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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이익에 봉사한 교황들…종교개혁과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려
메디치家⑤…두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
2020. 03. 13 by 김현민 기자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교황 레오 10(Leo X, 재위: 15131521)와 클레멘스 7Clemens VII, 15231534)는 중간에 네덜란드 출신 하드리아누스 6(Hadrianus VI)1년여 끼어들어 재위한 것을 재외하면 21년간 로마 교황청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 기간에 교회는 부패했고,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 일어나 유럽에 종교를 앞세운 일대 혼전이 벌어진다.

두 메디치 교황은 가문의 힘을 활용해 이탈리아의 패권을 쥐려 시도했다. 한때는 합스부르크와 손잡고, 또다른 때엔 프랑스와 제휴해 전쟁을 벌이며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15129월 피렌체를 재점령한 로렌조의 둘째아들 지오반니(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추기경은 이듬해에 전임 율리우스 2(Julius II)가 죽자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니, 레오 10세다. 레오는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장자인 형 피에로의 아들 로렌조 2(Lorenzo II de' Medici)에게 피렌체를 맡겼다. 로렌조 2세는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이 되어 피렌체시 정부의 결정을 자신의 집에서 처리했다.

1515년 프랑스에서 루이 12(Louis XII)가 죽고 프랑수아 1(François I)가 국앙에 올랐다. 프랑수아도 아버지만큼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야심을 품었다. 레오 10세는 프랑스의 경쟁자인 오스트리아-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수아 국왕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했다. 레오 10세는 조카 로렌조를 피렌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맹군을 이끌고 볼로냐로 갔다. 프랑스군과 교황군은 전투를 하지 않고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은 교황측에게 불리하게 결말지어졌다. 레지아, 모데나를 페라라 공작 알폰소에게 넘기고 프랑스의 나폴리 장악에도 협조했다. 교황이 얻은 것이라곤 동생 줄리아노(Giuliano de' Medici)에게 네무르 공작(Duke of Nemours) 자리를 하나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줄리아노는 곧이어 1516년에 사망하는 바람에 그 마저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교황 레오 10세(가운데)와 줄리오 추기경(왼쪽, 후에 클레멘스 7세), 루이기 추기경 (라파엘로作) /위키피디아
교황 레오 10세(가운데)와 줄리오 추기경(왼쪽, 후에 클레멘스 7세), 루이기 추기경 (라파엘로作) /위키피디아

 

레오 10세는 아드리아해에 면한 우르비노(Urbino)를 교황령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우르비노 공작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Francesco Maria I della Rovere)였다. 그는 교황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전임 율리우스 2세 때 피렌체 공격에 나서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레오 10세가 프랑수와 1세 침략군에 맞서자고 했을 때 중립을 지켰다.

교황은 우르비노 공작의 치명적인 약점을 찾았다. 델라 로베레는 5년전에 라벤나에서 추기경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작에게 로마로 와서 그 사건을 소명하라고 명령했다. 델라 로베레는 교황의 명을 거절했다.

레오 10세는 로렌조 2세에게 교황군 1만명을 주어 우르비노를 점령하라고 했다. 로렌조는 쉽게 우르비노를 점령했지만 우르비노의 용병들은 산악지대로 도망쳐 저항을 계속했다. 이 전투에서 로렌조는 화승총에 크게 부상당했다. 하지만 델라 로베레 공작이 용병들에게 봉급을 지급할 돈이 없어 전투를 중단하고 우르비노를 떠났다.

교황은 1517년 로렌조를 우르비노 공작에 임명하고, 그 땅을 교황령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르비노 공국 /위키피디아
우르비노 공국 /위키피디아

 

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작가와 학자들을 양성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규모 도서실에 예술가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할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황청의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미술 아카데미를 후원하고 대학에 라틴어 사용과 연구를 권장하고 라틴어 작가와 시인들을 후원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레오는 미켈란젤로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으나, 라파엘로를 더 좋아했다.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에게는 교황궁의 공무실을 장식하는 작업을 맡겼다.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실권자이자 우르비노 공작인 조카 로렌조 2세를 프랑스 왕실과 결혼시키려 했다. 양측의 혼담이 성사되어 로렌조는 15183월 프랑수아 1세의 사촌 마들랭 드 라 투르 도베르뉴(Madeleine de La Tour d'Auvergne)와 결혼하게 되었다. 로렌조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다. 프랑스 왕녀는 19194월 딸을 낳고 곧바로 죽었고, 로렌조도 그 다음달에 죽었다. 부부가 낳은 딸 카테리나(Catherina de' Medici)는 후에 프랑스 국왕 앙리 2(Henry II)의 왕비가 된다.

레오 10세는 로렌조가 죽은후 갓난아이인 카테리나를 우르비노 여공작으로 임명했다.

 

레오 10세의 씀씀이는 헤펐다. 교황은 손닙 접대에 극적인 퍼포먼스를 벌이고 연극, 가면극, 발레, 무언글들을 공연하게 했다. 또 식사 자리에는 진수성찬을 마련해 식객들과 즐겼고 광대의 연기를 곁들였다. 그는 유흥과 사냥에 돈을 흥청망청 썼다. 레오는 이런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성직을 매매해 돈을 받았고, 그를 본받아 주교들은 면죄부(免罪符)를 팔았다.

레오의 이같은 호화생활에 불만을 느끼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 추기경 알폰소 페트루치(Alfonso Petrucci)는 교황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으나, 모의자 중 한 사람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음모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레오 10세에 대한 결정적인 반대 움직임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독일에서 벌어졌다. 레오가 교황에 오른지 4년째 되는 15171031일 마르틴 루터 신부는 비텐베르크 대학 궁정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레오 10세의 성당 건축비와 면죄부 판매를 성토했다.

레오 10세는 처음에는 수도사들끼리 벌이는 시시한 논쟁쯤으로 알았다. 하지만 독일 제후들이 가세하면서 종교개혁의 요구가 확산되자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했다. 교황은 또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을 겸임하는 카를 5(Karl V)에게 루터파를 제압하도록 요구했지만, 카를 5세는 오히려 밀라노를 포함해 프랑스의 소유지를 공격할 때 교황이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레오는 카를 5세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하느님은 더 이상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151311월말 사냥에 나갔다가 열감기에 걸려 며칠후에 숨졌다.

 

레오 10세의 사촌동생 줄리오(Giulio di Giuliano de' Medici)도 추기경이었다. 그는 레오 10세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 형에 이어 교황을 계승하려고 로마로 황급하게 갔다. 하지만 카톨릭 성직자들 사이에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발심이 높아 네덜란드 플랑드르 추기경을 후임 교황으로 선출했으니, 하드리아누스 6세다. 하드리아누스 6세는 메디치 가문과 달리 아주 검소했지만 몸이 허약해 이듬해 사망했다.

다시 콘클라베가 열리고 이번에는 줄리오가 교황이 되었으니, 클레멘스 7세다.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교황이 된 것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 1, 영국의 헨리 8,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가의 혈통을 이어받아 예술과 철학분야에 관대한 후원자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고 신학과 철학을 논의하는 것을 좋아했다. 미술가 라파엘로에게 몬테 마리오에 별장 설계를 부탁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도 바티칸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미켈란젤로에겐 산 로렌조의 도서실 설계를 맡겼고,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도 격려했다.

 

상 안젤로 성 /위키피디아
상 안젤로 성 /위키피디아

 

그런데 클레멘스는 사촌형인 레오가 말기에 체결한 합스부르크 카를 5세와의 동맹을 깨고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와 1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이에 카를 5세는 밀라노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교황군의 연합에 맞섰다. 15252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패했고, 국왕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수와 1세는 카를 5세와 비밀 협정을 맺어 알프스를 넘어 철군했다.

이제 이탈리아 반도에는 교황의 병사만 남았다. 반교황군에는 독일 바이에른과 프랑켄 지방에서 온 루터파 신봉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린츠크네히테(Landsknechte)라 불리는 독일 용병으로 기독교의 적을 복수하고 재물을 약탈하자는 선동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를 약탈하거나 두둑한 보수를 달라고 요구했다. 클레멘스 교황은 거부했다.

교황은 마지막으로 로마 방어에 나섰다. 152756일 클레멘스는 교황군을 이끌고 상 안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피신했다. 스페인군, 린츠크네히테, 이탈리아내 반교황파의 연합 공격이 시작되었다. 반교황군은 도시를 약탈했다. 교화와 수도원의 문은 부서지고 그 안의 성스러운 제물들은 내팽겨쳤다. 술취한 매춘부가 고급 제의를 어깨에 걸쳐 입었고, 수녀들의 운명은 주사위로 결정되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 마르틴 루터의 이름이 새겨졌다. 보상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살해되었다. 첫날에만 8천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로마 포위 기간에 그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들어낸 상당수의 예술품들이 파괴되었다.

안젤로 성은 포병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주민 3천명이 한꺼번에 성내로 도피하는 바람에 식량이 금새 거덜났다.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한달을 버티다 6월 초에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항복했다. 클레멘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조건으로 40만 듀캇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래도 그는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하고 안젤로 성에서 유폐되었다가 6개월 후에 집사의 옷을 입고 도주했다.

 

아무데도 교황을 도와주는 곳이 없었다. 프랑스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역병이 만연하는 바람에 철군했다. 로마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피렌체에서는 반메디치 정권이 들어섰다. 메디치 가문은 모두 피렌체를 떠났고, 15년만에 다시 추방령이 내려졌다.

결국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 타협했다. 1529629일 바로셀로나에서 양측이 평화협정에 조인했다. 이 협정에 의해 클레멘스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주도권을 인정했고,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되찾는 것을 인정했다. 카를은 클레멘스를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1530년 피렌체 포위 공성전 /위키피디아
1530년 피렌체 포위 공성전 /위키피디아

 

이제 메디치가는 반역자의 소굴이 된 피렌체를 되찾는 길이 열렸다. 피렌체의 반메디치파는 다급해졌다. 그들은 메디치를 내쫓는데는 성공했지만 카를 5세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왕정시대에 군주들끼리는 서로 싸워도 아랫것들이 덤벼드는 반란에는 공동으로 대응했다. 이탈리아 주도권을 놓고 메디치가와 합스부르크가는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지만, 피렌체를 되찾는데는 공동전선을 폈다.

 

피렌체 공성전은 152910월부터 시작되어 약 10개월간 진행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지원으로 성공한 미켈란젤로는 반메디치 연합에 참여해 피렌체 방어에 앞장섰다. 반메디치 전선은 국민병을 소집했다.

스페인군이 메디치가를 위해 파병되었다. 메디치가의 연합군은 4만명에 이르렀지만 공격보다는 포위전술을 썼다. 피렌체 시민들은 외부의 마을을 연결하는 비밀루트를 개발해 식량을 공급받았지만 1530년 그 루트조차 포위군에 의해 드러나 끊겨버렸다. 식량이 떨어지면서 피렌체 시민들은 굶어 죽고 역병에 시달리고, 폭도들이 빵을 달라고 했다. 차라리 메디치가가 오면 낳을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시민대표들은 클레멘스 교황와 카를 황제가 요구하는 조건을 무조건 수용했다. 시민들은 투옥된 메디치 지지자들을 모두 석방하고 막대한 보상금을 약속했다.

15309월 메디치의 대리인이 피렌체 시내에 입성하고 메디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렌조 2세의 사생아 알레산드로(Alessandro de' Medici)를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했다. 피렌체가 공화국에서 공작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로렌조 2세는 부인인 프랑스 왕녀와 사이에 딸 카테리나딸 하나만 낳았고, 사생아로 알레산드르라는 아들을 키웠다. 알레산드르는 클레멘스가 추기경 시절에 낳은 사생아라는 설도 있는데, 여하튼 공식적으로는 로렌조의 아들이었다.

클레멘스는 프랑스 왕가와 피가 섞여 있는 로렌조의 딸 카테리나를 프랑스 왕실로 시집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프랑스와 원수지간인 합스부르크 카를 5세의 눈치를 보았는데, 카를 5세는 의외로 메디치와 부르봉왕가의 결혼을 묵인했다.

153310월 메디치가의 적손이자 우르비나 여공작인 카테리나와 프랑수와 1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앙리 드 발루아가 결혼했다. 앙리 왕자는 형인 프랑수와 3세가 1536년 사망하면서 왕세자가 되고 1547년 프랑스 국왕에 올라 카테리나는 왕비가 된다.

 

클레멘스는 1536년 자신의 사생아로 알려진 로렌조의 아들 알레산드로를 합스부르크가의 수장 카를 5세의 딸 마르그리트(Margaret)와 혼인시켰다. 하지만 알레산드로는 결혼식을 마치고 피렌체로 돌아온 직후 몇 달만에 살해되었다.

음모는 먼 친척인 로렌자치오(Lorenzino de' Medici)란 자가 적장자의 부와 권력에 질투를 느껴 미인을 소개시켜준다며 알레산드로를 자기집에 끌어들여 죽여버렸다. 살인자는 도망갔다. 메디치가의 섭정들은 알레산드로가 죽었다는 얘기를 감춘 채 피렌체를 장악했다. 며칠후 소문이 났지만 반란은 쉽게 무마되었다.

후계자가 논의되었다. 알레산드로는 마르그리트와 사이에 아이가 없었지만 줄리오(Giulio)라는 네살박이 사생아를 두었다. 또다른 후계자는 위대한 로렌조의 외손녀 마리아 살비아티(Maria Salviati)의 아들인 코지모 1(Cosimo I)였다. 자격으로 치면 줄리오가 마땅히 후계자가 되어야 했지만 너무 어렸다. 코지모는 모계 혈통으로 내려온 메디치가였다.

주도권은 메디치파로 클레멘스의 신뢰를 받고 있던 프란치스코 구이치아르드니(Francesco Guicciardini)가 쥐었다. 그는 줄리오보다는 방계인 코지모가 컨트롤하기 쉬울 것으로 보았다. 그를 앞세워 피렌체를 주무를 속셈이었다. 줄리오를 미는 사람도 있었지만 후계는 코지모 1세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코지모 1세는 그렇게 녹록한 인물은 아니었다.

 

1300~1500년 사이 피렌체의 확장 /위키피디아
1300~1500년 사이 피렌체의 확장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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