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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찌가 음모에 교황청 은행 지위 잃어…미켈란젤로, 다빈치 등 예술가 지원
메디치家③…위대한 로렌조, 위기에 빠진 은행업
2020. 03. 11 by 김현민 기자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메디치은행의 창업자 코지모(Cosimo)의 손자이자, 피에로(Piero)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지병으로 죽자 146920세의 젊은 나이에 가문을 이어받았다. 그는 위대한 로렌조’(Lorenzo il Magnifico)라는 칭호에 걸맞게 메디치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그가 피렌체를 통치할 때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절정을 이뤘다.

그는 부와 권력을 쥐고 있던 메디치가의 장남으로 호화롭게 성장했다. 영특하고 강인하다는 평을 받았고 활기가 있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당시 스포츠 경기였던 칼치오와 팔로니, 사냥을 즐겼고, 노래를 좋아하고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직접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지지파들을 배후에서 조정해 피렌체 공화국을 이끌었다.

 

로렌조 데 메디치 /위키피디아
로렌조 데 메디치 /위키피디아

 

볼테라(Volterra)라는 지역에서 암염의 일종인 명반(alum)이 지역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볼테라는 자치지역으로 피렌체에 공물을 바치는 속국이었다. 볼테라 주민들은 명반을 개발하기 위해 피렌체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명반이 값 나가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볼테라 주민들은 피렌체의 자본을 거부하고 지역 자본가에게 개발권을 넘겨주려고 했다. 차제에 볼테라를 피렌체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광산 이권을 둘러싸고 폭력사태가 빚어졌다. 1472년 로렌조는 피렌체의 용병부대를 보내 진압했다. 용병들은 진압과정에서 현지 주민을 약탈하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로렌조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약탈자를 찾아내 교수형에 처하고 사태를 수습하면서, 명반 광산의 소유권을 원래대로 돌리고 독립 움직임을 저지했다. 로렌조의 초기 정치활동은 오점으로 시작되었다.

 

교황청과의 사이도 뒤틀어졌다. 교황 식스투스 4(Sixtus IV)는 교황령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볼로냐 근처의 이몰라(Imola)라는 작은 마을을 매입하려 했다. 이 마을은 원래 밀라노의 영토였는데 피렌체가 10만 플로린을 주고 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그 땅을 원했다. 밀라노의 공작은 자신의 혼외 딸을 교황 가문으로 시집보내려는 속셈으로 그 땅을 4만 듀캇을 주고 교황에게 팔기로 했다.

그런데 교황 식스투스는 교황청 은행인 메디치 가문에 4만 듀캇을 조달하라고 요청했다. 메디치 은행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 틈새를 피렌체의 경쟁 은행가문인 파찌 가문(Pazzi family)이 파고 들었다. 파찌 은행은 교황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빌려주고, 메디치 은행이 확보했던 교황청 계좌를 꿰어 찼다. 로렌조와 교황청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피렌체와 로렌조의 입장에서는 파찌 가문은 배신자였다. 파찌 가문은 피렌체 정치를 장악한 메디치가를 붕괴시키려 음모를 꾸몄다. 그들의 목표는 로렌조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Giuliano)를 죽이는 것이었다.

음모자들은 1477년초 로마에서 회동했다. 교황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 피렌체의 대주교를 노리는 피사의 대주교 프렌체스코 살비아티(Francesco Salviati), 파찌 은행의 경영자 프렌체스코 데 파찌(Francesco de' Pazzi) 세 사람이었다. 교황 식스투스도 이들의 음모를 용인했다.

 

성모와 예수 그리스도가 잉크병을 쥐고 있는 로렌초와 메디치가 가족에 둘러 싸여 있다.  /위키피디아
성모와 예수 그리스도가 잉크병을 쥐고 있는 로렌초와 메디치가 가족에 둘러 싸여 있다. /위키피디아

 

1478426, 그날은 부활절 일요일이었다. 1만명의 신도들이 피렌체 대성당에 미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성소의 종이 울리자 음모자들은 교회문을 닫아 걸고 메디치 형제들에 덥쳤다. 동생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형 로렌조는 간신히 탈출했다.

성난 군중들은 공모자들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죽였다. 파치 일족들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파치 가문의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 조치를 당했다.

이 사건을 파찌 음모사건(Pazzi conspiracy)이라고 하는데, 이 쿠데타의 실패로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입지가 더 강해졌다.

 

교황은 성직자인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한데 대해 분노해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파문과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교황은 이어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나폴리 왕국으로 하여금 피렌체를 공격하도록 했다.

교황의 지시로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드 1(Ferdinand I)의 아들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Alfonso)가 피렌체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시가 파괴당할 때가 임박했다고 협박했다.

로렌조는 동맹국인 밀라노에 무력 원조를 요청했지만 밀라노는 내부 정정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지원을 하지 못했다.

결국 로렌조가 나섰다. 그는 시뇨리아(의회)에 나폴리 대사로 보내달라고 했고, 의회는 그에게 대사직을 부여했다. 147912월 그는 나폴리로 가 페르디난드 국왕과 담판을 벌였다. 로렌조와 나폴리 국왕은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조건은 피렌체에게 약간 불리했다. 피렌체는 칼리브라이 공작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교황의 요청에 따라 투옥된 파찌가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평화가 찾아왔다. 피렌체는 나폴리와도 동맹을 체결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 메디치 가문들이 둘러 싸고 있다. 왼쪽에 로렌조가 말과 함께 서 있다. /위키피디아
동방박사의 경배에 메디치 가문들이 둘러 싸고 있다. 왼쪽에 로렌조가 말과 함께 서 있다. /위키피디아

 

나폴리와 전쟁 중에도 로렌조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교황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두 번이나 그를 암살하려 시도했다.

메디치가와 교황 사이를 다시 맺어준 계기는 1480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가 이탈리아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에 성공한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Mehmed II)는 로마를 점령해 동로마에 이어 서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꿈에 차 있었다. 이슬람 병사 7천명은 그해 이탈리아 반도 끝 부분인 오트란토(Otranto)에 상륙했다.

교황은 다급해졌다. 식스투스 4세는 기독교 국가가 모두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탈리아내 국가

끼리 싸우지 말라고 하면서 군대의 차출을 요청했다. 로렌조는 피렌체의 주요 가문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교황청에 보내 애매한 사과를 전하고, 교황도 용서하는 선에서 화해가 이루어 졌다. 이슬람군은 이듬해 메흐메드 2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로마 진군을 멈추고 철수했다.

 

교황청과 싸우는 사이에 메디치 은행은 휘청거렸다. 로렌조는 할아버지와 달리 사업 감각과 재능이 없었다. 그는 전문경영인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고, 총지배인 프란체스코 사세티(Francesco Sassetti)가 하자는 대로 은행을 맡겼다. 주변에서는 사세티가 사심이 있고 은행돈을 착복한다는 경고를 했지만 로렌조는 그런 충고를 듣지 않았다.

프랑스 리용 지점이 먼저 문을 닫았다. 곧이어 런던 지점에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가 장미전쟁을 치르면서 빌려간 돈을 갚지 않은데다 부실 경영이 터져 나왔다. 런던 지점도 폐쇄했다.

브뤼주(Bruges, 벨기에) 지점도 부실 경영으로 문을 닫았다. 밀라노 지점도 위태로워 졌고, 로마, 나폴리 지점도 근근히 버텨갔다. 파찌 가문에게 주요 고객들을 뺏긴게 큰 타격이었지만, 은행 내 부패와 무능이 또다른 붕괴의 원인을 제공했다. 로렌조는 은행 파산을 막기 위해 친인척들의 자금을 얻어 근근히 메웠는데, 돈을 갚지 않아 친척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 피렌체 재정에서 빌려 은행 부실을 막았는데 로렌조가 사망후 그의 상속인들은 75천 플로린을 상환해야 했다. 결국 메디치 은행은 1492년 로렌조가 죽고 가문을 이어받은 피에로의 시기인 1499년에 파산하고 만다.

 

메디치 가계도 /위키피디아
메디치 가계도 /위키피디아

 

은행사업에 관심이 없었던 로렌조는 예술과 건축 분야에 크게 기여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로렌초는 궁궐에서 피에로와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형제(Piero and Antonio del Pollaiuolo),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도메니코 키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와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하며 연회를 즐겼다. 로렌조는 말년에 은행이 파산 위기에 빠지는 바람에 자신이 예술품 제작을 의뢰하지 못했지만 다른 후원자를 소개해 주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조 가족들과 함께 5년을 살았으며, 함께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로렌조는 할아버지 코지모가 만든 메디치 도서관에 고서적을 모았다. 그는 대리인을 보내 많은 고전 작품들을 그리스에서 찾아 왔고, 수집한 책들을 복사하고 유럽 대륙에 그 지식을 퍼트렸다. 그는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젤로 폴리치아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를 포함한 그의 학문적 동지 무리를 통해 인본주의 발전을 후원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을 연구하고 플라톤의 이론을 기독교와 접목시키려 했다.

로렌조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주머니에 넣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행위는 우리 조국에 큰 영광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 금액이 잘 쓰여 기쁘다.”고 말했다.

로렌조는 예술의 감식가, 건축의 전문가라는 호칭을 들으면 아주 좋아했고, 스스로 그러하다고 여겼다. 중요한 작품을 만들 때 예술가들은 그를 불러 자문을 구하곤 했다.

 

그는 마흔셋의 젊은 나이에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다. 아버지가 앓던 통풍이 그에게도 찾아왔다. 로렌조는 149248일 늦은 밤에 사망했다. 메디치 가문은 로렌조의 장남 피에로(Piero di Lorenzo de' Medici)의 손에 넘어갔다.

로렌조는 르네상스를 일으킨 공로로 위대한 로렌조라 불리지만, 은행사업을 망친 인물로도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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