험한 한국 근대사를 엿볼 수 있다. 남편 언더우드와 신혼여행으로 조선의 구석구석 여행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호랑이와 산적이 출몰하고 풍토병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던 조선에서의 신혼여행, 시의로서 바라본 명성황후의 인간적인 모습, 고종과 세자를 비롯한 왕실과 그 주변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얘기 몇가지를 정리해 둔다.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위키피디아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위키피디아

 

대원군에 대한 평가

지금의 임금(고종)은 자식이 없었던 먼저 임금의 양자였다. 먼저 임금의 아내(대비)는 지금 임금의 아버지(대원군)에게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해 주도록 지명했다. 이 노인은 정권에 대한 욕심이 아주 많은 빈틈이 없고 교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로 남에게 정권을 넘겨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친구의 집안에서 자기가 쉽게 조종할수 있을 만한 여자를 골라 며느리(민비)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며느리의 성품과 재질을 잘못 보았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임금이 정치를 맡을 만큼 자란지 오래 되었건만 대원군은 정권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조선 사람들이 그렇게 배워 온 것처럼 임금도 자기 아버지에게 양순하게 복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강제로 내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에 그 노인은 왕비의 쿠데타로 자신이 이미 면직 되었으며 왕비의 친구들과 사촌 형제들로 새로운 내각이 짜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때부터 며느리를 파멸시킬 준비를 했다.”

 

왕비의 선물

그 소중한 날(언더우드와 결혼하는 날) 아침에 조랑말들의 방울소리가 우리 앞마당에서 들려왔다. 나는 곧 그 앙증맞은 짐승들의 긴 행렬이 중전마마의 선물을 잔뜩 싣고 도착한 것을 알았다. 자그마치 현금 백만냥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속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때에는 2,500냥에서 3,000냥이 1달러쯤 되었기 때문에, 그 돈은 너그러운 조선 왕비께서 손쉽게 주실만한, 또 선교사 한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였다. 두 분 마마께서는 우리의 혼례에 나인 네댓 사람을 보내 주었다. 군대에서는 아주 계급이 높은 한규설 장군이 대표로 왔고, 내각에서는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며 두 분 마마께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민영환이 참석했다.”

 

명성왕후의 인상

왕비의 머리는 조선의 모든 귀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쪽을 쪘다. 그리고 자그마한 장식(다른 여자들이 이런 장식을 한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짐작컨대, 이 것은 그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인듯하다)을 정수리에 얹고 가는 깜장 띠로 단단히 졸라매고 있었다. 뒤쪽 쪽진 머리에는 산호와 진주, 그밖에 보석들을 박은 기다랗고 정교한 황금 머리핀이 한두개 꽂혀 있었다. 거의 언제나 왕비는 조선여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진주나 호박 단추가 달린 노란 비단 저고리나 조끼, 그리고 아주 길게 질질 끌리는 파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왕비의 옷은 모두 비단이었고, 이루 말할수 없이 우아했다.

중전마마는 장신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고, 거의 걸친 것이 없었다. (커다란 은고리를 즐겨 끼는 북쪽지방의 젊은 소녀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여성들이 귀고리를 하는 경우는 없는데, 왕비도 예외는 아니어서 목걸이와 브로치 또는 팔찌를 한 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수많은 가락지를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무수한 미국의 여인들이 통상적인 수단과 신분과시용으로 사용하는 만큼 그토록 큼직하거나 많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지 않는 유럽산 제품을 한 두 개 낀 것 이상을 본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결코 차본 일이 없는 멋진 시계를 여럿 갖고 있었다. 조선의 관습에 따라 그녀는 기다란 비단 술로 옆구리에 묶어 치장한 상당한 숫자의 금세공 장식을 지녔다. 복색에서 드러난 그녀의 취향이 그토록 소박하고, 그토록 완전하게 세련된 것이라면, 반쯤 문명화한 나라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그녀를 떠올려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청일전쟁 직전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47월에 조선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서울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어느날 아침 우리는 총소리에 잠을 깨었다. 그리고는 곧 대궐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들, 조선사람들이 모두 크게 흥분했다. 모든 외국 공사관에서는 군함이 머물고 있는 항구의 군대에 우리를 보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막상 위험한 경우에 그런 적은 군대가 힘을 쑬 수 있을지는 알수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해병대 쉰명, 미국 해병대 마흔명, 영국 해병대 마흔명, 그리고 독일 해병대 아홉명이 전부였다. 신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조선사람들은 엄청난 공포에 빠졌다. 많은 양반들이 자기 집에서 도망쳐 나와서는 온갖 구실을 다 붙여 외국 공사관이나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평민들은 떼를 지어 시골로떠났다. 가계란 가계는 모두 문을 닫았고, 도시는 마치 돌림병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입을 꾸 다물고 잔쯕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 여자와 가마, 조랑말의 무거운 행렬이 중앙통을 지나 성문 밖으로 끊임 없이 흘러 나갔다. 어린애들의 애처러운 모습이 숱하게 보였다. 부모들이 매정하게 버렸거나 사람들 속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혼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 높은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그들 나라의 오랜 적인 무서운 일본인들에게서 서둘러 도망치고 있었다.“

 

갑신정변

그해에 조선의 정치계에서는 김옥균이라는 이가 진보당 또는 개화당이라고 하는 당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진보나 개혁을 향한 그들의 모든 시도는 사대당에게 쉴 새 없이 꺾였다. 마침내 그들은 어떤 믿을만한 정보(그들은 그렇게 여겼던 것인데)를 입수하여, 124일 한밤중에 그 나라의 저명한 지도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날 저녁에 조선의 우정국의 개국을 축화하는 잔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개화당은 이 자리에서 반대파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먼저 잔치가 열리기 직전에 왕비의 조카이자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던 민영익을 죽이기로 했다. 그때에 우리 선교사였던 알렌 박사가 재빨리 도와주지 않았다러면 그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사대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대궐로 오라는 명령을 받자 그것이 임금의 명령인 줄 알고 갔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들(다섯명)은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에게 살해되었고 대궐은 개화당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우정국은 불에 탔다. 그와 함께 이제 겨우 한번밖에 쓰지 않은 소인도 불에 탔다.”

 

동학혁명

동학당은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을 때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이름 그대로 동양의 가르침이라는 것으로 그 목표는 간단히 말해 동양인을 위한 동양또는 조선인을 위한 조선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서양인과 서양의 사상, 그리고 개혁과 변화를 거부하고, 옛날의 법과 관습을 다시 세우는 것이 소망이요, 목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것이 갑작스럽게 조직되어 놀라울만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된 까닭은 분명히 수많은 썩어빠진 관리들의 지나친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그 관리들은 세금을 부당하게 높이 매겨 사람들을 괴롭혔고 그 결과 불길하고도 무서운 불만이 싹트게 되었다.

동학당은 여러 면에서 중국의 의화단과 비슷하다. 자기들은 죽지 않으며 총을 맞아도 다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온 나라에 퍼졌고 관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 []

공식적으로 청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국은 이 반란을 누르겠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고, 일본인들은 이를 이용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상대방의 동의가 없이는 어느 편도 조선에 군대를 보낼수 없다는 상호 약속이 있으며, 그 약속을 어기면 개전 사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대궐을 포위하고 제물포로 들어오는 중국 군함을 침몰시켰다.“

 

콜레라 발생

모든 일이 아무 희망도 없이 꽉 막혀 버린 바로 그때에 아시아 방방곡곡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다. 조선 사람들이 여름철마다 그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구정물이란 구정물은 좁고 불결한 도랑으로 흐르는데 도랑이 흔히 쓰레기로 막혀서 길거리에 구정물이 넘쳐흐른다. 푸르스름하고 끈적끈적한 물이 마당에 또 길가에 그냥 고여 있고, 우물은 바로 곁의 더루운 옷을 빤 시궁창 물로 더럽혀져 있다. 무더기로 내다버린 나물 찌꺼기가 길바닥에서 또 창문 밑에 그냥 썩고 있었다.”

 

명성왕후 시해

“189510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알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 군대가 새벽 세시에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이며 왕비의 가혹한 적이다)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 것도 알수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몇시간 동안에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 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손자 편을 들어 임금에게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왕비에게 반대하는 음모꾼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 무리의 앞장을 서서 대궐로 들어가 두 분 전하를 사로잡은 뒤에 왕비를 쫓아내는데 이미 그들과 합의를 한 것이었다. []

외국인 두 사람 곧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대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말을 하였다. , 일본인 장교 휘하의 군대가 대궐 마당과 왕족의 처소를 에워쌌다는 것,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일본인 소시’(낭인)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어디 있어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 닥쳤다. []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 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 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를 덮어 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 와서 갑자기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서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원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곧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여ᅟᅥᆻ다. 그리고 불을 붙엿고 뼈 몇줌만이 남았다.“

 

춘생문 사건

수많은 조선인들이 임금을 구출할 갖가기 계획을 세우고 남편을 찾아왔다. 그들은 내 남편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했다. 그는 반역정부(김홍집 내각)에 대한 그들의 반대에 동감을 표시하고 자기도 그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꺼리김 없이 말할수 있었으나 그들의 계획에는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

임금을 구출하는 계획은 매우 은밀하게 짜여졌다. 그래서 그 무리의 지도자인 윤 장군(윤웅렬과 또 한 사람이 그 전날밤 늦게까지 우리 집에 있었으나 선교사들조차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 그러나 임금의 적들은 그 친구들의 계획을 눈치 채고, 염탐꾼들과 변절자들을 통해 곳곳을 다 찾아 내어 자기들의 준비를 완전히 갖추었다. 구출 부대가 대궐로 들어갈 때 성문을 열어주고 입성을 도와주기로 했던 한 장교(친위대장 이진호)가 배신을 하고 사이비 내각에 모든 일을 죄다 털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 “

 

단발령

그들의 긍지와 자존심과 위엄은 모두 빼앗겨 발 아래 짓밟혔다. 어디에서나 잔뜩 찌푸린 성난 얼둘들이 보였고, 집집마다 통곡 소리와 탄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심하게 울부짖었다. 성문에는 파수꾼이 지키고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상투를 칼로 잘랐고, 큰 길거리마다 사람들이 진을 치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상투를 잘랐고, 모든 관리들과 군인들은 당장에 머리를 깎았다. 비통하게 울부짖고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

지방에서는 동학당이 다시 일어섰고 여러 마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시골로 내려갔던 몇몇 머리 깎인 원님들은 폭도들에게 쫓겨 왔다. 폭도들은 그들을 지배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몇몇은 실제로 죽이기도 했다.“

 

아관파천

대궐사람들 모두가 임금과 세자가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경비를 풀었을 때에 그들은 저마다 대기하고 있던 여자용 가마를 탔다. 이 가마의 가마꾼들은 특별히 고른 사람들이었으나 가마 하나에 두사람을 태운다는 것만 알고 돈을 받았을 뿐이다. 대궐의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자주 그들의 집으로 나가곤 했기 때문에 가마꾼들은 달리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마 하나에 나인이 한사람씩 임금과 세자 앞에 막아 앉아서는 누가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했다. 성문의 파수꾼들에게는 따듯한 음식과 독한 술을 잔뜩 먹여서 완전히 매수를 해 놓았기 때문에 그 소중한 짐을 실은 가마가 지나갈때에 보지도 못하고 훼방도 놓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참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에는 해병 160명을 가때 막 소집했었다. 해병대는 급히 길을 떠나 1896211일 아침 일곱신지 여덟신지에 서울에 도착했다.”

 

언더우드 동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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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부부 묘 /위키피디아
언더우드 부부 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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