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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계도 형성…합스부르크 카를 5세와 동맹 맺어 영토 확장
메디치家⑥…투스카니 대공 시대, 코지모 1세
2020. 03. 14 by 김현민 기자

 

15371월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코지모 1(Cosimo I de' Medici, 1519~1574)는 부계로 가문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모계 혈통으로 가문과 피렌체를 물려받았다.

그에게 메디치가는 외가였다. 그의 외할머니 루크레지아(Lucrezia de' Medici)위대한 로렌조’(Lorenzo de' Medici)의 장녀로 이탈리아 금융가문의 자코포 살비아티(Jacopo Salviati)에게 시집을 가 딸 마리아 살비아티(Maria Salviati)를 낳았다. 마리아는 피렌체 출신 용병대장 집안의 지오반니 달레 반데 네레(Giovanni dalle Bande Nere)에게 시집을 가 코지모 1세을 낳았다.

부계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동양권이나, 유럽의 가문의 입장에서 볼 때 코지모 1세는 가문을 이어받을수 없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제위계승에서 보듯, 메디치가에서 외손주도 가문의 합의가 있으면 계승권을 가졌다.

코지모 1세는 메디치 가문의 부계 혈통이 알레산드르(Alessandro de' Medici)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자, 메디치 가문의 합의로 계승했다. 알레산드르에겐 줄리오(Giulio)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네 살밖에 되지 않았고, 사생아였다. 피렌체의 메디치파들은 줄리오에게 계승권을 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두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약간은 어수룩한 코지모 1세에게 물려줘 자신들이 좌지우지하자고 의견을 모아 그를 선택했다. 따라서 메디치 가문의 가계도는 코지모 1세 이후에 새롭게 그려진다.

 

코지모 1세 /위키피디아
코지모 1세 /위키피디아

 

코지모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을 때 나이는 17살이었다. 그는 남들이 관찰한 것과 달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가문을 계승한 직후인 15377월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망명자들이 국외에서 군대를 조직해 투스카니(Tuscany)를 쳐들어왔다. 그는 스페인군의 도움을 얻어 반란군을 제압했다. 반란이 제압된 뒤에도 스페인군이 피렌체에 주둔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Karl V)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나폴리, 네덜란드의 방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피렌체에 주둔한 스페인군은 카를 5세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코지모 1세는 전임자들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가 고난을 당한 사실에 유의하고 합스부르크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힘이 강한 쪽에 붙어야 권력이 유지된다는 정치논리를 그는 알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코지모에게 공작(duchy)으로 인정할 터이니 황제의 봉토가 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스페인군의 철수를 명령하지 않았다. 코지모 1세는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아 과부가 된 전임 알레산드르의 부인 마르그리트(Margaret)와의 결혼을 제의했다. 마르그리트는 카를 5세의 딸이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딸을 그에게 주지 않고 교황 파울루스 3(Paulus III)의 가문으로 시집보냈다. 피렌체 공작보다 교황과 가깝게 지내야겠다는 속셈이었다.

코지모는 베르나르도 안토니오(Bernardo Antonio de' Medici) 주교를 특사로 카를 5세에게 파견했다. 코지모는 특사를 통해 피렌체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끊고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의했다. 또 카를 5세의 제국군이 투스카니를 자유롭게 지나가도록 허용할 것을 제의했다. 카를 5세는 마음을 돌려 코지모에게 공작 지위를 이어받게 하고, 피렌체에 스페인군을 철수했다.

코지모는 카를 5세의 딸과의 결혼이 거절되었지만 나폴리의 스페인 총독의 딸 레오노르 데 톨레도(Leonor Álvarez de Toledo)와 결혼해 처가의 든든한 배경을 마련했다.

 

시에나 전쟁 /위키피디아
시에나 전쟁 /위키피디아

 

1554년 코지모는 카를 5세의 지원에 힘입어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투스카니에 피렌체의 경쟁국인 시에나(Siena)로 쳐들어갔다. 시에나 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시에나의 인구가 4만명에서 8천명으로 감소했다. 1557년 마침내 코지모는 시에나를 얻게 되었다.

시에나를 얻은후 그는 공작(Duke)보다 높은 지위를 바랬다. 또 피렌체의 군주보다 더 넓은 군주가 되고 싶었다. 그는 1569년 교황 피우스 5(Pius V)로부터 투스카니 대공(Grand Duke of Tuscany)의 지위를 얻어 마침내 꿈을 이뤘다.

그가 연 메디치가의 투스카니 대공 직은 1737년까지 7대에 걸쳐 168년간 이어진다.

 

그는 대공이 된 이후에 군비 증강에 나섰다. 특히 해군력을 크게 키웠다. 코지모 대공은 육지에서만큼 바다에서 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함 건조를 명하고, 건축가들에게 전함 설계를 맡겼다. 선원을 모집하고 노를 저을 외국 노예를 수입했다. 무기도 사들이고, 해군에 스테파노 기사라는 특별한 계급을 조직했다. 코지모는 엘바섬에 해군 기지를 창설하고 코스모폴리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1565년엔 코지모는 투스카니의 함대를 몰타섬에 보내 성 요한 기사단을 지원해 오스만투르크 해군이 공격을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1571년 유럽의 신성동맹과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제해권을 놓고 그리스 레판토에서 대회전을 벌였다. 코스모 1세는 자신의 함대를 파견했다. 이 세기의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서 기독교 세력은 승리해 지중해를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지켰다.

 

하지만 그는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하다는 평을 받았다. 아랫사람들에겐 엄격했고, 잘 웃지도 않았다. 그는 공작령에 공화제의 흔적을 모두 없앴다. 의회인 시뇨리아(signoria), 공화제 국가수반인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를 법령으로 폐지했다. 공화정의 흔적을 없애고 장관제도와 위원회를 두었지만, 코지모 대공은 그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대공은 자신이 승인하지 않은 일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했고, 자문을 받지도 않았다. 메디치파 원로들의 간섭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암살 시도는 여러차례 있었다. 암살 미수자들은 잔인하게 처벌당했으나, 살해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우피치 미술관 /위키피디아
우피치 미술관 /위키피디아

 

그는 군주적 통치를 하면서도 메디치가의 전통적인 예술 후원에는 후했다. 대공은 코시모는 아마 우피치(Uffizi) 미술관을 지었다. 우피치는 본래 피렌체에 산재한 사법부와 행정부, 길드 사무실들을 하나로 모아 자신의 행정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오늘날 메디치 가문이 보유했던 컬렉션들이 전시되고 있다.

대공은 또 피티궁(Palazzo Pitti)을 완공했다. 이 궁은 피렌체의 은행가 루카 피티(Luca Pitti)가 지은 건물을 사서 개조한 것으로, 궁전 뒤에 보볼리 정원을 만들었다.

 

피티궁 /위키피디아
피티궁 /위키피디아

 

코지모 대공은 피렌체 공화정의 자유를 박탈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반역을 막기 위해 많은 첩자를 두었고, 배신자들은 감옥에 쳐 넣었으며, 시민들에겐 과중한 세금을 물렸다.

하지만 그는 쇠락하는 메디치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것만은 분명하다. 피렌체를 스페인의 종속상태에서 벗어나게 했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해군력을 증강해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막는데 일조했다. 투스카니의 배수관개시설을 발전시키고 운하를 열고 올리브 농장과 은광을 개발하고 피사(Pisa)와 리보르노(Livorno)를 발전시켰다.

 

말년에 그는 종종 발작 증세를 일으켰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574421일 그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칼치오(Calcio) 시합을 보러 나갔다가 갑자기 기절한 다음 쉰 다섯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고 투스카니 대공의 지위는 장남 프란체스코 1(Francesco I de' Medici)가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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