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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이변
인위적 환경파괴와 자연적 재해 빈발…기근 심화, 농민 이탈, 지방통제 약화
신라멸망과 기후변화③…가뭄에 농민반란 확산
2020. 03. 06 by 김현민 기자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재위 9년째가 되던 935년에 사방의 국토를 모두 빼앗기고 세력이 약해져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쳤다. 이로써 BC57년에 시조 혁거세가 세운 신라는 992년만에 운명을 고했다.

신라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수많은 이유를 제시한다. 후반기에 골품제도의 문란, 귀족과 사찰의 대토지 경영과 이로 인한 생산력 감소, 농민의 몰락, 인적 자원의 고갈, 불교의 타락,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지도층의 분열 등등. 모두 일가견이 있는 견해들이다.

이런 정치, 경제, 사회적 시각 이외에도 신라 멸망의 이유로 환경 피해에 의한 자연 재해의 관점에서 접근한 학자가 있다. 경북대 황상일 교수와 경희대 윤순옥 교수는 2013년 한국지리학회지에 실은 자연재해와 인위적 환경변화가 통일신라 붕괴에 미친 영향이란 논문에서 그런 논리를 펼쳤다.

두 교수의 논리를 요약하면, 경주의 인구 과밀이 삼림 파괴라는 환경 피해를 유발했고, 그에 따라 가뭄·홍수 등 재해가 빈발했으며, 기뭄으로 가뜩이나 빈곤해 진 농민들이 국가와 관리들의 수탈에 반발해 반란의 대열이 동참하면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수도 경주의 인구는 신라 전성기에 70~80만명이 거주한 것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사료는 적시하고 있다. 이 많은 인구가 좁은 경주 분지(선상지)에 몰려 살면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경작지가 개척되고 연료를 공급하고 가옥을 지으면서 신라 말기에는 경주 인근의 삼림이 황폐화되었다.

황상일·윤순옥 교수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자연재해를 망라해 본 결과, 가뭄, 홍수, 지진, 메뚜기 출현, 역질등 자연재해가 신라 말기인 786~83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가뭄은 농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홍수는 오히려 곡물생산을 늘리는 효과가 있지만, 대규모 관개시설을 조성하지 못했던 신라시대에 가뭄은 심각한 곡물생산 감소를 초래했다.

특히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는 토양침식, 지하수 하강, 경작지 황폐화를 유발하면서 가뭄과 홍수의 효과를 증폭시켰다. 특히 786~835년 사이에 가뭄이 가장 빈번했다. 이 기간에는 평균 5~6년을 주기로 50년 동안 9회의 가뭄이 기록되어 있다.

가뭄과 기근은 동반관계를 형성했다. 가뭄이 심한 이듬해 봄에 극심한 춘궁기를 거쳐야 했다. 786~835년 사이에 가뭄이 빈발하면서 기근의 기록이 급증한다.

특히 원성왕(재위 785~798) 시기에 5년간 가뭄이 이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삼국사기> 열전에 향덕(向德)은 웅천주(공주)에 사는 백성인데, 흉년이 들어 전염병까지 겹치자 부보님을 공양할 길이 없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먹였다라든지, “청주(菁州, 진주)에 사는 성각(聖覺)이라는 백성은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서 채소만으로는 봉양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다리살을 베어서 먹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흉년에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은 도적이 되었다. 산속으로 들어간 도적은 산적이 되었고, 바다로 나간 도적은 해적이 되었다.

원성왕 4(788)에 나라의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떼가 나타나고, 도적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시기엔 정치적으로 모반과 반란이 네 번 일어 나는데 나라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시기여서 반란은 손쉽게 제압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접근하면서 국가가 곡물을 공급하는 기능을 상실하면서 주민들이 이탈해 도적떼가 된다. 헌덕왕 12(820) 봄과 여름에 가물었고,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이듬해 봄, 백성들이 굶주리자 그 자식을 팔아서 생존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그 다음해인 822년 김헌창의 반란에 지방민의 약 절반이 호응했고, 이로 인해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상실하게 된다.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경주에 들어오는 식량과 연료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지방이 제어되지 못하면서 중앙 정부가 관리들에게 봉급으로 주는 식량이 모자라 경덕왕 16(757)에 녹읍(綠邑)제도를 부활하게 된다. 녹읍제도는 귀족과 관리들에게 봉급 대신에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토지소유자들은 조세와 공납의 징수권(수조권)과 노동력 징발권을 인정받았다.

녹읍제도의 부활은 농민에 대한 귀족들의 수탈을 심화시켜 가뭄과 재해로 자신이 먹을 식량마저 부족한 농민들은 초적이나 산적과 같은 패거리에 합류하고, 반란 세력이 된다.

 

경주 북천 /경주시 홈페이지
경주 북천 /경주시 홈페이지

 

진성여왕 2(888)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이듬해인 889<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 북원(北原, 원주)에 양길(梁吉)과 궁예(弓裔)10개 군현을 획득하고(891),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라고 스스로 일컬었다.(892)

황상일·윤순옥 교수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경주를 포함한 동해안 지역의 삼림에 식생은 거의 제거되었고, 주민들은 경주지역을 벗어나 먼 곳으로 이탈했으며, 모반과 반란이 일어나면서 국가의 역량이 급격하게 쇠퇴했다는 것이다. 경주의 인구는 감소하고 지방 호족의 근거지에 인구가 유입해 지방세력이 활력을 갖게 되었으며, 지방 세력이 성장해 신라의 구심력은 약화하고 원심력이 커졌다.

신라 멸망기인 886~935년 시기에 다섯 차례의 가뭄과 한차례의 기근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직전의 시기보다 자연재해는 덜했지만 이미 정치적으로 붕괴된 상황에서 국가가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말기 50년 동안에 7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진성여왕과 효공왕을 제외하면 모두 재위기간이 10년 미만이었다. 왕권 국가에서 잦은 왕위 교체는 붕괴를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같은 상황의 이면에는 수벽년 동안 경주지역에서 과밀 인구에 따른 식생의 파괴, 이로 인한 경작지 황폐화, 기후적 요인에 의한 가뭄, 곡물 생산의 감소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게 황상일·윤순옥 교수의 지론이다. 신라는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와 자연에 의한 기후변화가 겹치면서 붕괴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삼국 통일 직후인 신문왕 9(689)에 중앙과 지방관리의 녹읍을 폐지하고 달구벌(達句伐, 대구)로 도읍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신문왕은 수도이전을 실행하지 못했다. 신문왕의 천도 계획은 국토의 중앙에서 지방 통제를 원활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경주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속셈도 있었다. 황상일·윤순옥 교수는 기록에는 없지만 신문왕이 천도를 생각했을 때에 수도 과밀화가 가져오는 환경 피해도 고려되지 않았을까, 추정했다.

 

경주 일대는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은 곳이다. 그런 곳에 70~80만명의 과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숲이 사라졌고, 자연 복원력의 임계치를 넘어섰다. 석탄과 같은 대체에너지가 나오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750~850년 사이 한반도는 장기간의 건조기를 맞았다. 혹심한 가뭄과 이로 인한 기근이 국가의 동력을 무기력하게 했고, 반란에 영향을 미쳤다. 85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900년대 들어가면서 경주 일원만 장악하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경애왕, 경순왕 때엔 그나마 경주마저 지키지 못했다. 경애왕 3(926)에 견훤이 경주를 쳐들어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임금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견훤의 지명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들어 바쳤다.

김부식은 경순왕을 칭찬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의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만약 죽기를 다하여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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